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50)

48화

“도련님……?”

살벌하던 분위기를 깬 것은 그레이 가문의 하인이었다.

버릇처럼 개수작을 부리러 떠나던 레이몬드는 하인에게 제가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었다.

그러나 레이몬드가 예상보다 많이 늦어지는 것에 걱정된 하인이 그를 찾아 나섰다가 이 상황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하얗게 질린 레이몬드를 발견한 하인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윈터는 잔뜩 김이 새고 말았다.

“쳇.”

작게 혀를 찬 윈터가 마력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섰다.

이때다 싶었던 레이몬드가 내심 안도하며 얼른 윈터와 멀찍이 거리를 뒀다.

얼마나 세게 멱살을 틀어쥐고 있었는지 레이몬드의 옷깃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 그럼 전 이만.”

그렇게 당해 놓고도 아직까지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건지.

제 하인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든 레이몬드가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만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다.

“후우…….”

그러나 윈터는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벌컥 문을 열고 대기실로 들어간 그녀는 방 안을 서성거리며 분노를 잠재우려 애썼다.

물론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았지만.

복잡한 머리는 끝내 자신을 저놈과 엮이게 한 알버트에게까지 불똥을 튀게 했다.

“그래.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지.”

애초에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알버트에게 기인한 것이었으니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저를 암살하려는 것도, 등 떠밀려 무투 대회까지 나오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도 전부 알버트였으니까.

낮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은 윈터가 살기 어린 경고를 내뱉었다.

“넌 죽었어.”

* * *

알버트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 가문의 일원인 그는 겉으로만 보면 집안도 외모도 능력도 그럭저럭 괜찮은 축에 속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겉과 달리 잔뜩 곪아 있었다.

사사건건 윈터와 비교당하며 자라온 탓에 항상 열등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윈터가 마력을 개화했다고 하는구나. 너보다도 훨씬, 대단한 마력을 말이야.’

그 말을 전한 리비우스가 분을 참지 못하고 까드득 이를 갈았다.

윈터가 마력을 각성하기도 전에 알버트는 진작에 마력의 개화를 시작했었다.

게다가 그 마력이 꽤나 강력했던 덕분에 벌써 여러 군데서 미리 인재를 포섭하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윈터가 마력을 개화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이전까지 촉망받는 인재였던 알버트는 어느새 윈터의 생명을 위협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작 그 비실비실한 여자애가 한 번 쓰러진 걸 가지고, 끝내 알버트는 추운 북부로 내쫓기지 않았던가.

다행히 홀대받는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강대한 마력이 윈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축하한다, 알버트.’

알버트가 북부 블라디미르 영지로 가 있는 사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리비우스는 그 즉시 제 아들을 불러들여 축배를 들었다.

끝내 윈터가 마력 폭주를 가라앉히기 위해 어느 촌구석으로 떠나고 나자, 다시 알버트의 시대가 왔다.

그를 차기 공작으로 추대하는 자들도 있었고, 어디서든 주목받지 않는 곳이 없었다.

‘드디어 네가 내 숙원을 풀어 주는구나.’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는 알버트를 보며 때때로 리비우스의 눈은 낮게 잠기곤 했다.

‘이 공작가는 네 것이다, 알버트.’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목소리는 쉼 없이 알버트에게 속삭였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윈터가 황도로 돌아온다는 소식과 함께 리비우스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젠장, 젠장!’

암살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리비우스의 방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을 구르는 화병을 보며 리비우스는 발작처럼 괴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알버트는 제 아버지가 그럴 때마다 종종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깟 약골, 제가 멋지게 이겨 주면 그만 아닌가.

알버트는 안하무인 유아독존인 블라디미르 공작도 제 유능함만 알게 된다면 자신을 다시 볼 거라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지난번에는 음침한 비밀호위대가 끼어들어서 결판을 내지 못했지만, 아직 무투 대회라는 절호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대륙에서 몰려든 관중들이 그를 보며 감탄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야말로 윈터를 아예 끝장을 내주겠다 결심했다.

“그나저나 요즘 레이몬드가 잘 안 보이지 않아?”

깊은 상념을 깨고 해리슨이 중얼거렸다.

곁에서 술을 벌컥벌컥 마시던 아심이 그 말을 받았다.

“그러게. 지난 본선 1차에서 기권하고 나서 저택 밖으로 안 나온다는데?”

“희한하네. 그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제가 바라던 대로 다 이뤘는데 그럴 리가 있어?”

카이라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윈터야 상대가 누구든 상관이 없으니 잘 몰랐지만, 레이몬드는 진작에 대전표를 보고 자신의 본선 1차전이 그녀와의 대결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행운의 윈터라고 불리는 상대를 과연 레이몬드가 이길 수 있을까 다들 반신반의했고 급기야 내기 도박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레이몬드가 선언했다.

‘난 이번에 그냥 기권할 거야.’

‘뭐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출전 전부터 거들먹거리며 기권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던 레이몬드였다.

그렇게 떠벌리고 다니던 인간이 그 뒤로 두문불출하는 게 맘에 좀 걸리긴 했으나 알버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실력으로도 충분히 윈터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른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아버지?”

본선 2차전을 치르기 하루 전이었다.

내일이면 마침내 윈터와 결판을 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알버트에게 리비우스가 찾아왔다.

반사적으로 작은 상자를 받아 든 알버트가 제 아버지가 내민 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내일 시합 시작하기 직전에 몰래 삼켜라.”

“하, 하지만 아버지……!”

리비우스가 내민 것은 불길한 남보라색으로 빛나는 작은 구슬이었다.

알버트는 받자마자 이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시합 전에 제 아버지가 줄 만한 것이라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걸 보자마자 이상하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속에 어딘가 더 멍들 곳이 남아 있기라도 했던 듯, 미약한 실망감이 갉작갉작 그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함부로 증폭 주술을 새겼다가 걸리면…….”

“쉬잇.”

누가 듣기라도 할까 싶어 리비우스가 황급히 알버트의 입을 막았다.

그랬다. 그의 손에 들린 구슬에는 증폭 주술이 담겨 있었다.

매해 무투 대회에서는 영예를 얻기 위해 암암리에 부정행위를 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알버트는 나름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굳이 이런 마력환을 복용하지 않더라도 윈터 정도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게다가 과거 선황이 개최했던 무투 대회에서 꽤 오래 회자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알버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리비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전부 다 헛소문이다.”

두 부자의 머릿속에는 동시에 끔찍했던 당시의 소문이 떠올랐다.

부정행위를 저지른 누군가가 계속 제 범행을 발뺌하다가 끝내 그 배를 갈라 구슬을 꺼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금지한다고 해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비겁한 꼼수들이 판을 쳤으니까.

그렇기에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윈터가 더욱 놀랍고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이었다.

“널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것이다. 잘 숨겨서 들어가라.”

리비우스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그런 제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알버트가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아버지.”

* * *

무투 대회가 시작되고 나서 리어트는 아주 신이 났다.

아이셀이 만든 특제 증폭 마력환이 불티나게 팔린 덕분이었다.

어떤 우수 고객님은 부작용도 상관없으니 원래 효과의 두 배는 더 강한 것으로 만들어 달라는 특별 주문까지 넣었다고 하니 말 다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 호황에 윈터도 당연히 신이 났다.

칼리스타가 바쁘면 그녀의 주머니도 두둑해지니까.

다들 마력환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홍보나 많이들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한테 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올해 열린 무투 대회에서 처음으로 윈터가 바닥을 굴렀다.

지금까지와 달리 수세에 몰린 듯한 윈터의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응원하는 목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울려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젠장.”

바닥을 구르며 긁힌 손을 가볍게 털어 낸 윈터가 앞을 쏘아보았다.

시합을 시작하기 무섭게 알버트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마구 마력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이미 사전 조사를 통해서 알버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던 윈터는 저것이 절대 평소 그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마 칼리스타에 특별한 주문을 넣었다는 우수 고객님이 리비우스는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비죽 고개를 들었다.

“크하하하!”

시합이 제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알버트가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

실제로 윈터의 바람은 알버트의 화염과 상성이 맞지 않았다.

오히려 화염을 더 키우면 모를까.

“……이런 걸 불난 데 부채질한다고 하던가?”

전생의 속담을 떠올리며 윈터가 쓰게 웃었다.

그사이 알버트가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윈터 블라디미르, 오늘에야말로 네 숨통을 끊어 주마!”

증폭 마력환의 도움으로 알버트는 약간의 각성과 흥분 상태에 돌입했다.

평소와 달리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윈터는 작게 혀를 찼다.

“같은 집안에서 아주 잘하는 짓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윈터가 가볍게 응수했다.

“게다가 그건 내가 할 말이라고!”

그러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알버트가 그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마도구도 없는 네가 여기까지 온 건 다 운이 좋아서잖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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