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그 순간,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강렬한 빛이 골목 안을 환하게 채웠다.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아스터와,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예상하고 있던 윈터만이 멀쩡히 앞을 볼 수 있었다.
“뭐, 뭐야!”
조명탄을 직격으로 맞은 것처럼 얼얼한 시야에 괴한들이 휘청거렸다.
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던 아스터는 그사이에 얼른 빠져나왔다.
윈터는 괴한들의 한심한 꼴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길래 하지 말라니까.”
황족들에게는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마법이 걸려 있다.
아스터는 살의에 반응하는 이 마법 덕분에 여태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효율을 가장 중시하는 섭정 황제가 여태 아스터를 두고 보며 자잘한 독살이나 계획하는 게 다 저 마법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섭정 황제가 그를 암살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처음 만난 날 메이딜리언과 칸나의 싸움에서도 저 허약한 몸뚱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보호 마법 덕분이었다.
“윈터 님!”
방금의 소란 때문인지 저 멀리서 칸나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금세 윈터의 곁으로 다가온 칸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아스터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그게 뭐예요?”
칸나가 보는 것은 당연히 황금빛 보호막에 감싸인 아스터였다.
그의 이마에는 선명한 황실의 문장이 찍혀 있었으나 칸나는 미처 그것까지는 살피지 못한 것 같았다.
“이건 어떻게 만든 거지? 어? 손가락이 들어가네? 이거 보호막 아니에요? 어떤 원리로 만든 거예요?”
마력 활용에 관해서라면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는 그녀였기에,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시선을 돌려 일부러 칸나와 마주 보지 않은 아스터가 얕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순순히 칸나의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고 있었다.
“사, 살의에 반응하는 보호 마법이에요.”
“그런 조건을 설정할 수 있다고요? 대단한데요?”
“제가 만든 건 아니고, 으음,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한 아스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 이마를 황급히 가린 그가 뒤늦게나마 윈터 또한 이 상황을 모두 봤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 그러니까, 이건…….”
벚꽃을 닮은 분홍빛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렸다.
저 작은 머리통에서 대체 무슨 생각들이 오고 가고 있는 건지.
윈터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아스터는 그새 얼굴이 해쓱해진 상태였다.
물론 윈터는 아스터를 다그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오늘 이런 일만 없었다면 그가 스스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황자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척해줄 생각이었으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싱긋 웃은 윈터가 짐짓 모른 척 물었다.
“네. 괘, 괜찮아요……!”
내밀어진 윈터의 손을 잡고 일어나며 아스터가 눈을 굴렸다.
“저, 영애, 이건 그러니까…….”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러나 이번에도 윈터가 먼저 선수 쳤다.
눈을 찡긋하며 건네는 존대에 아스터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문제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리 없이 그들 뒤로 다가와 있던 메이딜리언은 아스터를 보며 시선을 번뜩였다.
칸나와 자신을 자꾸 붙여 두려는 아가씨도 야속하기만 하고.
어디서 굴러온 건지 모를 아스터가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알아서 떨어져 나가라고 약간의 심술을 부렸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저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영애?”
“고민할 게 뭐 있어. 수도 경비대에 넘겨야지.”
“어? 윈터 님. 저 자식, 와이번 파 두목인데요?”
“와이번 파라고? 그거 어디서 되게 많이 들어본 유치한 이름인데…….”
두 눈을 비비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한심한 남자들을 구경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퍽 정답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마음은 점점 뒤틀리기만 했다.
속세와는 멀리 떨어져 물정이라곤 하나도 모르고 마냥 해맑은 저자가 자신과 반쪽이나마 피를 나눈 형제라니.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슬렸다.
심장이 쿵쿵 뛰고 울렁거리더니 머리까지 어지러워졌다.
잠시 아찔한 시야를 간신히 붙든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벽에 몸을 기댔다.
“저, 저는 이만 가볼게요.”
“벌써요?”
“네. 급한 일이 생겨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황가의 문장을 가린 채 아스터가 얼른 뒤로 몸을 뺐다.
보호 마법은 신호탄의 역할도 하고 있어서 마법이 발동하는 순간 황궁 소속 마법사들에게도 신호가 갔을 것이다.
그러면 곧 사라진 아스터를 찾으려 기사들과 수색대가 파견되겠지.
아스터는 궁인들에게 들키기 전에 빠르게 환궁하기로 했다.
“다음에 또 놀러 와요. 알겠죠?”
“하하, 네. 그럴게요.”
아직 체력이 한참 남은 칸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다음을 약속했다.
눈을 찡그리며 웃은 아스터가 윈터와 메이딜리언에게도 정신없이 인사하고는 곧 로브를 푹 눌러썼다.
“어? 메이?”
멀어지는 아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윈터가 뒤늦게 메이딜리언을 발견했다.
그런데 메이딜리언의 상태가 이상했다.
제 심장을 부여잡은 채 벽에 기대선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메이!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놀란 윈터가 얼른 메이딜리언을 부축했다.
칸나 또한 당황해서는 주변을 살폈다.
“누, 누구 도와줄 만한 사람 없을까요? 쟤는 평소에 아픈 꼴을 못 봤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나도 모르겠어. 메이. 메이? 정신 차려 봐. 괜찮아? 응?”
메이딜리언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건 재회한 뒤로 처음이었다.
아프냐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하고 제 손만 꼭 잡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가 입술을 짓씹었다.
“안 되겠어. 얼른 의사라도…….”
“제, 제가 데려올게요! 금방 올 수 있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야, 죽지 마!”
번쩍 손을 든 칸나가 윈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갔다.
의사를 발견하면 그대로 둘러업고라도 올 것같이 다부진 눈빛이었다.
믿음직스러운 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윈터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미약한 힘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메이! 괜찮아? 이제 정신이 들어?”
“하아, 아가씨…….”
“응. 나 여기 있어. 괜찮은 거야? 갑자기 왜 그래? 어디가 아픈 거야?”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벽에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윈터는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몸을 낮추었다.
“그자가, 제 형이에요?”
“뭐?”
“아스터……. 황자인 거죠?”
윈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메이딜리언에게는 오래 숨길 생각도 없었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그라면 굳이 윈터가 말하지 않더라도 오래지 않아 스스로 답을 찾아낼 테니까.
그리고 이번에도 윈터의 예상이 맞았다.
다만 그녀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제 저는 버려지는 건가요?”
“……뭐?”
“저 대신, 그자를 황위에 올리는 건가요? 저는 이제 필요 없…….”
“메이.”
난데없는 메이딜리언의 말에 윈터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메이딜리언은 아홉 살 어린애처럼 잘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저 버리지 마세요, 아가씨.”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그가 윈터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에 윈터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갑자기 왜 그래, 메이. 대체 누가 널 버린다는 거야.”
메이딜리언 또한 이게 어디까지나 제 하잘것없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윈터는 항상 제게 전부를 걸 것처럼 구니까.
처음부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인 아가씨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시작도 알 수 없는 그 감정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마치 난생처음 달콤한 걸 손에 쥐어본 어린애처럼, 언제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불안해하며.
“메이, 나는 네게 전부 줄 거야.”
시선을 맞추고, 어둠 속에서 구원처럼 금빛 눈동자가 빛났다.
다정하고 따뜻한 맹세.
솜털처럼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는 약속은 그의 가시까지 숨겨줄 수는 없었다.
윈터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발치에 가져다줄 것이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단 하나만 빼고.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린애를 어르듯 어깨를 도닥이는 손길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언제든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처럼.
윈터의 생각은 늘 훤히 들여다보였다.
메이딜리언에게는 항상 쉬웠다.
윈터는 애초에 그에게 뭔가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웬만한 것들은 거의 다 제게 드러내곤 했으니까.
그것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애정에 기인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게 사라진다면 과연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윈터의 품 안에서 검은 짐승이 숨을 들이마셨다.
들썩이는 등이 위험하게 꿈틀거렸다.
이내 고개를 든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는 조금 젖어 있었다.
“아직도 내가 예뻐요?”
뜻밖의 물음에 윈터의 눈이 커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리는 듯하던 메이딜리언이었는데.
갑작스레 그의 분위기가 무척이나 위험하게 느껴졌다.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아슬아슬하고, 매혹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응? 어어, 그렇지.”
윈터는 제 생각은 잠시 미뤄 두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딜리언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곧 메이딜리언의 눈이 반짝이며 호선을 그렸다.
“아가씨는 절 좋아하잖아요. 그렇죠?”
“그럼. 당연하지.”
묻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깊은 애정을 담고 있었으나 대답하는 쪽에서는 그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훌쩍이는 코흘리개 어린애를 달래듯 흔쾌히 나온 대답에 메이딜리언이 만족스러운 듯 목을 울렸다.
비록 갈증만 타오르게 하는 사소한 달콤함이지만, 아직까지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거면 됐어요.”
홀로 고개를 끄덕인 메이딜리언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 아팠냐는 듯 말끔하기만 한 얼굴에 윈터는 마치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물었다.
“너, 좀 전까지 아프지 않았어?”
“이제 괜찮아요.”
잠시 뒤 정말로 의사를 둘러메고 온 칸나 또한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한창 신나게 건국제를 즐기던 의사에게 사과하는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메이, 나는 네게 전부 줄 거야.’
그래. 전부 가질 것이다.
자신의 주인이 제게 주지 않은 것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