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들도 예선이 거듭될수록 윈터의 실력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글쎄. 난 아주 요행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하긴. 웨르딘의 야경꾼을 채 1분이 안 돼서 이긴 건 좀 놀랍긴 했네.”
“뭐? 맙소사. 그 유명한 웨르딘의 야경꾼을 이겼다고?”
엄청난 보상이 걸린 만큼 유흥으로 무투 대회에 참가하는 자는 없었기에, 참가자들은 필사적이었다.
경기마다 피투성이가 되거나, 못해도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사람이 나오는 마당에, 윈터의 경기만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어디 마실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생채기 하나 없이 산뜻하기만 한 윈터는 이 살벌한 무투 대회에서 매우 이질적이었다.
덕분에 행운의 윈터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물론 윈터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안정한 마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매 경기를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저 쟁쟁한 인간들을 다 넘어서 과연 행운의 윈터가 우승할 수 있을까?”
줄곧 여자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미심쩍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난 왠지 걸어 보고 싶은데.”
“아니, 왜?”
“행운이라잖아.”
키득키득 웃은 여자가 윈터에게 판돈을 걸었다.
벽면의 초상화를 보는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때 와다다 뛰어온 어린 남자애가 와락 외쳤다.
“행운의 윈터, 본선 1차선 시작한답니다!”
* * *
본선 1차전에 앞서서 윈터는 선수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몸을 푼다거나 잠을 잔다거나 과하게 먹기도 한다는데,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흐음, 보자. 이번 상대가…….”
무료한 듯 대진표를 보던 윈터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녀의 본선 1차전 상대가 다름 아닌 레이몬드 그레이였기 때문이다.
‘알버트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하.”
익숙한 이름에 비죽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레이몬드 그레이는 얼마 전 연회에서 달갑지 않은 인사를 나눴던 알버트의 친우 중의 하나였다.
아니, 솔직히 그걸 친우라고 할 수나 있을까.
‘영애와 무척 친하다고 하더군요. 평소에도 블라디미르 공작 각하께서 알버트를 믿고 중요한 일을 많이 맡기신다죠?’
시종일관 알버트를 깔보던 그 금발 머리의 얼굴이 꽤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본인은 아닌 척하고 있지만, 은연중에 알버트를 질투하고 있는 속내가 그대로 내비쳤다.
‘어릴 적부터 서로 누나 동생으로 칭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죽고 못 사는 친우인 양 붙어 다니는 알버트의 치부를 윈터에게 드러낼 리가 없었으니까.
그때도 그는 어떻게든 알버트에게 흠집을 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참가자 윈터 블라디미르! 앞으로 나오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윈터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가볍게 몸을 일으킨 그녀가 콜로세움으로 들어서자 와아, 하고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윈터! 윈터다!”
“꺄아악! 사랑해요, 윈터 님!”
“행운의! 윈터! 이겨라! 너한테 내 전 재산을 걸었어!”
쏟아지는 관중들의 열기에 윈터의 얼굴이 약간 질렸다.
대체 뭘 보고 저렇게 열광하는 건지.
“전 재산을 거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언뜻 들리는 환호성에 픽 웃으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솔직히 그녀는 특히 요즘 자신을 부르는 저 ‘행운의 윈터’라는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노력 하나 없이 요행으로 이긴 것 같은 느낌이잖아.
“참가자 레이몬드 그레이! 앞으로 나오십시오.”
반대편에서 레이몬드가 계단을 올라왔다.
빙글빙글 웃는 얄미운 얼굴은 윈터와 시선을 마주하자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으으.”
그 느끼한 미소에 윈터는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뵙는군요, 영애.”
레이몬드는 윈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알량한 잘생김에 취해 잔뜩 상대를 신경 쓰는 듯한 저런 오그라드는 눈빛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이미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졌다는 메이딜리언과 인생의 대부분을 같이 보낸 윈터였다.
고작 저 정도를 가지고 자신만만한 레이몬드를 보니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아, 네에.”
떨떠름한 대답에 그는 후후, 웃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십시오. 시합은 매우 빨리 끝날 거니까요.”
“예? 지금 그게 무슨 말…….”
“선수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
의미심장한 레이몬드의 말에 윈터는 귀를 의심했다.
뭔가 더 캐내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심판의 말이 떨어진 뒤였다.
두 사람은 익숙한 걸음으로 경기장 끝 쪽에 섰다.
그러자 환호성과 박수가 가득하던 경기장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번쩍 한쪽 팔을 들어 올린 심판의 손에서 탕, 신호탄이 터졌다.
상대를 노려보던 윈터가 기다렸다는 듯 바람의 마력을 준비하던 바로 그때였다.
“저, 기권하겠습니다.”
“……엥?”
전혀 뜻밖의 말에 윈터의 손이 삐끗했다.
막 뭉치고 있던 바람의 마력은 허망하게 흩어졌다.
심판 또한 갑작스러운 레이몬드의 말에 당황스러운 듯 되물었다.
“레, 레이몬드 선수. 정말 기권한단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레이몬드는 제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전 아름다운 여성을 공격하는 취미는 없어서요.”
그리고 그 말이 윈터의 심기를 매우 거슬리게 했다.
“하, 뭐라고?”
참가자의 말은 마법 확성기를 타고 콜로세움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경기를 기대하던 관중들도 우우, 야유했다.
“혹시 저 자식, 본인이 질 것 같아서 내빼는 거 아니야?”
“푸하하, 한심하긴.”
“우우, 비겁하다! 가문의 수치!”
“역시! 행운의 윈터! 너한테 내 전 재산을 걸었어!”
관중들의 말에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건지 레이몬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윈터는 그사이에 자꾸 전 재산을 걸었다고 하는 인간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아이셀 언니, 진짜…….”
대체 연락도 없이 황도엔 언제 온 건지.
대현자의 제자라는 인간이 저러고 다닌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꿈에도 모르는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선 1차전, 윈터 승!”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윈터는 승자 판정을 받고 빠르게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대기실 앞에서 전혀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바로 좀 전에 제게 기권을 선언했던 레이몬드였다.
“여긴 무슨 일이시죠?”
제가 들어가야 할 대기실 문에 기대어 느끼한 눈빛을 뽐내는 레이몬드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원래 성격 같아선 진작에 멱살을 잡아서 내던지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꽤 많았다.
주위 시선을 생각해 한 번 정도는 참아 주자 싶어 윈터가 묻자 레이몬드가 빙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하, 나름 좋은 경기였으니까요. 이번 기회로 인연을 더 이어갔으면 합니다.”
“무슨 인연이요?”
“그건 영애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글쎄요. 전 전혀 모르겠는데요.”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을 본체만체하며 영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윈터의 모습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미약하게 굳었다.
불쑥 허리를 숙인 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에이, 왜 그래.”
“……하?”
난데없는 하대에 끝내 윈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이미 레이몬드는 상대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알버트한테 이기고 싶은 거 아니었어?”
제 아둔한 판단력을 마음껏 뽐내기로 작정이라도 한 건지, 그는 줄줄 개소리를 내뱉었다.
“본선 통과한 것도 다 내 덕분이잖아.”
윈터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입술이 저절로 뒤틀리는 걸 보니 오랜만에 꽤 열받는 모양이었다.
아까 기권은 그냥 자신 없는 멍청이의 헛짓거리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예상을 한참 더 뛰어넘은 한심한 종자였다.
“본인 덕분에 내가 본선을 통과했다, 라.”
레이몬드의 말을 곱씹던 윈터가 한 걸음 더 바짝 레이몬드에게 다가섰다.
급격하게 가까워진 거리에 대체 뭘 기대한 것인지는 모르나 레이몬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살기로 이글거리는 윈터의 눈빛이었다.
“이봐, 멍청이.”
“무, 뭐?”
단숨에 멱살이 잡힌 레이몬드가 그대로 몸을 굳혔다.
어느새 바람의 마력이 제 턱 밑에 바로 닿아 일렁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머리가 날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이거 놔. 경기장 밖에서는 선수끼리 공격하면 안 된다는 규칙 몰라?”
혹시라도 본인이 그렇게나 사랑하는 얼굴이 날아갈까 봐 레이몬드는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술만 움직였다.
퍽 우스운 꼴을 감상하며 윈터가 이죽거렸다.
“선수끼리라니? 방금 기권한 게 어디의 누구시더라?”
윈터의 말에 아차 싶었는지 레이몬드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를 매섭게 쏘아보며 윈터가 말했다.
“귓구멍 파고 똑똑히 들어. 네 기권이 없어도 난 아주 여유롭게 이겼을 거야. 지금과 큰 차이 없이 말이야.”
금빛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냉랭했다.
뒤늦게 윈터 블라디미르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들이 레이몬드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천사 같은 외모 말고도, 어린 시절 공작가의 미친개라는 둥 손목 수집가라는 둥 별 희한한 별칭이 따라다녔다고 하던가.
역대 공작들의 무자비한 성격 때문에 생긴 편견이자 악의적인 소문이라고 가볍게 치부했던 레이몬드는 과거의 자신을 매우 세게 쳐 주고 싶었다.
“궁금하면 언제든 찾아와. 직접 보여 줄 테니까.”
지금 그 소문의 실체를 바로 제 눈앞에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물론 손목 하나 정도는 잃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알겠지?”
파티장에서 보던 화사하고 아리따운 여인은 어디 가고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모습에 레이몬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