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의기소침하면서도 상대의 애정을 갈구하는 듯 갈증이 가득한 눈빛.
저건 꼭 어린 메이딜리언을 떠올리게 했다.
“이건 좀 곤란한데.”
“네? 뭐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윈터가 남자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윈터야. 당신은?”
“저, 저는, 아스터……예요.”
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남자는 제 본명도 숨기지 않고 마구 말한다.
보나 마나 오늘 벌어진 이 탈출극도 지극히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겠지.
제 몸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지만,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더없이 절망스러웠을 테니까.
“그렇구나. 반가워, 아스터.”
윈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활짝 웃으며 아스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스터는 뭐에 홀린 듯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윈터의 손을 조심히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네, 네! 반, 반가워요!”
정확히 말하면 남자의 이름은 아스터 카데르 제니어스.
메이딜리언의 형이자 제국의 첫째 황자다.
지금은 섭정 황제인 제 외숙에게 독살 위협을 신나게 당하는 중이시고.
원작에서 이 유약한 황자는 칸나를 만나 세상을 배우고, 점차 밝아지며 황제에게 대항할 힘을 키워나간다.
그와 반대로 메이딜리언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성장했다.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두 황자는 대칭점에 서 있었다.
물론 윈터가 있는 이번 생은 다를 것이다.
메이딜리언이 바라는 모든 것은 그의 발치에 깔아줄 것이니까.
원래라면 아스터가 가져야 했을 것조차도 모두.
그렇게 다짐한 윈터였는데, 막상 아스터를 만나고 나니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 커서도 이렇게 바보 같을 수가 있나?”
아스터의 상태가 생각보다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아, 하하. 제가 좀 그런 편이죠.”
바로 앞에서 욕해도 허허 웃고 넘어가는 속 없는 황자를 보며 윈터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제 세력이라곤 없는 궁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지냈을 아스터의 생활이 뻔히 눈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웃지 마.”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윈터가 와락 인상을 쓰며 하는 말에 아스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사과에 오히려 윈터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고.”
“그런가요? 제가 웃는 모습이 흉측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아스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해?”
“으음, 그냥 주변에서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은 답답할 정도로 착해 보였다.
이게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라니.
윈터는 조금 개탄스러워졌다.
칸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게 될 텐데.
미안하지만 이번 생엔 그럴 기회가 없을 거였다.
윈터가 여자 주인공마저도 전부 메이딜리언의 몫으로 예비할 것이니까.
그 말은 어쩌면 아스터는 평생 이렇게 바보처럼 허허실실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당신 웃는 거 별로 안 흉측해. 오히려 예뻐.”
윈터는 약간의 미안함을 담아 솔직하게 말해줬다.
덕분에 아스터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래요? 그런 말은 또 처음 들어보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어하던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웃지 말라고 한 건 그냥, 하,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어 윈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스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꼬리를 잡았다.
“그, 그러니까?”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 못 하고 있던 내 쥐꼬리만 한 양심이 좀 찔려서 한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양심이 왜 찔리시는데요?”
“그런 게 있어. 비밀이니까 너무 자세히 묻진 말고.”
“네, 네! 그럴게요.”
윈터가 눈을 부릅뜨자 아스터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윈터가 표정을 풀고 픽 웃었다.
늘 아슬아슬 묘한 긴장감이 있는 메이딜리언이나 능글능글한 리어트만 보다가 이런 순진한 반응은 또 오랜만이라 나름 신선했다.
“그리고 이거 받아.”
“이건 뭔가요?”
“선물.”
느닷없이 윈터가 안긴 선물을 엉겁결에 받아든 아스터는 그다지 기뻐할 수 없었다.
검지만 한 병에 담긴 부글거리는 녹색 액체는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선물이라고요?”
“응. 맘에 안 들어?”
“아니. 그, 그건 아닌데, 으음…….”
약병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아스터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이걸 어떻게 잘 돌려 말할까 하는 생각이 여기까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방법을 찾아낸 건지 한층 밝은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이건 어디에 쓰는 건가요? 바르는 건가요?”
“그럴 리가. 마시는 거야.”
물론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스타의 기대를 박살 냈다.
“아, 하하. 마, 마시는 거군요?”
“그래. 하루 세 번. 식후에 하나씩.”
“그, 그렇게나 많이요?”
“왜, 싫어?”
차마 그렇다고 말도 못 하고 아스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자양강장제야. 몸에 좋은 거니까 마셔둬.”
“몸에 좋은 거…….”
어딜 봐도 치명적인 독약처럼 부글거리는 찜찜한 액체를 이리저리 살피며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저건 정말로 자양강장제가 맞았다.
프르넷 뿌리를 달인 물을 섞어서 좀 인상적인 모양이 되긴 했지만.
섭정 황제가 주는 음침한 식사보다야 백배 천배 몸에 좋았다.
“내 친구들이 오늘 본의 아니게 당신을 다치게 했으니까 주는 사과의 선물이야.”
“아까 그분들이 친구였군요?”
아까의 살벌한 대결을 떠올린 건지, 아스터의 표정이 다시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 미약한 부러움도 느껴졌다.
습관처럼 턱을 긁적이던 윈터가 입술을 열었다.
“뭐, 싫지만 않으면 당신도 우리랑 친구 하든지.”
“……예?”
“아냐. 그냥 못 들은 걸로 하…….”
“아니에요! 할래요! 친구 할래요!”
윈터가 뭐라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아스터가 외쳤다.
그러고는 자기도 멋쩍은지 얼른 다시 자리에 앉았다.
“푸흡.”
그 모습에 윈터가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함으로 볼을 발갛게 물들였던 아스터도 어설프게 따라 웃더니 대뜸 윈터가 줬던 해독제 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 그럼 친구가 된 기념으로 하나 마셔볼까요?”
“뭐, 그러든지.”
뽁, 하고 코르크 마개가 열리자 작은 유리병에서 스멀스멀 오묘한 냄새가 올라왔다.
누가 봐도 마시겠다고 한 것을 후회하는 표정이던 아스터가 곧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호기롭게 약을 목 뒤로 넘겼다.
“크억.”
아무래도 색만큼이나 맛도 대단한 약인 모양이었다.
극독이라도 마신 양 제 목을 부여잡은 아스터의 낯빛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어때? 괜찮아?”
“주, 죽을 것 같…….”
거기까지 말한 아스터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쿵, 소리가 나며 바닥을 구르는 아스터 때문에 윈터도 놀랐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녀가 황급히 쓰러진 아스터를 살폈다.
다행히 코에 손을 대봤을 때는 아무 문제는 없었다.
해독제를 마셨는데 왜 기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
이 소란에 바깥에 있던 엘리슨이 조심스레 노크하고 들어왔다.
“아, 엘리슨.”
쓰러진 아스터와 그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윈터.
게다가 절묘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는 약병까지.
너무나도 독살의 한 장면 같은 모습에 엘리슨이 기겁하며 얼른 사무실 문을 닫았다.
“대, 대체 무슨 일인가요!”
황급히 다가온 엘리슨이 조심스레 물었다.
“……해치웠나요?”
“그럴 리가.”
상상 이상의 질문에 푹 웃은 윈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베일리가 준비해준 약을 마시고는 이렇게 됐어.”
“아, 설마…….”
뭔가 짐작하는 게 있었는지 엘리슨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병을 집어 들더니 킁킁 냄새를 맡았다.
곧 잔뜩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말했다.
“역시. 베일리가 또 쓸데없는 장난을 친 모양이네요.”
“장난이라고?”
“네. 그 녀석, 맘에 안 드는 사람한테는 기절할 만큼 맛없는 약을 만들어주는 버릇이 있…….”
거기까지 말한 엘리슨이 멈칫했다.
어느새 윈터가 가늘게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응.”
“아, 하하하, 시, 실언했습니다.”
“뭐, 괜찮아. 하지만 나머지도 이래서는 안 될 거야.”
아스터의 손에서 나머지 약병들도 빼낸 윈터가 엘리슨에게 그대로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물었다.
“엘리슨도 그래?”
“예?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스터 말이야. 그렇게 못마땅하냐고.”
아르카는 선황의 친위대이자 비밀 호위대였다.
오직 선황만을 위해 움직이는 충직한 존재들.
그들은 선황의 유지를 받아 메이딜리언을 찾고, 그를 황궁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섭정 황제의 폭정은 심해지고 있고, 선황의 유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황자들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던 아르카는 점차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섭정 황제를 물리치고, 새로 황위에 오를 만한 황자의 뒤를 따르자.
그 생각의 주축은 당연히 엘리슨이었다.
그녀는 섭정 황제가 선황을 죽이고 뻔뻔스레 지금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실제로도 그녀의 추측이 맞았다.
“제가 감히 그런 감정을 품을 만한 주제가 되나요.”
엘리슨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러나 윈터는 호락호락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언젠가 담판을 지었어야 할 주제였으니까.
“저 애마저 죽어버리면 섭정 황제의 위치가 너무 공고해져. 그건 이미 알고 있겠지?”
“그건…….”
“견제하는 건 하나보단 둘이 더 낫잖아.”
엘리슨의 표정이 전에 없이 낮게 가라앉았다.
제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도 모자라, 섭정 황제를 견제하겠다니.
어릴 적에야 그저 호기로 메이딜리언을 황제로 올리겠다 한 줄 알았던 엘리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또 한 번 깨달았다.
윈터는 지금 누구보다도 이 일에 진심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섭정 황제를 치우기 전까지는,”
천천히 다가온 윈터가 싱긋 웃었다.
“배신하지 마, 엘리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