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 *
윈터가 깨어난 것은 어둑한 밤이 다 된 시간이었다.
깜박깜박,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 무섭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을 해 봤어요.”
“메이……?”
기척도 없이 윈터의 곁에 메이딜리언이 앉아 있었다.
혼곤한 정신 속에 윈터가 그와 시선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다고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잔뜩 눈살을 찌푸리는 윈터를 바라보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왜 내게 거짓말을 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거짓말이라는 소리에 윈터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짐작 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특정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착한 메이딜리언이 콕 집어 한 가지를 언급해 줬다.
“저한테 다 나았다고 했잖아요.”
“…….”
하필 걸려도 제일 큰 걸 걸렸다.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내심 아차 싶긴 했었다.
어쩌면, 메이딜리언이 다 알아버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이제 전부 괜찮다고 했잖아요.”
메이딜리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윈터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때, 그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심장 주위로 희미하게 일렁이는 방대한 마력.
억지로 목줄을 채워 지금은 잠시 잠들어 있지만 언제든 틈만 생긴다면 튀어 나갈 눈먼 짐승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짐승은 윈터의 목을 물어뜯고 그녀를 한입에 집어삼킬 것이다.
끔찍한 상상에 메이딜리언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
윈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도 메이딜리언은 기민하게 그녀의 반응을 알아차리고 물 잔을 가져다준다.
몸을 일으키는 다정하고도 익숙한 손길.
메이딜리언이 건네준 물로 조심스레 목을 축인 윈터가 베개에 등을 기대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네가 황제가 되기를 바라니까.”
비정상적일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이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저 아가씨가 바라니까 아가씨가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래야 그녀를 살릴 수 있으니까 순순히 따랐었다.
하지만 그 길이 끝내 윈터를 죽이는 방향이라면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반항적인 목소리에 윈터가 움찔했다.
그러나 기왕 걸린 김에 그녀는 허심탄회하게 제 속내를 내비쳤다.
“네가 원하는 건 전부 남김없이 갖기를 원해.”
그 말에 메이딜리언이 푹 웃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가늘게 떠는 모습은 얼핏 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잘도 말하는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향해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고 말한 건 당신입니다.”
먹잇감을 찾은 듯 번뜩이는 눈동자. 자비라고는 없는 가장 어두운 밤의 장막이 열린다.
윈터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메이딜리언의 진짜 표정이었다.
버석버석 메마른 얼굴은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아가씨한테는 실험해 보지 못했네요.”
살벌한 표정은 그대로인데, 예고도 없이 대화의 화제가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윈터가 멍하니 되물었다.
“뭘?”
“제 마력 말이에요.”
어린애들 장난처럼 메이딜리언의 손에 잿빛 마력이 맺혔다.
“고작 이걸로 아가씨가 아프지 않게 될까요?”
곧 짓궂은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력 말고도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 있다고 들었어요.”
“뭔데.”
“침 바르면 낫는다는 말 못 들어 보셨어요?”
“무, 뭐?”
“제가 발라 드릴까요?”
“……미쳤니?”
메이딜리언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곧 어딘지 모르게 잔뜩 뒤틀린 듯한 웃음기가 깨끗이 사라졌다.
“황제가 될 겁니다.”
기이하게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그대로 윈터를 옭아맸다.
“당신을 위해서.”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에는 오롯이 윈터만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눈빛은 점점 짙고 은밀해졌다.
“아가씨는 아가씨가 원하는 걸 하세요.”
어느새 메이딜리언이 코가 닿을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윈터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나도 내가 원하는 걸 할 테니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는 그 짧은 순간.
윈터의 입꼬리에 깃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낯선 체온에 파드득 놀란 윈터가 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훅 몸을 뒤로 물렸다.
“……메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윈터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미처 말로 다 이루어지지 못한 단어들과 생각들로 혼재되었다.
윈터는 자신의 전생을 자각한 뒤로 단 한 순간도 원작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굳이 메이딜리언에게 묻지 않아도, 그가 원하는 건 명확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칸나의 애정.
그렇기에 윈터는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메이딜리언에게 가져다 바칠 작정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어떤 희생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왜 그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것인지, 윈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메이딜리언이 자신을 유독 따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 시절 고통받던 자신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감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서 늘 타인의 애정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던 그를 알고 있었으니까.
티 없이 밝은 칸나. 아무런 편견도 거짓도 없이 그를 온전히 받아주던 칸나.
원작에서 그런 칸나를 향하던 메이딜리언의 절절한 감정들을 훤히 다 알기에, 윈터는 그저 지금의 상황에서 당장이라도 모른 척 외면하고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너, 너 지금…….”
문제는, 아까부터 술렁거리는 심장이 마냥 당황스러운 감정만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혼란에 휩싸인 윈터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메이딜리언이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양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이게 내 답이에요.”
긴장을 풀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다시 한번 황도에 온 걸 환영해요, 아가씨.”
* * *
밤새 뜬눈으로 지새운 윈터는 또 한 번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바로 아이셀이었다.
“그동안 너무 오래 잤나? 얼굴이 영 말이 아니다, 너.”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으음, 그러니까…….”
메이딜리언이 어제 그러고 사라지고 나서, 윈터는 여전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물론 자신의 최애가 메이딜리언인만큼, 그와의 핑크빛 미래를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뻔히 미래의 짝이 함께 있는 와중에 굳이 그사이에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었고.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
“이상해.”
제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윈터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어젯밤부터 술렁거리던 가슴은 여전히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쿵, 쿵, 제 존재감을 양껏 뽐내며 자신이 여기 있다고 열심히 주장하고 있었다.
“거기가 왜? 어떻게 이상한데?”
혹시 봉인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아이셀이 황급히 윈터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나 제 몸 이곳저곳을 눌러보는 아이셀의 행동에도 윈터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윈터의 봉인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셀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혹시 마력을 너무 써서 머리도 다쳤니? 마법이면 몰라도 의학은 나도 자세히 몰라.”
“언니.”
“왜.”
“키우던 강아지가…….”
“네가 강아지를 키웠어?”
“아무래도 사춘기가 온 것 같아.”
“강아지도 사춘기가 있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말에 와락 표정을 구긴 아이셀이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퍽퍽 쳤다.
윈터는 그저 풀썩 힘없이 침대로 쓰러졌다.
그 퀭한 몰골을 보던 아이셀은 쯧쯧 혀를 차며 수면제를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한참 만에야 조금 정신이 돌아온 윈터가 느릿하게 물었다.
“황도엔 언제 왔어?”
“네가 무투 대회 나간다는 소식 듣자마자.”
“그건 누가 알려 줬는데?”
“누구겠니?”
누구일까 생각하던 윈터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리어트 그 자식이……!”
“걔가 현명한 거지. 넌 보나 마나 무리해서 싸우다가 몸 망칠 게 뻔하잖아.”
침대에 누운 자신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윈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리한 건 사실이었다.
아직까지도 심장을 감싼 유리 한 겹이 깨진 듯 둔탁한 통증이 있었으니까.
“이거 언제쯤 회복될까?”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묻는 말에 아이셀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쎄. 아마 한 달은 걸리겠지.”
“뭐? 한 달? 아이씨, 안 되는데.”
“왜?”
“곧 결선이잖아.”
윈터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아이셀의 표정이 묘해졌다.
“너 말이야. 네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으음, 하루……?”
윈터가 자신 없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이셀이 픽 비웃으며 대답했다.
“일주일이다.”
“뭐라고?”
“난 솔직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그 음침한 꼬맹이가 밤새 간호해서 이 정도로 끝난 거야.”
아이셀의 말에 윈터의 몸이 자동으로 반응이라도 하듯 흠칫했다.
음침한 꼬맹이는 아이셀이 메이딜리언을 부르는 말이었다.
물론 메이딜리언은 전혀 음침하지 않은 데다, 꼬맹이인 시절도 다 지난 지 오래이기 때문에 윈터는 그 호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 결선은…….”
“오늘이지.”
날짜를 계산하는 윈터를 위해 아이셀이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안 돼!”
가장 최악의 사태에 윈터가 벌떡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아이셀의 손에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다시 누워.”
“언니!”
“너 이럴까 봐 내가 온 거야.”
“다른 때라면 모르겠는데 오늘은 진짜 안 돼. 이제 고지가 코앞이란 말이야!”
알버트가 마력환을 복용하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무리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결선까지도 여유롭게 이길 수 있겠다는 계산이 전부 빗나간 것도 모자라 아예 참가도 못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래서야 메이딜리언이 직접 출전하던 원작만도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 아닌가.
“대체 황제한테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결선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절망에 가득 차 금방이라도 벽에 머리를 쿵쿵 찧을 것 같은 윈터의 꼴을 여유롭게 구경하던 아이셀이 말했다.
이미 베개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던 윈터가 눈만 굴려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대신 흑기사가 출전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