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 말에 윈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게 없으면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알버트가 이죽거렸으나 애석하게도 윈터는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마력환 덕분에 잔뜩 흥분해서, 알버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윈터는 그런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흐음,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황도에 온 뒤로 공개적으로 사용한 적도 없는 터라 윈터의 마도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직 그리 많지 않았다.
알버트가 그녀와 함께 황도로 오는 행렬에 있었을 리가 없으니 아이셀의 마도구에 대해 알 만한 사람은 단 하나였다.
윈터가 황도로 오는 내내 히르칸에게 보고를 받은 자.
“지금 그 말, 나중에 또 해 줘라?”
윈터가 픽 웃었다.
그걸 비웃음으로 받아들인 알버트는 당연히 눈이 돌아갔다.
“감히……!”
손을 뻗은 알버트가 윈터의 손목을 잡아챘다.
이미 완력만으로도 충분히 아픈데, 알버트의 손은 화염으로 잔뜩 타오르고 있었다.
열기로 인해 치지직, 윈터의 손목이 그대로 빨갛게 화상을 입었다.
생살이 타는 감각에 윈터가 얼른 알버트를 발로 차고 훌쩍 뒤로 물러났다.
“으읏. 젠장. 더럽게 아프네.”
새하얗게 물집이 잡힌 손목을 보며 윈터가 와락 인상을 썼다.
“죽어라!”
그로부터 알버트가 몇 번 더 달려들었으나 그녀는 번번이 가볍게 공격을 흘렸다.
딱히 예리하지도 않고 그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에 가까운 공격을 윈터가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경기장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고, 눈먼 마력은 바닥에 흉포한 구멍을 잔뜩 남겼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윈터는 경기장 끝까지 몰렸다.
슬쩍 뒤를 바라본 윈터가 작게 인상을 썼다.
이대로 제가 쓰던 수법처럼 장외로 탈락할 수는 없었다.
“아아, 아끼던 거였는데.”
윈터는 아까 알버트를 발로 찼던 신발 밑창이 녹아내린 것을 보고는 쯧 혀를 찼다.
그리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크하하!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도망 다닐 거지? 비겁하기 짝이 없구나!”
그사이에도 알버트는 착실히 날뛰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주의를 끌고 싶던 건 아니지만, 난 네 눈이 맘에 안 들거든.”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였던 것을 윈터가 부당하게 빼앗은 것처럼 바라보던 건방진 눈동자.
윈터가 감히 그런 것을 웃어넘길 리가 없었다.
저를 향해 새파랗게 타오르는 화염을 보며 그녀가 눈을 번뜩였다.
“닥쳐라!”
“미안하지만 알버트, 이기는 건 나야.”
두꺼운 먼지구름을 타고 그대로 알버트의 마력이 윈터에게 쇄도했다.
이내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자욱한 수증기가 경기장에 가득 깔렸다.
지축을 울리는 마력의 충돌에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의 경기는 모두 애들 장난인 것처럼 느껴졌다.
“콜록, 콜록.”
경기장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심판이 매캐한 연기를 걷어내며 연신 기침을 했다.
그때였다. 어딘가에서 부는 바람에 수증기가 깨끗이 걷히고 경기장 한가운데 거대한 얼음 방벽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지?”
저 먼 관중석까지 후끈거리는 화염에도 끄떡없는 얼음 요새에 다들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선수들 중에 누군가 만든 거 아니야?”
“한 명은 바람이고 한 명은 불인데, 대체 누가?”
사람들이 처음 의심한 건 부정행위였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속성의 마력을 다루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하긴, 대마법사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지.”
“헉……! 저기 좀 봐!”
사람들의 의구심을 해결해 주기라도 하듯 얼음 벽이 스르르 녹아서 사라지고 있었다.
잠깐의 요행이었을 뿐 역시나 알버트의 화염이 이긴 건가 싶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곧 방대한 마력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을 통째로 휘감아 얼리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 모양 그대로 얼어붙은 얼음의 마력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장외를 노리고 빠르게 경기를 마무리하느라 바람의 마력을 썼지만 애초에 윈터가 가장 자신 있는 건 바로 빙결 마법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분명 방금 전까지 우세한 듯 보였던 제힘이 조금도 통하지 않는 것을 느낀 알버트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윈터가 다른 속성의 마력을 쓴다는 것은 아직 아는 사람이 몇 안 되었다.
그마저도 입막음한다는 명목으로 히르칸이 공작가에 오는 즉시 죽여버렸으니 알버트 또한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완벽하게 수세에 몰린 알버트가 발악처럼 화염의 마력을 쏟아냈다.
번번이 윈터의 마력에 막히고 말았지만.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윈터가 마치 동토의 지배자처럼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걸음을 따라 경기장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사람들은 두 가지 마력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합쳐 사용하는 윈터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오늘 조심해야 할 거야, 알버트.”
여전히 산뜻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윈터가 속삭였다.
“네가 마지막으로 보는 게 내 얼굴이면, 넌 별로 기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해 주는 말이야.”
“무, 무슨……!”
이내 씨익 웃은 윈터의 뒤로 수십 개의 얼음 창들이 떠올랐다.
“그 건방진 눈깔부터 파내 주겠다는 뜻이지.”
“……아아악!”
윈터의 의지에 따라 얼음으로 만든 창들이 일제히 알버트에게로 쇄도했다.
알버트가 다급히 화염의 마력을 일으켜 방어하려 했으나 윈터가 더 빨랐다.
막연히 날아오는 창을 녹이면 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윈터의 공격에는 사각지대가 없었다.
사방에서 쉼 없이 날아드는 창을 채 피하지도 못하고 알버트가 경기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제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제대로 된 대련은커녕 작은 고통에도 익숙하지 않은 알버트는 제 살갗을 베고 지나가는 얼음 창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심지가 굳지 못했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발작처럼 소리친 알버트가 제 머리를 감싸고 잔뜩 옹송그렸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었던 옷은 어느새 곳곳이 보기 흉하게 찢어지고 잔뜩 피로 물들어 있었다.
“윈터! 윈터! 윈터!”
“와아, 해치워버려!”
“이겨라, 윈터!”
관중들이 윈터를 연호했다.
그들은 그녀가 당장이라도 알버트의 숨통을 끊어 놓길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과연, 다들 이 경기가 끝나간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바닥에 꼴사납게 드러누워 벌벌 떠는 알버트조차도.
“리비우스 삼촌이 꽤 슬퍼하시겠어. 그렇지?”
윈터가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바닥에 누워 있는 알버트와 서 있는 자신을 보니 문득 어릴 적 향수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메이딜리언을 처음 만나고 자신의 전생을 깨달았던 바로 그 순간.
“이번에도 네가 졌어, 알버트.”
픽 웃은 윈터가 망설임 없이 얼음 창을 만들어 그대로 알버트의 어깨에 내리꽂았다.
“으, 으아아악!”
알버트의 비명이 콜로세움을 가득 울렸다.
그러나 이 상황이 되어서도 알버트는 결코 기권을 외치지 않았다.
사실 그냥 목을 베어버리면 간편하고 좋겠지만, 윈터는 여기서 알버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리비우스까지 엮어 제대로 공작가를 좀먹는 쥐새끼들을 솎아내기에는 아직 물증이 좀 부족했다.
공작가의 일원으로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아야지.
괜히 여기서 윈터의 손에 잔인하게 죽었다는 빌미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귀찮게 하네.”
작게 혀를 찬 윈터가 그대로 창을 비틀었다.
날카로운 얼음 날이 상처를 마구 헤집었다.
“그아아악! 윈터, 이 미친개가!”
극심한 고통에 알버트가 버둥거리며 게거품을 물었다.
오랜만에 듣는 별명에 코웃음을 친 윈터가 몸을 숙여 알버트에게 속삭였다.
“선택해. 여기서 팔을 잃을래, 아니면 기권할래?”
눈을 까뒤집고 윈터를 향한 저주를 쏟아 내던 알버트가 멈칫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알버트의 빠른 선택을 돕기 위해 윈터는 반대쪽 손에도 얼음 창을 만들어냈다.
“양쪽 팔이 다 없어지고 나면 기권하지 않아도 기권하는 게 될 거야. 그렇지?”
그걸 보자마자 허옇게 질린 알버트가 바락 외쳤다.
“기, 기권!”
고통이 동기화라도 된 건지 제 어깨를 부여잡고 경기를 관전하던 심판이 얼른 호루라기를 불었다.
“본선 2차전, 윈터 승!”
빠른 판정에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쏟아졌다.
그동안 윈터는 그저 제 자리에서 가볍게 바람의 마력으로 상대들을 날려 왔었다.
힘도 별로 들이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그녀에게 ‘행운의 윈터’라는 별명을 붙여줄 만큼 사람들은 윈터를 좋아했다.
어쩌다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가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윈터는 기존과는 상반된 마력을, 심지어 두 가지나 자유롭게 사용했다.
게다가 경기는 또 얼마나 긴박했는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 가득한 무대에 다들 열광했다.
“윈터! 윈터! 윈터!”
이제 윈터는 명실공히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제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윈터는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은 승리를 만끽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굳어 있었다.
“아가씨.”
빠르게 대기실로 향하던 윈터가 걸음을 멈춘 것은 문 앞에 서 있던 뜻밖의 손님 때문이었다.
얼마 전 그 앞에 서 있던 레이몬드는 차갑게 내쳤으나, 오늘 온 손님은 그때 그 지푸라기 같은 놈보다 한참이나 미남이었다.
“이긴 거 축하해요.”
어디서 가져온 건지 청보랏빛의 꽃다발을 메이딜리언이 수줍게 내밀었다.
그 꽃다발로 손을 뻗으며 윈터가 웃었다.
“고마, 워…….”
그러나 윈터는 그 꽃다발을 품에 안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이 허망하게 허공을 스치고, 그대로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윈터가 쓰러지는 모습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꽃다발은 그대로 내던진 채 메이딜리언이 얼른 쓰러지는 윈터를 받아 냈다.
“쿨럭.”
“아가씨!”
메이딜리언의 팔 안에서 윈터가 새빨간 피를 토해 냈다.
눈물 날 정도로 가벼운 무게에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