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그 말에 윈터의 표정이 굳었다.
이 상황에 굳이 아이셀이 흑기사라고 표현할 만한 사람이 몇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래. 음침한 꼬맹이가 대신 출전했다.”
“미친.”
어떻게든 다르게 흘러가길 바라던 원작 그대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윈터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경기 결과는 걱정되지 않았다.
결선 상대가 무려 칸나였지만, 어차피 메이딜리언이 이길 테니까.
윈터가 걱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쪽의 일이었다.
“소원 뭐 빌지 말도 못 했는데…….”
“음침한 꼬맹이가 알아서 빌겠지, 뭐.”
바로 그 알아서가 문제였다.
원작에서 무투 대회를 거의 초토화하며 단시간 내에 우승한 메이딜리언이 빈 소원은 다른 무엇도 아닌…….
‘블라디미르 가문의 멸문을 원합니다.’
그래, 그가 원한 것은 바로 블라디미르 가문의 파멸이었다.
원하는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것이 무투 대회의 원칙.
메이딜리언의 무리한 요구에도 섭정 황제, 크비누스는 그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다.
물론 크비누스는 내심 꽤 기뻤을 것이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던 블라디미르 가문을 우승자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명목으로 전수조사하고 결국엔 말도 안 되는 빌미로 반역이라는 죄를 덧씌워 무너뜨렸으니까.
‘아가씨는 아가씨가 원하는 걸 하세요.’
문득 어젯밤 메이딜리언이 했던 말이 윈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도 내가 원하는 걸 할 테니까.’
자기가 원하는 걸 한
다고 한 게 설마, 원작 그대로 블라디미르 가문을 멸문시킨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불안감으로 울렁거렸다.
화끈 이마에 열이 오른 윈터가 그대로 다시 뒤로 넘어갔다.
“아, 내 머리야.”
“어어, 야, 너 왜 그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윈터를 아이셀이 재빨리 부축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이셀의 팔을 붙잡고 윈터가 시름시름 앓았다.
“언니…… 잘 있어…….”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오늘 나 죽나 봐.”
“아까부터 얘가 진짜 왜 이래? 미친 소리 그만해!”
아이셀이 찰싹찰싹 윈터의 등을 때렸다.
그러나 윈터는 더없이 진심이었다.
따끔따끔한 등을 어떻게든 문지르려 하면서 그녀는 눈을 빛냈다.
“언니.”
“왜, 왜?”
“우리 지금 당장 경기장으로 가자.”
“너 또 이상한 소리 하려고 그러…….”
“아니야. 그냥 경기 참관만 할 거야. 절대 안 싸워, 맹세할게.”
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 얼굴이 사뭇 비장했다.
윈터는 결코 경기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
“……막아야 해.”
여차하면 메이딜리언이 이상한 소리를 할 수도 있으니 그러지 못 하도록 입을 틀어막겠다는 일념으로, 곧 윈터가 무투 대회 결선이 열리는 곳으로 떠났다.
* * *
지난번 윈터의 경기가 워낙 스펙터클하고 화려했던 탓에 한동안 큰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결승전의 관중들은 지난 경기의 배로 몰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윈터는 무려 두 가지 마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속성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 대륙을 통틀어 단 두 명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대현자’ 또는 ‘대마법사’라고 불렀다.
‘이러다가 새로운 대현자가 탄생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은 막연하게나마 윈터에 대해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방대한 마력을 각성한 윈터가 대현자가 될 자질을 가졌다고 일컬어졌다는 이야기는 그 생각에 더 부채질하는 형국이었다.
모이기만 하면 어디서든 윈터에 대해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이번 결승전에 시선이 모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한 달 전에 판매된 결승전 티켓이 천문학적인 가격의 암표로 나오며 더욱 시끄러워졌다.
“오늘 상대가 누구지?”
“자아, 보자. 그래! 괴력의 칸나라는군!”
“아아, 그러면 이번 경기도 제법 볼만하겠구만!”
“과연 윈터가 어떻게 이길지 기대되는데?”
사람들은 이미 윈터의 압도적인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칸나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으나, 윈터는 이미 그들 사이에서 무려 차기 대현자로 꼽히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들뜨는 마음으로 결승전을 기다리던 관중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
“저, 저 사람은 뭐야?”
“행운의 윈터는 어디 간 거야?”
경기장 위에 선 미남자를 보며 다들 어리둥절한 기색이 역력했다.
웅성거림은 점점 커지고, 소식이 빠른 누군가가 이번 결승전의 특이점에 대해 짚었다.
“저 남자가 윈터의 대타라는데?”
“뭐어? 그런 게 가능해?”
가능했다. 정확히는 가능한지 아닌지 규칙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게 더 확실한 설명이었다.
제힘으로 얻을 영예를 포기하고 굳이 결선에서 대타를 세울 만한 인간은 없었으니까.
초유의 사태에 관리들이 이리저리 의견을 모았다.
“그나저나 윈터 블라디미르 선수는 대체 왜 못 나오는 건가?”
“일신상의 이유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냉랭하게 떨어지는 메이딜리언의 말에 심판이 움찔했다.
햇빛 아래 무섭도록 반짝이는 얼굴이,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으음,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선수들의 의견이겠지. 칸나 선수, 어떻게 하겠나?”
이미 결승전을 기대하는 관중들로 경기장은 가득 채워져 있고, 이런 중요한 경기에 대타를 세운 초유의 사태에 관리들은 슬쩍 중대한 결정을 칸나에게로 미루었다.
칸나는 크게 동요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윈터와 겨루는 것을 고대하던 칸나였으나, 상대가 메이딜리언으로 바뀐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늘 하던 힘겨루기랑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다만 이번 무투 대회에 꽤 의욕적이던 윈터가 갑자기 결승전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내심 걱정이 되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염려가 된 칸나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폐하께서도 진행하시랍니다.”
마침내 경기를 관전하러 온 섭정 황제, 크비누스의 허락까지 떨어졌다.
심판이 왼쪽 팔을 들어 올리자 웅성거리던 경기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드디어 결승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제대로 된 판까지 깔아줬는데, 결판을 내줘야지.”
온몸에 갑옷처럼 마력을 두른 채로 칸나가 기세를 피워올렸다.
“여기서 죽더라도 너무 원망하지 마. 꽤 괜찮은 마지막일 거야, 그렇지?”
평소처럼 칸나가 악담을 던졌다.
그러나 원래라면 무성의하게나마 대답 정도는 해줬을 메이딜리언이 오늘은 말 한마디 없었다.
표정 하나 없는 냉랭한 분위기에 칸나가 멈칫했다.
늘 저런 재수 없는 얼굴이긴 했으나 오늘따라 어딘지 좀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웃한 칸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야, 너 혹시 무슨 일 있…….”
“10초 뒤에 결선 시작합니다!”
칸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심판이 외쳤다. 경기가 곧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그녀는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시선은 바닥에 둔 채 메이딜리언은 줄곧 양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대타로 나왔다기엔 투지조차 느껴지지 않는 느슨한 자세였다.
그 모습에 관중들이 투덜거렸다.
“저게 뭐야. 기껏 시간 내서 왔더니.”
“결선이라기엔 좀 이상하지 않아?”
“아아, 윈터 경기나 보고 싶다!”
야유가 가득한 음성이 경기장을 울리던 그때 메이딜리언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를 마주한 칸나의 짐승 같은 기감이 위험을 경고했다.
이토록 엄청난 살기라니.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느낌에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대련을 해왔지만, 그 모든 게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평소의 메이딜리언과는 전혀 달랐다.
번뜩이는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칸나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예상되는 공격을 피하고자 칸나가 훌쩍 뒤로 물러섰으나 메이딜리언의 속도가 한층 더 압도적이었다.
“너……!”
원작에서도 무투 대회의 우승자는 메이딜리언이었다.
게다가 진심으로 이기고자 마음먹은 메이딜리언을 이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윈터 말고는 없었다.
칸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야를 가득 메우는 새카만 마력이었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경기장이 폭발했다.
자욱한 흙먼지가 불어나며 바닥이 그대로 갈라졌다.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관중들이 휘청거렸다.
비명과 소음으로 점철된 아수라장 속에서 오직 메이딜리언만이 홀로 고요했다.
“쿨럭. 켁.”
잔뜩 내상을 입은 칸나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마력으로 온몸을 휘감아 보호했지만, 메이딜리언의 방대한 마력이 쏟아지는 것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움푹 팬 바닥을 짚은 칸나가 울컥 피를 한 바가지 쏟아냈다.
“너, 죽, 여 버리겠…….”
새파랗게 타오르던 칸나의 눈동자가 예고도 없이 초점을 잃었다.
곧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한 방에…… 한 방에 끝났어…….”
“저기 저 바닥 좀 봐. 저런 게 가능한 인간이 있다고?”
“맙소사. 저 사람 대체 정체가 뭐야?”
“그, 그럼, 그러니까 우승자는…….”
순식간에 끝난 경기에 얼떨떨하던 사람들이 뒤늦게 사태 파악을 하고는 점차 환호하기 시작했다.
차기 대현자로 꼽히는 윈터만큼은 아니지만, 메이딜리언의 압도적인 무력 또한 그들이 기대하던 어마어마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 열화와 같은 성원이 쏟아졌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에게선 승리의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 승자!”
우승자를 호명하려던 심판이 멈칫하다가 얼른 외쳤다.
“승자, 윈터 블라디미르의 대리인은 앞으로!”
드디어 이번 무투 대회의 우승자가 탄생했다.
최초로 대타가 우승한 사례이자, 최초로 섭정 황제에게 소원을 빌게 된 남자.
다들 윈터 블라디미르의 대리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이름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