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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50)

52화

심판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메이딜리언은 묵묵히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가 가는 길 끝에는 크비누스가 있었다.

결승전의 선수 중 하나가 블라디미르 가문의 인간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크비누스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대타라는 남자는 또 뭐란 말인가.

“영광의 관을 가져와라.”

머릿속으로는 딴생각에 열중하면서도, 크비누스는 착실하게 입을 열었다.

뒤에서 시립하고 있던 시종이 승자에게 내리는 황금관을 가져와 내밀었다.

그걸 집으며 크비누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승자는 예를 갖추어라.”

황제의 왼쪽에 서 있던 관리가 메이딜리언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메이딜리언이 한쪽 무릎을 굽히자 크비누스가 그의 머리 위로 금빛 왕관을 씌워줬다.

그 장면이 마치 대관식과도 같았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크비누스가 엄숙하게 물었다.

무투 대회의 우승자에게 으레 하는 질문이었다.

“메이딜리언입니다.”

“그래, 메이딜리언. 그대의 소원은 무엇이지?”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번쩍 눈을 빛냈다.

줄곧 표정 없는 밀랍 인형 같던 얼굴에 실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친자 검사를 청합니다.”

난데없는 말에 다들 귀를 의심했다.

오로지 크비누스만이 잘게 손을 떨었을 뿐이었다.

건방지게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가, 마치 누군가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누구의 친자 검사 말인가?”

말이 없는 크비누스를 대신해 곁에 있던 관리가 물었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기다렸다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저, 메이딜리언이 선황 미쉘라 카데르 제니어스의 친자라는 것을요.”

* * *

“……미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윈터가 입을 틀어막았다.

크비누스가 메이딜리언에게 황금의 관을 내리며 소원을 빌 때까지만 해도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메이딜리언이 제 가문을 멸문시켜달라는 청을 하면 어떻게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열심히 키웠는데.

갑작스러운 사춘기로 엇나가며, 만에 하나라도 그 사춘기가 원작의 흐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하는 복잡한 생각들이 오고 갔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방금, 방금 저 사람이 뭐라고…….”

“선황 폐하 이름을 말했어!”

“세상에, 친자 검사라니!”

“저 남자, 지금 자기가 황자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였다.

윈터가 이번 무투 대회에 부쩍 신경 썼던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다.

황제에게 빌 수 있는 우승자의 소원.

그걸 이용해 메이딜리언의 자리를 가장 완벽하고 충격적으로 되찾아주려고 했던 것인데.

어쩜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빌고 싶었던 소원을 말하는 메이딜리언이라니!

윈터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쟤가 황자였다고?”

한편 윈터가 입을 틀어막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아이셀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직 몸도 성치 않은 윈터가 혹시나 경기장으로 뛰어들지는 않을까 싶어 따라왔던 그녀는 난데없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니, 무슨 황자가 너희 가문에서…….”

거의 충직한 신하처럼 지내지 않았나?

아이셀이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문득 어린 시절 메이딜리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꼬질꼬질하고 어딘지 모르게 싸한 꼬맹이.

윈터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던 음침한 어린애가 황자였다니.

“넌 알고 있었어?”

아이셀은 언제 놀랐냐는 듯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나게 환호하는 윈터를 보며 물었다.

“어어, 당연하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 말에 아이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어릴 때부터 꼭 황도에 가야겠다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그런 셈이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언니, 어떻게 하지.”

“갑자기 뭘?”

“우리 메이 너무 똑똑하지 않아?”

아이셀의 표정이 그대로 썩었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감싸고 돌더니, 제가 낳은 자식도 저렇게 지극정성이진 않을 것 같았다.

결승전이 열린 콜로세움의 반을 초토화시키고, 상대방은 피를 토하고 혼절하기까지 했는데.

지금 윈터는 마치 키우던 강아지가 난생처음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온 것 같이 열광하고 있었다.

“혹시 너 아직도 쟤가 아홉 살 꼬맹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우리 메이는 벌써 다 컸지!”

아니, 그렇게 대견해하는 것 자체가 이미 틀려먹은 것 같은데.

아이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윈터는 잔뜩 들떠서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코앞에 있었으면 벌써 뽀뽀를 백번 해주고도 남았…….”

한창 신나게 쫑알대던 윈터가 뚝 말을 멈췄다.

갑자기 어젯밤 메이딜리언이 제게 한 입맞춤이 떠오른 것이다.

혹시 그때 메이딜리언도 지금의 자신과 비슷한 감정이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어제는 전혀 대견하지도 뿌듯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

“뭐야. 갑자기 왜 말을 하다 말아?”

“어, 어어? 아무것도 아니야.”

윈터가 갑작스럽게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걱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던 아이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속세랑은 한참 거리가 먼 아이셀이었지만 의외로 그녀는 연애 박사였다.

이런 데에 있어서만큼은 눈치가 비상하다는 의미였다.

한 번 의심하고 나니 경기장에 오기 전 윈터가 했던 말도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키우던 강아지가…….’

‘아무래도 사춘기가 온 것 같아.’

갑자기 사춘기가 온 강아지라니.

윈터와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그녀가 애착을 갖는 대상 중에 그런 건 없었다.

강아지인 척 발톱을 숨긴 맹수 같은 남자면 또 몰라도.

“흐흥, 그거였구만.”

의문을 푼 아이셀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는 곧 다시 크비누스를 마주한 메이딜리언을 돌아보았다.

하는 꼴이 영 맘에 안 드는 꼬맹이니만큼, 아이셀은 그를 도와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윈터라는 인생 최대의 강적을 만난 그가 부디 한참을 고생하기를 바랐다.

* * *

한편 경기장은 새로운 소식으로 들썩였다.

섭정 황제를 마주한 미남자가 갑자기 자신을 황자라고 주장하다니.

그가 무투 대회의 결승전에서 승리했으며, 윈터의 대리인으로 나선 것도 사람들 입에서 오르내렸다.

“하, 친자 검사라니.”

헛웃음을 친 크비누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곧 그가 눈앞의 메이딜리언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참으로 놀라운 타이밍이었다.

어떻게 무투 대회의 우승자가 되어 제 앞에 설 생각을 했을까.

살기등등한 제 외삼촌의 눈빛에도 메이딜리언은 그저 태연했다.

친자 검사를 한다는 말에 놀란 것은 비단 관중들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코앞에서 메이딜리언을 마주한 다른 귀족들 또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낯이 익다 싶더라니.”

“당시 연인이었던 에른스트의 삼남과 똑 닮지 않았는가!”

그래, 그랬다.

자꾸만 묘한 기시감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싶더라니.

선황 미쉘라의 피를 이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새빨간 눈동자를 제외한다면, 메이딜리언은 죽은 도미닉 에른스트와 이목구비나 분위기가 흡사했다.

그걸 깨달은 크비누스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토록 당당하게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제 나름대로 벌써 세력을 구축했다는 뜻이겠지.

아스터와는 달리 되바라진 눈빛이 특히나 제 누이를 많이 생각나게 했다.

크비누스는 당장이라도 그 눈깔을 파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는 지금 내게 감히 자신이 황자라 주장하는 것이냐?”

“예. 맞습니다.”

“웃기는 소리. 당시 2황자는 사산되었다.”

크비누스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강철로 만들어진 심장을 가졌다 불리던 선황 미쉘라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날이었다.

‘크비누스, 이제 어쩌지.’

숨 한 번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 갓난아이를 끌어안고 제 누이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피에 젖은 은발. 꼭 감긴 눈동자는 색을 확인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분명 미쉘라는 그랬다.

아이가 세상을 채 눈에 담아보지도 못하고 그리 허망하게 갔노라고.

사랑하는 도미닉이 이곳에 남긴 유일한 연결고리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그때 그 말을 듣고 자신은 웃었던가. 아니면 같이 울어주었던가?

마치 검은 물감을 잔뜩 뿌려댄 것처럼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황궁의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2황자는 죽었다고. 미쉘라가 공표한 사실 그대로.

“아니었습니다. 여기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걸요.”

그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태양 아래 선연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

도미닉을 닮은 반반한 낯을 보니 크비누스의 속이 뒤집혔다.

친자 검사를 해 보기도 전에 그는 이미 알아 버린 것이다.

미쉘라, 제 누이가 기어코 자신의 눈을 피해 빼돌린 황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크비누스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재밌구나.”

두 사람이 대치하는 상황을 지켜보던 아스터도 충격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이미 메이딜리언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으니 더욱 그럴 법했다.

그저 윈터를 따르는 호위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황자라니.

‘인사해. 이쪽은 딜런, 그리고 칸나야.’

무투 대회를 휩쓸고 있는 삼인방과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건 아스터 말고는 모르는 사실인 듯했다.

그래서 아스터는 평소라면 너무 폭력적이라며 보지도 않았을 무투 대회를 끝까지 보았다.

그런데 설마 그 끝에 이런 날벼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메이.’

‘네, 아가씨.’

‘너도 얼른 가서 같이 어울려.’

‘전 아가씨랑 어울리고 싶은데요.’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대화 몇 마디만 듣더라도 윈터와 메이딜리언은 아주 각별한 사이 같았다.

그들 사이에는 타인이 섣불리 끼어들 수 없는 듯한 한 겹의 막이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대타로 무투 대회에 출전하는 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메이딜리언이 황자라는 사실을 끼워 넣으면 무척이나 놀라운 것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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