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 *
무투 대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이번 우승자는 누구일까 점치느라 황도는 떠들썩했다.
보통의 참가자들이라면 몸을 정양하거나 특훈이라도 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윈터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황도에 오면 해야 할 일들을 본격적으로 처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조금 여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예상 밖으로 아스터를 너무 일찍 마주쳐버린 바람에 일정이 촉박해졌다.
“흐음, 보고서는 이게 끝이야?”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황도에 있는 칼리스타 본부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말로만 전해 듣던 단주의 등장에 칼리스타의 단원들은 잔뜩 긴장해서는 복도에 일렬로 서 있었다.
“그, 그렇습니다!”
빠른 속도로 서류를 검토한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도 본부를 담당하는 잔느의 얼굴에 안도감이 어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칼리스타의 단주에 대해 들어온 소문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빠르게 길드를 성장시킨 사람은 이제껏 윈터가 처음이었다.
덕분에 대체 칼리스타의 단주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았다.
혹자는 한때 뒷 세계를 제패했던 자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다른 길드에서 도망쳐 온 배신자일 거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지만, 칼리스타의 단주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 무자비한 존재였다.
그런 단주를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괜스레 잔느의 심장이 술렁거렸다.
“흐음, 꼼꼼하게 잘했네.”
새카만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고, 이지적인 금빛 눈동자는 상대를 모조리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롭게 반짝인다.
천사 같은 외양을 지녔다는 블라디미르 가문의 후계자에 대해 잔느도 들어본 적 있었다.
막연히 산뜻하고 몽글몽글한 천사를 상상했던 잔느는 정작 마주하게 된 눈빛에서 심판관과 같은 엄정함을 느꼈다.
“가, 감사합니다!”
우선 고비 하나는 넘겼다는 생각에 잔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바짝 군기가 든 모습이 낯설기만 한 윈터가 턱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타이그는 요새 어떻지?”
“아, 그자요?”
기다렸다는 듯 잔느가 두 번째 서류를 내밀었다.
“그간의 동태를 정리해둔 보고서입니다. 특별히 접촉하는 자는 없는 것 같고, 구걸해서 번 돈으로 술 사 마시는 게 일입니다.”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예. 어차피 몸도 성치 않은 인간인 데다 원래도 평판이 안 좋았던 터라 어디서든 크게 환대받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황도를 떠나기 전, 그러니까 8년 전에 윈터는 엘리슨에게 몇 가지 당부를 했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타이그, 즉 공작가에서 불구가 되어 쫓겨난 메이딜리언의 양부를 감시하는 일이었다.
나중에 칼리스타를 창단하고 나서 윈터 또한 별도로 사람을 붙여 줄곧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지난달에 죽을 뻔했다는 건 뭐야?”
“아, 그건 밤늦게 술 먹고 가다가 마차에 치일 뻔한 적이 있어서요. 감시하고 있던 단원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남은 다리 하나마저 잃을 뻔했습니다.”
“하여간 멍청하기는.”
윈터가 하나도 나아진 것 없는 타이그의 행태에 혀를 쯧쯧 찼다.
이내 두 번째 보고서도 속독을 마친 그녀가 잔느에게 지시했다.
“감시 인원을 두 배로 늘려.”
안 그래도 타이그 하나를 감시하는 데 붙은 단원들이 일곱이었다.
그런데 그 두 배라니.
잔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지금의 두 배로요?”
“그래. 조만간 크게 쓰일 일이 있으니까 목숨 간수 잘하고.”
타이그는 나중에 메이딜리언이 황궁에 입성하게 될 때 아주 중요한 증언을 해 줄 자였다.
그것 때문에 어릴 때 메이딜리언을 그렇게 학대했어도 여태 살려 놓고 있는데, 고작 술주정이나 지병으로 죽어버리는 것을 윈터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치 앞날을 훤히 내다보는 듯한 윈터를 보며 남몰래 감탄하던 잔느가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15년 전, 제국의 황제는 병들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린 아스터에게는 지지 기반이랄 것이 없었다.
아비인 아르만 백작은 간이 작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종자였으니, 아스터에게 안 좋은 영향만 끼칠 것이 자명했다.
선황은 섭정 황제가 될 동생의 마수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심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녀는 당시 임신 중이던 메이딜리언이 사산되었다고 거짓말하고 당시 막내 시녀였던 코제트에게 시켜 그를 황궁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코제트는 안타깝게도 병으로 일찍 죽고, 그녀의 오빠인 타이그가 엉겁결에 메이딜리언을 맡게 되었다.
원래라면 진작에 버렸을 메이딜리언을 타이그가 키운 이유는 하나였다.
매달 메이딜리언 앞으로 돈을 보내는 익명의 후원자가 있었으니까.
“슬슬 그쪽이랑도 접촉을 해 봐야 할 텐데.”
원작의 흐름을 떠올리며 시기를 가늠하는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바깥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밖으로 나갔던 잔느가 곧 붉게 반짝이는 통신석을 가지고 돌아왔다.
“저, 단주님.”
“응?”
“부단주의 연락입니다.”
“아아, 그래. 알겠어. 다들 나가 봐.”
통신석을 건네받은 윈터가 손짓하자 잔느를 포함한 단원들이 방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 리어트.”
반짝이는 통신석에 마력을 부여하자 반대편에서 낮게 웃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황도 본부는 어때?]”
“괜찮아. 일 처리도 깔끔하고.”
“[잘됐네.]”
리어트의 목소리는 늘 잔잔한 파도처럼 고요하고 나른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인지, 윈터는 줄곧 힘이 들어가던 어깨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생했다.”
“[뭘 이런 걸로. 단주님이 원하시는데 당연히 해야죠.]”
갑작스럽게 황도로 투입되는 인원을 늘리라는 말에 리어트도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게다가 윈터 자신이 없는 동안 칼리스타의 전반적인 업무는 리어트가 전담하고 있었으니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든 윈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오랜만에 편지가 아닌 목소리를 듣게 된 두 사람은 일은 잠시 미뤄 두고 가볍게 근황을 나누었다.
그런데 리어트가 전혀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이제 날 부를 때가 되지 않았어?]”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면서 키득대던 윈터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섬에 처박아두기엔 내 도움이 꽤 필요할 텐데. 안 그래?]”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도의 인원들은 이미 훌륭했으나 오랜 시간 마음 맞춰 일하던 리어트와 비교할 수는 없었으니까.
“흐음.”
윈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통신석 건너편에서 고민하는 기색을 눈치챈 리어트가 말을 더 얹었다.
“[게다가 황도는 너무 위험해.]”
“에이, 위험은 개뿔.”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별일 아니라는 듯 윈터는 픽 웃었다.
그러나 리어트는 그동안 쌓아 둔 말이 아주 많았다.
“[가는 길에 암살도 당할 뻔하고, 이번엔 무투 대회까지 나간다며. 원래 거기 나가려던 건 너도 아니었잖아.]”
윈터가 칼리스타를 만들 때 수인족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녀와 수인족들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 준 것이 바로 리어트였다.
처음엔 그저 친한 친구로만 지내던 그를 이 일에 끼워넣기 위해 윈터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상당 부분을 털어놓게 되었다.
덕분에 리어트는 윈터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
그러나 윈터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웃어넘겼다.
그녀에게는 미래를 안다는 이점이 있었고, 타고나길 강대한 마력도 있었다.
“[대수지. 넌 아직 몸도 제대로…….]”
“리어트.”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윈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 몸이 그저 깨지기 직전의 유리잔처럼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는 걸 윈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그건 어차피 8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윈터는 고작 제 목숨이 걱정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목표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도 전부 입단속을 시켰다.
“[젠장, 실언했어.]”
윈터가 누구보다 이 주제에 민감하다는 걸 아는 리어트가 빠르게 사과했다.
비록 윈터는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멋대로 말이 튀어 나간 제 입술을 마구 못살게 굴며 책상에 이마를 쿵쿵 찧고 있었다.
그는 윈터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메이딜리언에게 헌신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게 버릴 인간이라는 것도.
그렇기에 불나방처럼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윈터가 불안했다.
메이딜리언을 위해서라면 윈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질 테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선택에 있어서 자신은 조금의 고려 대상도 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발 옆에 있게만 해 줘. 나 이러다 진짜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리어트가 말했다.
통신석 너머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리어트의 말과 행동이 전부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는 걸 윈터 또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속절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겠지.
앞으로 진행할 일과 계획들을 점검하던 윈터가 짧은 침묵 끝에 물었다.
“마누트라 본부는 그대로 둬도 되겠어?”
그 말의 의미가 반쯤 승낙에 가깝다는 건 누구보다 리어트가 잘 알았다.
번쩍 눈을 뜬 그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얼른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이미 꽉 잡고 있잖아.]”
“흠…….”
리어트가 긴장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다행히도 윈터의 고민은 짧았다.
“좋아, 알겠어.”
“[진짜지? 정말이지?]”
평소의 리어트답지 않게 무척이나 들뜬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최대한 빨리 갈게!]”
“그래. 기다릴게.”
결국 웃음을 터뜨린 윈터가 대답했다.
그가 황도에 오면 예정보다 조금 빨리 메이딜리언을 소개해 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