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150)

39화

원작에서 날이 갈수록 흉포해지는 메이딜리언을 지켜보던 엘리슨은 끝내 그를 배신하고 아스터를 지지한다.

엘리슨 덕분에 제 기반을 모조리 잃은 메이딜리언은 빠르게 무너졌다.

윈터가 칼리스타를 만든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엘리슨의 배신을 대비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이번에는 메이딜리언을 결코 그렇게 허망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네, 아가씨.”

엘리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만족스레 미소 지은 윈터가 곧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라 몸을 돌린 엘리슨은 열린 문틈으로 윈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메이, 오래 기다렸어?”

인간미라곤 찾아보기 힘든 메이딜리언을 아직도 아홉 살 어린 애처럼 대하는 작은 여자.

놀라운 것은 메이딜리언 또한 그런 윈터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표정 없는 얼굴이 풀어지고, 괜찮다며 웃는 모습은 다정다감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윈터는 어김없이 그 표정에서 남들은 읽지 못하는 것을 읽고,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곤 했다.

“많이 놀랐지?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걱정이 가득한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의 불안이 빠르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아가씨는요? 괜찮아요?”

“나야 당연히 멀쩡하지!”

최근 들어 엘리슨의 고민이 깊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날이 갈수록 제어하기 힘들어지는 메이딜리언 덕분에 가슴이 서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덕분에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아스터까지 염두에 두게 되었으니까.

‘유약한 황제보다야 차라리 폭군이 낫지 않아?’

걱정이 가득한 엘리슨을 보며 베일리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녀의 혈육은 아마도 선황인 미쉘라를 떠올리며 한 말이었겠지.

처음엔 엘리슨도 베일리의 말에 일정 부분 동의했다.

외압에 시달리는 것보다야 난리가 나도 내부에서 나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엄연히 선황과 두 황자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특히 메이딜리언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그렇기에 만에 하나라도 그가 미친개처럼 날뛰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를 말려줄 목줄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살기등등한 메이딜리언을 마치 철이 덜 든 강아지 대하듯 하는 윈터 같은 사람.

“아, 안녕하세요, 아가씨! 전 칸나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엘리슨뿐은 아닐 것이다.

평소에도 짐승 같은 감을 자랑하는 칸나는 벌써 윈터에게 마음을 홀딱 빼앗긴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데보라도 윈터와 만나고는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었지.

대체 저 사람이 가진 힘은 무엇일까.

엘리슨은 윈터를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오, 반가워. 칸나.”

“저도요! 하하. 사실 이 재수 없는 자식이 관심도 갖지 말라고 엄포를 놔서 실례를 무릅쓰고 인사부터 드렸어요.”

“정말 그랬어, 메이?”

“……그럴 리가요.”

“와아, 저 내숭 좀 봐!”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 섞여 유순한 양의 모습을 가장한 메이딜리언을 보던 엘리슨의 어깨가 느슨해졌다.

“어쩌면, 저분이라면…….”

윈터와 함께라면 메이딜리언도 성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엘리슨의 머릿속에서 쉼 없이 그림이 그려졌다.

* * *

간단한 통성명을 마치고 대화의 물꼬를 튼 칸나는 제가 윈터에게 가진 호감을 숨기지 않았다.

두 손을 꼭 모으고 다가온 그녀가 쫑알쫑알 그동안 쌓아두었던 질문들을 전부 풀어놨다.

“아까 그 바람은 어떻게 한 거예요? 마력을 그렇게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윈터 님은 바람의 마력을 개화한 건가요? 그렇다기엔 마력이 좀 더 근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는데……. 귀족님들의 마력은 원래 다 그런가요?”

“으음…….”

문제는 그 질문이 한 번에 대답하기에는 좀 많았다는 것이다.

“하나씩만 물어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윈터가 난감해하자 메이딜리언이 와락 인상을 썼다.

평소라면 메이딜리언이 하는 말과 행동에 당장 발끈했을 칸나였으나 지금만큼은 제가 지나쳤다는 걸 깨닫고 금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죄송해요. 이렇게 신기한 마력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봐서 그만…….”

“하하, 아니야.”

뒷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하는 칸나를 보며 윈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그녀는 칸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하나씩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우선 간단하게만 말하자면 바람 마력은 맞는데, 바람으로 개화한 건 아니야.”

간단한 설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칸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윈터의 말에 집중했다.

어릴 적부터 일찍 마력 개화를 시작한 그녀는 마력 활용에 대해서라면 늘 열의가 가득했다.

“아마 네가 마력을 활용하는 방법이랑 좀 비슷할 것 같은데?”

열성적인 학생의 얼굴을 한 칸나를 보며 윈터가 말했다.

그러자 칸나의 눈이 커졌다.

“와, 그걸 한 번 보고 어떻게 아셨어요? 그런 사람은 아가씨가 처음이에요!”

“그래?”

윈터야 당연히 소설로 읽었으니 알게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걸 다 말할 수는 없으니 그녀는 그저 의뭉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어차피 말해봤자 여기서 그 누구도 윈터의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곧 볼이 발그레해진 칸나가 말했다.

“아가씨, 언제 한번 저랑 여자 대 여자로 한판 붙어보시는 거 어때요?”

“뭐?”

뜻밖의 말에 윈터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칸나 또한 배시시 웃었다.

소설 속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라서 윈터는 또 한 번 벅찬 감정을 느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성장하면서 좀 다듬어지긴 하겠지만 초반의 칸나는 밝고 천진했다.

말 그대로 해맑은 똥강아지 같은 성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가씨를 귀찮게 하지 마.”

그리고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이 남자는 예민하고 새침한 고양이 같지.

“넌 뭐야, 네가 아가씨 대리인이야?”

제게 건네진 퉁명스러운 말에 칸나가 부릅 도끼눈을 뜨고는 응수했다.

“아까는 싹 무시하더니 왜 또 시비야?”

“네가 주제넘게 아가씨한테 덤비니까 그런 거지.”

“주제? 내 주제가 뭔데?”

“이미 잘 아는 것 같은데.”

“뭐라고?”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린 칸나가 되물었다.

슬슬 소강상태였던 두 사람의 싸움에 다시 불씨가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메이딜리언이 거기에 신나게 부채질을 했다.

“아가씨랑 대련하고 싶으면 나부터 제대로 이기고 말하지 그래.”

“하, 나야말로 바라던 바야!”

마치 물과 불처럼 두 사람은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었다.

윈터는 앙숙의 조건을 두루 갖춘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감상 중이었다.

그러다 메이딜리언과 칸나가 금방이라도 상대에게 달려들 것처럼 살벌해지자 얼른 손을 들었다.

“둘 다 그만.”

그러자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와, 짐승을 조련하는 솜씨가 아주 대단하신걸요?”

그때 사무실에서 소리 없이 나와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슨이 감탄하며 다가왔다.

윈터의 말을 듣고 기세를 가라앉혔던 칸나가 엘리슨이 한 짐승이라는 말에 울상을 지었다.

“엘리슨 님! 엄연히 저도 사람인데, 짐승이라뇨.”

“주의를 시킨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그러는 걸 보니 확실히 사람 말은 통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지.”

생긋 웃으며 신랄하게 하는 말에 칸나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칸나와 엘리슨의 대화를 듣던 윈터가 작게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짐승까지는 좀 그렇고. 육아에 소질이 있는 거라고 순화하지.”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

마주 보고 생글생글 웃는 두 사람의 배경으로 꽃들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말투만 상냥했지 냉랭하기 짝이 없는 말에 칸나가 떡하니 입을 벌렸다.

“맙소사. 엘리슨 님이 두 명이잖아?”

그러고는 옆에 있던 메이딜리언을 툭 쳤다.

“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나 순순히 대답해줄 메이딜리언이 아니었다.

슬쩍 뒤로 물러서서 칸나의 손을 피한 그가 더없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럴 리가. 난 너랑 같이 도매금으로 묶이는 게 더 불쾌하군.”

물론 그 서늘한 말에 칸나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참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불과 1분이 지나기도 전에 다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주시하던 윈터가 엘리슨에게 작게 속삭였다.

“안에 있는 사람 말이야.”

아스터를 지칭하는 말에 엘리슨의 뺨이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네, 아가씨.”

“깨어나면 내 말 좀 전해 줘.”

윈터는 줄곧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엘리슨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요?”

연보라색 쪽지를 받아든 엘리슨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 별건 아니고 약속한 게 있어서.”

안에는 자신을 만나고 싶으면 제니마 상회에 와서 연락을 요청하라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뭐, 싫지만 않으면 당신도 우리랑 친구 하든지.’

아스터에게 했던 그 약속이 영 빈말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대체되기는 어렵겠지만, 윈터는 원작에서 칸나가 했던 역할을 제가 대신해보기로 했다.

짧게 줄이자면, ‘아스터 갱생시키기 프로젝트’ 정도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혹시라도 저 사람이 다시 여기에 온다면 나한테 꼭 연락해줘.”

그 말에 엘리슨의 고개가 휙 들렸다.

윈터의 생각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는지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얼룩졌다.

“일단 균형을 맞춰야 할 것 같아서.”

두 손을 저울처럼 기울여 보이던 윈터가 픽 웃었다.

아스터를 자신이 짠 판에 끼워 넣게 될 줄은 몰랐으나 결코 나쁜 수는 아니었다.

황위 다툼에 앞서서 섭정 황제라는 큰 산부터 넘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아스터가 제니마 상회에 왕래하며 사회성을 기르는 동안 윈터는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메이딜리언을 끌고 나와 칸나랑 붙여놓을 생각이었다.

이미 충분히 조건은 갖춰진 것 같으니, 둘이 붙여놓고 싸우면서 정들기만 기다리면 되겠지.

착착 진행되는 일을 보며 윈터는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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