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50)

40화

* * *

윈터가 황도에 오고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블라디미르 공작가에서 연회가 열린다는 소문이 짜하게 퍼졌다.

공작은 원래 가신들이나 측근들만 불러서 소박하게 파티를 즐기는 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초대장을 거의 뿌리다시피 했다.

덕분에 그동안 열린 적 없는 역대급으로 화려한 연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에 황도의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하는 분 아니었나요?”

“난 선대 공작께서 주최한 파티 외에 가본 적도 없군.”

“제 지인의 지인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소문만 무성한 연회는 블라디미르 공작이 보낸 초대장만으로도 기대감이 쑥쑥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연회가 열린 날, 공작가의 연회 홀에 들어선 귀족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제 생에 이렇게 화려한 파티는 처음이군요.”

초대권으로 금배지를 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샹들리에와 벽장식에서 시작해 커튼과 홀을 차지한 그림과 조각까지 전부 연회 하나만을 위해 준비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면면이 화려했다.

눈 돌아가게 휘황찬란한 내부에 귀족들은 체면을 차리는 것도 잊고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재력이 어마어마하다고 풍문으로만 들었었는데, 과연 황금의 블라디미르답군.”

“대체 그 철혈 공작이 뭘 위해서 이렇게 성대한 연회를 연 거죠?”

“그러게요.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 들은 걸로는…….”

공작의 의중을 추측하는 목소리는 연회에 와서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며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다들 안 그런 척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오늘 후계자를 발표한다더군요.”

물론 그 믿을 만한 소식통은 공작의 허락하에 뚫린 입이 되어준 누군가일 것이다.

비밀 호위대에서 히르칸이라는 변절자가 나온 뒤로, 안 그래도 폐쇄적이었던 공작가는 더 굳게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정보들에 지극히 예민하게 굴던 공작이 굳이 후계자라는 단서를 흘린 것은 조금 더 인상적인 윈터의 등장을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후계자라…….”

“최근에 공작의 딸이 황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있지 않았소?”

그리고 공작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사교계에 도는 소문에 빠삭한 이들이 하나둘씩 제가 기억하고 있던 말들을 이리저리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아, 그 아프다는 딸 말이죠?”

“딸이 아팠나?”

“글쎄요. 정확히 알려진 건 아니지만 아마 마력 쪽에 문제가 있던 걸로 아는데…….”

“어머, 맞아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근데 듣자 하니 오래 못 산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후계자로 나선다는 걸 보니 병은 다 나은 모양이죠?”

마지막 말에 웅성웅성 소란스럽던 파티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말을 꺼냈던 여자는 황급히 제 얼굴을 부채로 감추고는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후계자에 대한 것은 비단 공작가뿐만 아니라 어디서든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가 시한부라고?

혼란만 점차 가중될 뿐 누구도 공작의 의중을 제대로 가늠하는 자가 없었다.

“혹시 알버트 공자를 의미하는 건 아닐까요?”

그나마 머리를 좀 굴린다고 하는 이가 꺼낸 말에 귀족들은 애써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리비우스와 알버트.

두 사람은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광을 뒤에 업고 갖은 진상짓을 하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사교계에서는 꺼려지는 인물들이었다.

안 그래도 영 꼴 보기 싫은데 만약 알버트가 후계자까지 되고 나면 또 얼마나 뽐내고 다니려나.

벌써부터 고개 빳빳이 들고 우쭐대는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 누군가 작게 혀를 찼다.

“곧 뭐든 밝혀지겠죠, 기다려보죠.”

“좋아요.”

한편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자들이 또 있었다.

남작부터 백작가의 자제까지. 젊은 영식들로 이루어진 무리의 중심에는 알버트가 있었다.

“저기는 네 이야기로 난리인데?”

“알버트, 이제 네가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되는 거야?”

“미리미리 각하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가문에서 내놨다시피 한 질이 안 좋은 무리들은 오래간만에 열린 호화로운 연회에서 벌써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하는 농담에 지나치는 사람들이 눈을 흘겼다.

“글쎄. 난 그저 각하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뿐인걸.”

제 곁에서 비틀대는 남자를 피해 살짝 옆으로 걸음을 옮긴 알버트가 말했다.

“오오, 이번에 무슨 양조장 사업 같은 걸 맡았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야. 도로 개발 공사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원래부터 과장하고 떠벌리기 좋아하는 알버트였다.

그가 허세로 가득 채워 말한 제 업적들을 읊으며 영식들이 왁자지껄 소리를 높였다.

물론 실제로 알버트는 제대로 맡은 일조차 없었다.

그나마 그가 몇 가지 일을 담당한 것도 그의 아버지인 리비우스가 공작에게 조르고 졸라 얻은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그 일들 중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도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죽을병 걸렸다던 네 사촌 얘기도 들리더라.”

“아아, 얼마 전에 돌아왔다던?”

“응, 걔가 네 팔도 그렇게 만든 거라던데?”

빈 와인 잔을 손에서 굴리며 누군가 알버트의 손을 가리켰다.

알버트의 호들갑에 초빙된 신관은 으스러진 팔을 복구는 해줬지만 완전히 다 붙이진 않았다.

자연치유력을 높여야 한다나 뭐라나.

그때는 너무 아파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아무튼 알버트는 뼈가 완전히 붙을 때까지 한동안 붕대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럴 리가. 우린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던 사이인걸. 윈터가 다시 돌아와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제 팔로 시선이 모이는 걸 느낀 알버트가 얼른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흐음, 그래? 지금 들어오는 사람이 네 사촌이지?”

그 말에 알버트가 휙 고개를 돌렸다.

막 홀의 문이 열리고 블라디미르 공작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윈터가 걸어들어오는 게 보였다.

밤의 장막을 한 자락 베어낸 것처럼 짙은 남색의 드레스.

그 위로 얇게 한 겹 크리스탈이 박힌 레이스가 수놓아져 별처럼 반짝였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공작을 그대로 판박이처럼 닮은 검은 머리칼과 금빛 눈동자였다.

“저자가 바로…….”

“네, 아팠다던 그 딸인 모양이네요.”

“흐음, 병색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데요?”

“역시 오늘 발표한다던 그 후계자는 저쪽인 모양이군요. 참 다행인 일이네요.”

누군가를 겨냥한 듯 마지막 목소리는 조금 컸다.

까드득, 알버트가 이를 갈았다.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단상을 오르는 공작과 윈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연회에 참석한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전하고 싶군.”

모두에게 샴페인을 나눠준 공작이 짧게 소감을 밝히고는 윈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공작가에 돌아온, 앞으로 나의 뒤를 이끌어 블라디미르 공작가를 이끌게 될 후계자를 소개하지.”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윈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이 아래를 오시하는 모습에 다들 숨을 죽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윈터 블라디미르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던 귀족들은 이내 윈터의 입가에 비치는 희미한 미소에 굳어 있던 어깨를 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를 환영하는 박수가 홀 안에 가득 찼다.

이 순간 윈터가 달갑지 않은 것은 아마도 리비우스와 알버트, 두 부자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곧 단상 아래로 내려온 윈터는 블라디미르 공작과 함께 다른 귀족들을 하나씩 만나 좀 더 친밀한 인사를 나눴다.

늘 냉랭하던 블라디미르 공작과 달리 생글생글 잘도 웃는 윈터를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피도 눈물도 없다 일컬어지는 공작이 직접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 공표한 후계자.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공작도 제 딸을 볼 때만큼은 희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사람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눈치가 재빠른 자들은 벌써 윈터를 보는 눈을 달리했다.

공작이 인정한 후계자라면 앞으로 그 능력이 기대될 것이고, 만일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공작이 저 정도로 아낀다면 분명 공작과 이어주는 다리 역할 정도는 톡톡히 할 거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드디어 뵙는군요, 영애. 저는 포테른 영지의…….”

“그동안 많이 아프셨다고 들었는데 몸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오늘 연회가 정말 멋지네요. 전부 공작 각하께서 영애를 위해 준비한 것이겠죠?”

잔뜩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당황할 법도 한데, 윈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그 모습을 본 블라디미르 공작은 뿌듯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제가 끼어들 자리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 알버트가 손에 든 샴페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까부터 괜스레 목이 탔기 때문이다.

“괜찮아?”

그의 빈 잔을 새 잔과 바꿔준 영식 하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곁에 와 물었다.

하도 급하게 들이켜는 바람에 입가를 타고 조금 흐른 와인을 닦아내며 알버트가 작게 인상을 썼다.

“뭐가?”

“그냥. 아까부터 좀 초조해 보여서 말이야.”

“뭐라고?”

어딘가 조롱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에 알버트가 발끈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뒤로 불쑥 다른 영식들이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걸었다.

“야, 알버트, 우리도 네 사촌이랑 인사 좀 시켜줘.”

“그래.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다.”

“척 봐도 엄청 미인이던데. 부럽다?”

슬쩍 뒤에서 밀며 당장이라도 윈터와 인사를 나누게 해달라는 듯 종용하는 말에 알버트는 멍하던 머리에 찬물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이, 인사를 시켜달라고?”

당황하는 알버트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짓던 남자 하나가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소개해주기 어려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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