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쯧. 여전히 시끄럽군.”
미친 듯이 날뛰는 칸나를 마력 하나 쓰지 않고 가볍게 피하는 메이딜리언의 모습도 윈터의 심장을 찡하게 만들었다.
어릴 때는 영 비실비실했는데, 어느새 칸나의 공격도 흘려보낼 줄 알 만큼 성장한 것이 새삼 대견했다.
“……어?”
한참 두 사람의 살벌한 싸움을 즐겁게 구경하던 윈터가 눈을 크게 떴다.
양보 없는 대결에, 안타깝게 미처 피하지 못하고 휘말린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브 아래에 가려져 있던 분홍빛 눈동자가 언뜻 드러나며, 윈터와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창백한 낯빛, 퍼석하게 말라붙은 입술. 거칠고 칙칙한 백금발의 머리카락.
그것은 분명 윈터가 아는 누군가의 특징이었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어, 아, 아가씨!”
당황한 엘리슨이 말리려 했지만 윈터가 조금 더 빨랐다.
윈터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상대에게 자비없이 쇄도하는 메이딜리언과 칸나 사이로 걸어갔다.
“이봐, 비켜! 당신, 뭐 하는……!”
“……아가씨?”
메이딜리언과 칸나가 황급히 내지르던 손을 거두려 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윈터가 아주 자연스럽게 바람의 마력을 이용해 공격의 흐름을 바꾸었다.
가볍게 서로를 엇갈리게 만든 윈터 덕분에 칸나의 공격은 이번에도 그저 맨땅에 꽂혔고, 메이딜리언은 가볍게 반대쪽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거리를 가득 메운 뿌연 흙먼지 속에서 로브 속 남자가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안 그래도 좋지 못하던 몸 상태에, 방금 전 충격에 휘말린 덕분인지 벌써 정신을 놓고 쓰러지려는 기미가 보였다.
“천사……?”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자신을 향해 환히 웃는 윈터를 발견한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찌나 놀랐던 건지.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 * *
한창 소란이 벌어졌던 게 언제였냐는 듯, 제니마 상회 안은 조용했다.
메이딜리언과 칸나의 싸움에 휘말린 남자가 그대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사이가 안 좋아서 싸우든 말든 아무 상관은 없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상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평소에 메이딜리언의 일이라면 낮은 자세로 대하기 일쑤던 엘리슨은 드물게 화를 냈다.
물론 메이딜리언은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칸나만 잔뜩 주눅이 든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도 윈터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어휴…….”
그때 윈터 아가씨라는 말에 칸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무척이나 궁금하던 참이었다.
홀연히 나타나 자신과 메이딜리언의 공격을 어린애들 장난처럼 흩트려놓은 여자의 정체가.
“그 사람 누구예요?”
“누구? 윈터 아가씨?”
“네.”
칸나가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벌써부터 한 판 제대로 붙어보자 하고 싶은 생각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으음. 그러니까…….”
엘리슨이 어디부터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뜻밖에도 메이딜리언이 입을 열었다.
“넌 신경 꺼.”
“하, 뭐?”
“네가 감히 알아야 할 분이 아니니까 관심도 두지 말라고.”
평소보다 예민한 반응에 어이가 없어진 칸나가 혀를 찼다.
“참나. 아까부터 엘리슨 언니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것 같더니 갑자기 또 왜 시비야?”
메이딜리언은 그대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벌컥 화를 내는 칸나를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야이, 너 진짜……!”
“칸나! 네가 참아!”
벌떡 일어나서 다시 덤벼들려는 칸나를 엘리슨이 말리느라 또 한 번 소란이 일었으나, 이미 그것은 메이딜리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눈은 아까부터 윈터가 들어간 사무실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장 안으로 옮겨야겠어요.’
공격이라곤 제대로 먹힌 적도 없는데 대뜸 피를 토하고 쓰러진 정체불명의 남자 때문에 윈터는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가씨.’
‘미안, 메이. 조금 이따가 얘기하자.’
자신을 잡아채는 손길도 부드럽게 뿌리친 채, 윈터는 쓰러진 남자의 뒤를 따라 사라져버렸다.
원체 불쌍한 애들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제 아가씨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상황에 휘말린 자를 윈터가 구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와아, 다 들리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것 봐? 그래서 네가 재수 없는 자식인 거다. 이 재수 없는 자식아!”
옆에서 왈왈거리는 칸나를 애써 무시하며, 메이딜리언은 치밀어오르는 살의를 애써 내리눌렀다.
여기서 제 성질대로 날뛰었다가 윈터에게 더 밉보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 모든 건 다 저 여자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칸나는 모든 면에 있어서 그와 맞지 않았다.
사사건건 제 일이 아닌데도 참견하며 나서는 것도, 쓸데없이 모든 일에 열의가 가득한 것도.
사흘 밤낮을 굶고 간신히 구한 빵도 옆에서 배곯는 아이에게 양보할 것 같은, 선량함을 사람으로 만든 것 같은 인간이 메이딜리언은 딱 질색이었다.
물론 칸나가 마냥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면 사소한 일에 잘 발끈하는 다혈질에 제 감정에 솔직하기 짝이 없는 그녀는 자기를 싫어하는 티를 온몸으로 내는 메이딜리언을 못 견뎠다.
‘안녕, 난 칸나야. 넌 이름이 뭐야?’
처음엔 어떻게든 친해져 보고 싶어서 말도 걸고 해봤지만 늘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저리 꺼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필요 없어.’
‘저리 가라고.’
온통 거절, 거절, 거절.
칸나는 그대로 눈이 돌아 메이딜리언에게 덤벼들었고, 메이딜리언 또한 지지 않고 응수했다.
문제는 두 사람의 실력이 꽤 비등비등했다는 것인데.
그때부터 칸나는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메이딜리언만 보면 달려들었다.
메이딜리언은 귀찮아하면서도 그 싸움을 받아줘야 했다.
피하면 칸나가 대륙 끝까지라도 쫓아올 기세였고, 그렇다고 죽이기에는 그녀가 짜증 날 정도로 강했으니까.
사실 오늘도 그런 지루한 싸움이 벌어진 날 중 하나였다.
설마 그사이에 사람이 끼어들 줄은 몰랐고, 또 그걸 목격한 윈터가 싸움 한복판으로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젠장.”
평소답지 않게 메이딜리언이 작게 욕을 짓씹었다.
손톱 옆 거스러미를 갉작이는 손길이 무척 신경질적이었다.
조금 초점이 나간 듯한 그 눈을 엘리슨이 유심히 살폈다.
윈터 앞에서는 제 나름대로 가진 발톱을 숨기고 양순한 짐승인 척 굴었을 텐데, 오늘 그 가면이 조금 벗겨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메이딜리언의 불안이 얼마나 클지 알 만했다.
곧 엘리슨의 시선 또한 메이딜리언처럼 윈터가 들어간 사무실로 향했다.
* * *
“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네요!”
환자를 살피던 남자가 밝은 얼굴로 일어서며 말했다.
짙푸른 색 머리카락은 곱게 하나로 땋았고, 회색 눈동자는 장난기가 역력하나 어딘가 이지적인 느낌이 풍겼다.
그가 미소 짓자 눈가의 점에 시선이 가며 묘한 느낌이 풍겼다.
“고마워, 베일리.”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절 이미 아시네요?”
“엘리슨이랑 쌍둥이잖아.”
척 봐도 닮은 얼굴을 가리키며 윈터가 픽 웃었다.
물론 다소 딱딱하고 냉철해 보이는 분위기의 엘리슨과 달리 이쪽은 좀 전체적으로 유들유들한 인상이긴 했지만.
굳이 머리나 눈 색으로 따지지 않더라도 두 사람은 가족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날 아네?”
“우리 상회의 은인인데 모를 수야 없죠.”
그렇게 말한 베일리가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니마 상회의 점주, 베일리입니다.”
“반가워. 난 윈터 블라디미르.”
두 사람은 곧 자연스레 악수했다.
실질적으로는 아르카의 단장과 칼리스타의 수장의 만남이었지만.
둘 중 누구도 그 말을 먼저 꺼내지는 않았다.
윈터야 상대방의 정보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굳이 캐물을 필요가 없었고, 베일리는 저기 누워 있는 신원 미상의 남자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영 난처한 걸 주워오셨네요?”
휙, 뒤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베일리가 대뜸 말했다.
이미 베일리도 저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아, 그런가?”
픽 웃은 윈터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제 턱을 긁적였다.
그 태연한 모습에 베일리도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뭐, 아마 엘리슨이 잘 처리하겠죠. 전 머리 쓰는 건 잘 못 해서.”
곧 눈을 찡긋한 베일리가 윈터에게 작은 약병이 든 상자를 가리켰다.
“깨어나면 주세요.”
“알겠어.”
엘리슨에게 주문했던 해독제인 모양이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윈터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베일리는 곧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그럼 전 이만.”
상대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치료만 해주고 떠나는 것.
아마 저게 베일리의 최선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윈터도 슬쩍 손만 들어 보일 뿐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곧 사무실에는 윈터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환자만 남았다.
소파에 누운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윈터가 곧 맞은편에 앉아 본격적으로 얼굴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푸석한 백금발, 핏기라곤 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
전체적으로 지독히도 불행한 인형 같은 남자였다.
그리고 윈터는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지?”
대뜸 건네는 말에 남자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아까부터 자는 척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었거든.”
“…….”
그러자 남자가 슬쩍 눈을 떴다.
아까 언뜻 봤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솜사탕처럼 달콤한 분홍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윈터를 바라보았다.
물론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다.
금세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기절한 사람이 그렇게 숨을 크고 빠르게 쉴 리 없으니까. 그리고 속눈썹도 계속 떨렸어.”
“……맙소사.”
“다음부터 남을 속이려면 먼저 관찰부터 해.”
“그, 그럴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며 윈터는 영 난처하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연신 상대의 눈치를 살피고, 자신 없는 듯 시선을 피하는 남자에게서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