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원작에서 메이딜리언이 죽음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무투 대회였다.
원작에서 어떻게든 황궁으로 무혈입성하려고 전전긍긍하던 엘리슨을 보다 못한 메이딜리언이 제멋대로 무투 대회 신청서를 내버렸다.
‘사람들은 자극적인 걸 좋아해.’
대체 왜 갑자기 무투 대회를 신청했냐며 패닉에 빠진 엘리슨에게 메이딜리언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었다.
‘암암리에 쓸데없는 소문 돌게 하느니 직접 보여줘야지.’
‘무, 뭐를요?’
‘함부로 입 놀리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걸.’
그리고 메이딜리언은 실제로 그렇게 만들었다.
‘으아악!’
‘크아악! 사, 살려 줘!’
‘이, 이 악마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 제발 이번만!’
원작의 인성 파탄 난 메이딜리언을 떠올리며 윈터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머리가 아찔해지며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이 역시 자신의 취향은 쓰레기구나 싶었다.
“저런, 가엽게도. 너무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렴.”
미약하게 상기된 윈터의 표정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리비우스가 퍽 다정한 삼촌인 척 말을 건넸다.
“비록 마력을 다루는 게 서툴더라도 크게 상관없을 거란다. 알버트는 네 절친한 사촌이잖니. 네게 좋은 상대가 되어 줄 거야. 그렇지?”
“그, 그럼요. 아버지.”
리비우스가 묻자 알버트가 엉겁결에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마치 아직 한 사람 몫을 하기는커녕 영 미숙하기만 한 윈터에게 알버트가 친절히 한 수 가르쳐준다는 듯한 말투였다.
속으로는 기가 찼지만, 동시에 어쩌면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슬리는 것도 치우고, 섭정 황제와도 자연스럽게 접촉해서 메이딜리언을 세상에 드러낼 기회.
“네. 기대하죠.”
윈터는 아무렇지 않게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 * *
그날 밤. 윈터가 무투 대회에 나간다는 소식에 메이딜리언이 찾아왔다.
안 그래도 그가 찾아올 걸 예상하고 있던 윈터는 홀로 포도주를 홀짝이다 메이딜리언을 맞이했다.
“안녕, 메이.”
발코니의 창문이 열리고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펄럭이는 걸 보며 윈터가 피식 웃었다.
알딸딸하게 술기운이 올라와 웃음이 헤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 추우세요?”
“으음. 괜찮은데?”
메이딜리언은 지난번의 교훈을 통해 야무지게 챙겨온 담요로 윈터의 어깨를 감싸주며 물었다.
“고마워.”
상냥한 배려에 윈터가 담요를 잘 여미며 대답했다.
저를 올려다보며 웃는 얼굴이 말갛게 빛나서, 메이딜리언은 한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오늘따라 윈터의 분위기가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던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다시 거뒀다.
그럴 리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왠지 윈터가 그대로 눈 녹듯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무투 대회에 나간다고 들었어요.”
마침내 나온 말에 윈터가 담요에 얼굴을 묻으며 푹 웃었다.
메이딜리언의 말이 어쩐지 원작의 엘리슨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소설에서 그런 잔소리를 듣는 건 메이딜리언이었는데, 이번엔 자신이라니.
“맞아.”
윈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긍정했다.
어디로 보나 이게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안 그래도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세상에 내놓을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작의 흐름대로 무투 대회를 통해 메이딜리언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죽음의 마력을 가진 데다 손속까지 자비가 없으니, 그 방법은 비난받을 수 있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그랬기에 원작의 엘리슨도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지.
이번엔 윈터 자신이 대신 출정해서 섭정 황제에게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우승할 거라는 계산까지 모두 마친 뒤였다.
“소식이 빠르네.”
“저택의 모두가 아가씨 얘기만 하는걸요.”
“그래?”
“네.”
‘저택의 모두’를 언급하는 메이딜리언의 말은 묘한 구석이 있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윈터는 얼마 전 수집한 소문 하나를 머리에서 끄집어냈다.
“요즘 사용인들 중에 갑자기 손목이 다쳐서 오는 사람들이 있던데.”
온종일 연회 때문에 시달리던 몸에 술기운까지 합쳐지자 몸이 자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제멋대로 기우뚱거렸다.
비틀거리는 윈터를 조심스레 잡아주며, 메이딜리언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다들 내가 저주를 내린 거라고 한다더라. 신기하지?”
달처럼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가 오롯이 제게 박혀서, 메이딜리언은 잠시 침묵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윈터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눈을 깜박이지만 않았다면 인형인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한참 윈터를 응시하며 말을 고르던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러지 말까요?”
그게 자기가 한 짓이라는 무언의 긍정이었다.
마치 거대한 맹수가 자세를 낮추고 예쁨받고 싶어 하는 듯한 모습에 윈터는 웃음을 꾹 참고 근엄하게 대답했다.
“들키지만 말아.”
그러자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내내 굳어 있던 메이딜리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네.”
착하게 대답하는 메이딜리언이 꼭 어릴 때 그 꼬마 같아서 윈터는 비실비실 자꾸만 웃음이 샜다.
흐트러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은 그녀는 일부러 눈을 힘주어 부릅떴다.
“메이.”
“네, 아가씨.”
“내일 혹시 시간 있어?”
“……왜요?”
“나랑 나가자.”
윈터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하게 그녀를 지켜보던 메이딜리언이 잠시 제가 들은 말을 의심했다.
이내 그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물론 그건 아주 찰나였다.
그는 이내 윈터의 손에 들린 편지를 발견하고 실망하고 말았으니까.
줄곧 손에 들고 있던 상아색 편지지에 단정하게 적힌 문장이 보였다.
[내일 영애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부디 저를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스터]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어디로 향했는지 깨달은 윈터 또한 편지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딱 그 사람 같은 문장이네.”
미소가 어린 윈터의 얼굴을 보며 메이딜리언은 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딱 한 번 마주친 것치고는 상대를 언급하는 윈터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친근했다.
메이딜리언의 혼란한 머릿속에서 잠시 스쳤던 아스터가 떠올랐다.
혈색이 별로 좋지 못했고, 성격도 유약하기 짝이 없고,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남자.
자세를 바로 하고 타인과 시선을 맞추며 조금만 당당해져도 볼만할 것 같기도 했다.
이목구비는 꽤 미형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연약한 자가 아가씨의 취향인 걸까?
메이딜리언은 윈터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자가 불쌍하세요? 그래서 또 마음을 내주시는 건가요? 이제 저는 가엽지도 않으세요? 내게만 마음을 주면 안 되나요?
그때, 마치 그런 그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윈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메이딜리언은 습관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윈터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제가 먼저 말했다.
“네, 그럴게요. 같이 가요.”
“그래, 좋아!”
윈터가 기쁘게 웃는 걸 보는데도 메이딜리언의 심장은 불안하게 술렁거린다.
데보라를 예뻐할 때와는 다른 기이한 위기감이 그를 휘감았다.
* * *
다시 만난 아스터는 지난번보다 혈색도 좋고 때깔도 좀 나아졌다.
“바, 반갑습니다. 영애. 하하. 그동안 자, 잘 지내셨죠?”
“응, 그럼. 난 잘 지냈지.”
꼭 온종일 연습했던 대사를 읊는 것처럼 어색한 인사를 건네는 아스터를 보며 윈터가 픽 웃었다.
그동안 그녀의 눈은 아스터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요즘 부쩍 아르만 백작이 그를 찾아가는 일이 잦다던가.
아르만 백작은 아스터의 친부로, 놀랍게도 메이딜리언의 친부와는 다르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아마도 섭정 황제와 같이 고혈을 빨아먹는 한심한 종자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그런 박쥐 같은 자들이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법이니까.
일단 그 인간만 떼어 내더라도 아스터의 삶은 좀 덜 팍팍할 것이다.
“약은 잘 먹고 있어?”
“그, 그럼요.”
아스터의 속사정을 뻔히 아는 윈터가 좀 더 다정하게 물었다.
그런 내막을 알 리가 없는 아스터는 그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피했다.
“인사해. 이쪽은 딜런, 그리고 칸나야.”
세 사람은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인사를 나눴다.
억지로 끌려 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메이딜리언이 제일 비협조적이었고, 칸나는 예상대로 아스터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제가 죄송했어요.”
“아, 아닙니다. 이제 괜찮아요, 하하.”
네 사람은 오늘 건국제 준비를 시작한 황도를 둘러보기로 했다.
바깥 구경을 못 한 아스터를 위한 것이라는 게 주된 목적이었지만 내심 윈터도 기대하고 있었다.
어릴 적엔 황도에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처럼 공작가 바깥으로 나가는 걸 싫어했고, 좀 자라고 나서는 마누트라 섬으로 떠나며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그녀 또한 황도를 마음껏 누비지는 못했었으니까.
“아스터는 어디 살아요?”
“저, 저는 그냥 황도 근처에…….”
마냥 신난 똥강아지 같은 칸나가 일행의 분위기를 잔뜩 살려주었다.
건국제가 열리는 황도는 평소보다 특히나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았다.
아스터는 안 그런 척 주위를 둘러보며 연신 우와, 우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엇, 조심……!”
그가 사람들 사이로 휩쓸릴 뻔한 걸 칸나가 구해준 것도 벌써 몇 번이나 되었다.
반사적으로 아스터를 끌어당기던 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물었다.
“와, 손이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워요?”
사심 하나 없는 눈이 아스터의 흉 하나 없이 매끈한 손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예고도 없이 가까워진 거리에 아스터는 부담스러운 듯 슬쩍 몸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그, 그냥…….”
시선을 피하는 아스터의 뺨이 붉어진 걸 보곤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