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바깥을 보던 윈터가 잠시 마차를 세웠다.
“잠시만. 여기 들렀다 가자.”
“예, 아가씨.”
제니마 상회 앞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윈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곧 숨죽여 살금살금 걸어간 그녀가 거구의 남자의 등을 쿡 찔렀다.
“오랜만, 아저씨.”
“누구……!”
뭔가를 심각하게 보고 있던 한타가 흠칫 놀라 몸을 돌렸다.
“뭐야. 이게 누구야.”
이내 한타의 얼굴에 반가움이 어렸다.
그동안 사막 행상에 호위로 따라갔던 터라, 그는 윈터가 황도에 오고 나서도 좀처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반가움에 히죽 웃은 한타가 윈터의 머리 위로 키를 가늠했다.
“꼬맹아, 넌 어떻게 키는 그대로인 것 같냐.”
만나자마자 놀리기부터 하는 한타를 보며 윈터가 샐쭉 눈을 흘겼다.
“뭐래. 아저씨가 큰 거거든?”
“에이, 팔도 비리비리한 걸 보니 역시 아픈 게 다 낫지 않은 거 아냐?”
제 팔뚝에 반도 안 되는 윈터를 보며 한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래도 제 팔이 보통 사람과 비교해 배는 두껍다는 걸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윈터는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궁금하면 실력 행사 좀 해 줄까?”
큭큭 목으로 웃은 한타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딜런 님이 아시면 큰일 나니까.”
“손에 그건 뭐야?”
그가 내젓는 손에 쥐어진 작은 종이가 보였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뭘 엄청나게 열중해서 보고 있더니.
기감이 뛰어난 한타가 뒤에서 윈터가 접근하는 것도 모를 정도였으니 꽤 중요한 내용이 적힌 것 같았다.
그러나 한타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얼른 뒤로 숨기더니 시치미를 뗐다.
“아, 알 거 없어.”
딱히 내용이 궁금하지는 않았던 윈터지만, 한타를 놀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뭐야. 연애편지야?”
한타가 숨긴 종이를 뺏어 보려고 윈터가 훌쩍 거리를 좁혔다.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란 한타가 펄쩍 뛰더니 꿀을 숨기는 곰처럼 열심히 몸을 옹송그렸다.
“여, 연애편지는 무슨! 저리 가!”
“흐음, 이건 딱 봐도 연애편지인데?”
“아니라니까.”
“아, 하긴. 아저씨는 이미 결혼 안 하고도 애가 있었지.”
데보라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고아였던 데보라를 도맡아 키운 것이 바로 한타였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윈터의 말에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한 듯 한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우리 애가 너한테 실수한 게 있다던데.”
“응? 아아. 뭐, 그런 걸 가지고.”
메이딜리언에게 윈터의 편지와 선물 빼돌린 걸 걸린 데보라는 도망갈 생각조차 못 하고 그대로 제 잘못을 전부 고백했다고 한다.
물론 메이딜리언은 정상 참작 같은 건 모르는 남자였다.
언뜻 듣기로 벌칙으로 꽤 처리하기 까다로운 임무를 맡았다고 하는데.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라 윈터도 자세히는 몰랐다.
다만 며칠 전 마주친 데보라의 얼굴이 핼쑥했던 걸 보고 그동안 그녀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도 미안하게 됐다.”
“됐어. 사과하지 마.”
“하지만 나는 데보라의 생각도 크게 틀린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타의 표정이 전에 없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제 계획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엘리슨이 아니면 아르카의 단원들 대부분이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윈터는 그들에게 어디까지나 철저한 외부인과 다름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어릴 적부터 황자를 아꼈다는 것 외에 뭔가를 실질적으로 보여 준 게 없을 테니까.
다만 앞으로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그런 속내를 최소한 겉으로는 티 내지 말아야 하는데.
다른 단원들과 달리 정치라고는 전혀 모르는 한타는 그대로 제 속을 까뒤집어 표현했다.
“네가 만약 딜런 님의 발목을 잡는다면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그저 가소롭기만 한 견제에 윈터는 픽 웃었다.
“내 덕분에 삼촌 노릇도 했으면서 감사하다고는 못할망정.”
한타가 메이딜리언의 삼촌이라는 변명이 블라디미르 공작에게까지 먹힌 것은 아니었다.
공작은 이미 메이딜리언이 황자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블라디미르 공작은 새로운 보호자를 자처하는 한타를 눈감아주었다.
덕분에 그는 성장기의 메이딜리언의 보호자 노릇으로 종종 공작가를 오갔었다.
“크, 크흠! 뭐, 그, 그건, 고맙지.”
뒤늦게 귀까지 벌게진 한타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그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손에 들고 있던 종이 중 하나를 윈터에게 내밀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내가 너 오면 주려고 가지고 있던 게 있었다.”
“뭔데?”
작은 편지지를 받아든 윈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나한테 온 연애편지인가?”
“그럴 수도 있지.”
원래 알던 것보다 훨씬 불퉁한 말투에 윈터가 편지지 겉에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아하. 아스터한테서 온 거구나?”
어쩐지. 오늘따라 견제가 심하다 싶더라니.
윈터가 아스터와 편지를 주고받는 게 한타로서는 꽤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그런 그의 반응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러라고 일부러 제니마 상회를 통해서 연락하는 것이니까.
[지난번엔 감사했습니다. 다만 사정이 생겨 당분간은 상회를 방문하기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정하게 적힌 글씨를 보며 윈터가 작게 키득거렸다.
시무룩한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편지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꾹꾹 눌러쓴 글자들에서 어쩐지 꼬리를 축 늘어뜨린 어린 강아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우리 딜런 님과 그 비실비실한 1황자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려는 거라면 시도조차 하지 말아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타가 눈을 번뜩였다.
이럴 때 보면 데보라랑 참 닮아 있었다.
앞뒤 잴 것 없이 메이에게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것 말이다.
황제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한타는 메이의 친부에게 진 빚 때문에라도 메이에게 헌신하고 있었다.
그 내막을 전부 아는 윈터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아르카 내부나 잘 감시하셔.”
“무, 뭐라고? 아르카는……!”
찔리기라도 한 듯 한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렇게 훤히 들여다보이다니.
“데보라를 어릴 때부터 세뇌시킨 게 대체 누군가 했더니. 하는 짓이 똑같아서 누가 키웠는지 딱 알겠네, 으휴.”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쉰 윈터가 제 심장 쪽을 톡톡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어쨌든 난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야. 이미 잘 알잖아?”
혹자는 애절한 사랑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윈터가 어릴 적부터 죽음을 불사하고 메이딜리언에게 애정을 쏟았다는 것을 모르는 아르카는 없었다.
제가 괜한 견제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한타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나저나 무투 대회 나간다며?”
“아아. 요즘 그게 거의 안부 인사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하도 그 얘기를 하는 덕분에 윈터는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긍정하는 그녀를 보던 한타가 물었다.
“할 수 있겠냐?”
“당연하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타는 여전히 윈터의 작고 비리비리한 팔뚝이 영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보여 주는 게 훨씬 낫다는 걸 아는 윈터는 짧게 한 마디만 남겼다.
“지켜봐. 아저씨네 주인님한테 꽤 좋은 선물이 될 테니까.”
* * *
무투 대회가 시작된 황도는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매해 우승자를 점치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이번에는 독특한 참가자가 많아 한층 더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아, 다들 투표하시죠! 이번 우승자는 누가 될 것 같으십니까!”
대낮부터 주점은 사람들로 붐볐다.
우승자를 점칠 때 막연히 예상만 하는 게 아니었다.
건국제 기간 동안 황제의 암묵적인 묵인 아래에 슬쩍 돈이 오가곤 했다.
“역시 파수꾼 제라드가 우승하겠지!”
“어허, 무슨 소리! 괴력의 칸나도 있다고!”
주점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종이에는 본선에 진출한 참가자들의 이름과 이력, 간단한 용모파기가 그려져 있었다.
주점을 찾은 손님들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씹으며 이번 무투 대회 참가자들에 대해 한 마디씩 던지곤 했다.
“자네 그 경기를 봤나?”
“당연하지. 이번엔 예선부터 아주 치열하더라고.”
“무슨 경기를 말하는 건가?”
“그, 왜, 있잖나…….”
각자 자신이 예상하는 우승 후보에게 돈을 걸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치열한 양상에 투표를 받던 주점 주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그때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여자 하나가 쾅, 테이블을 치며 외쳤다.
“이봐, 다들 행운의 윈터를 잊은 건 아니겠지?”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휙,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곧 장내는 한층 더 시끌벅적해졌다.
“아아, 당연하지!”
“이번 3차 예선에서도 아주 깔끔하더군.”
“대체 어떻게 그러는지 모르겠어.”
무투 대회의 규칙은 아주 간단했다.
참가자들은 말 그대로 순수하게 마력만 가지고 겨루게 된다.
여기서 행동 불능이 되거나, 참가자의 기권을 받아 내거나, 장외로 가면 경기에서 지게 된다.
이 규칙을 참가자 중 가장 훌륭하게 활용하는 것은 바로 윈터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즉시 강력한 바람의 마력으로 전부 날려버리거나, 교묘하게 바람으로 발을 걸어 도전자를 장외로 탈락시켰다.
“바람으로 날리는 것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누군가 심드렁한 말투로 투덜거렸다.
아까 파수꾼 제라드를 소리 높여 응원하던 남자였다.
물론 그의 말대로 누구나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력을 겨루는 시합이니만큼, 상대가 윈터의 마력에 반항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다만 윈터가 너무 강하고 빨랐기 때문에 반격할 틈조차 없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