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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36/150)

36화

윈터는 며칠 만에 공작가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마누트라 섬에서는 치료와 재활에 집중하며 칼리스타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사실 공작가에서는 딱히 그녀가 반드시 해야 할 만한 일이 없었다.

푹 쉬고 먹고 싶은 건 잔뜩 먹고 구경하고 싶은 건 뭐든 구경하며 여유롭게 지내도 되는 공간에서 윈터는 차근차근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해 정리했다.

그녀가 그중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제니마 상회에 가서 엘리슨과 만나는 것이었다.

“돌아오셨군요.”

“오랜만이야, 엘리슨.”

엘리슨은 윈터를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그동안 메이딜리언을 감당하기 벅찰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의 유일한 목줄이나 다름없는 윈터가 돌아왔으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윈터의 입장에서는 영 이해가 되지 않고 조금은 부담스럽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병은 이제 완전히 괜찮은 겁니까?”

“응. 당연하지.”

엘리슨이 조심스레 물었고, 윈터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8년간 윈터는 아주 가끔 엘리슨을 통해 선물을 보내오는 것 말고는 크게 교류하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그런 것이기도 했지만 굳이 자신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아르카는 알아서 메이의 수족이 되어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도에 오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찾아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거든요.”

엘리슨이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 말에 윈터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그래.”

“그런데 딜런 님은 어디 가셨나요?”

당연히 같이 왔을 거라고 생각한 메이딜리언은 보이지 않고, 데보라만이 윈터의 뒤에서 충견처럼 서서 가까이 오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데보라가 윈터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엘리슨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윈터가 황도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녀에게 더없이 충직해진 데보라가 영 낯설었다.

“아아. 오자마자 뭐 확인할 게 있다고 하더라고.”

엘리슨의 물음에 윈터가 반사적으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인할 거요?”

“응. 우편함을 찾아본다는데?”

그러나 엘리슨은 더 의문인 얼굴이 되었다.

“딜런 님이 굳이 우편함을 찾아보신다고요? 그건 원래 데보라가 하던 일이었는데…….”

이제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데보라를 향했다.

문득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메이딜리언의 말이 떠올랐다.

‘편지를, 어디로 보냈어요?’

‘제니마 상회라.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네요.’

재회가 워낙 당황스러웠던 터라 선물 사건은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때 메이딜리언의 반응을 보면 선물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윈터는 그 내막을 이제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흐응,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걸 이해한 건 비단 윈터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윈터와 바깥을 번갈아 보던 데보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해쓱해졌다.

“디, 딜런 님이 우편함으로 가셨다고요?”

슬쩍 제 손목으로 시선이 향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또 잘라달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윈터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데보라, 곧 메이가 올 거야. 그전에 도망가는 게 낫지 않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슨은 그대로 줄행랑을 치는 데보라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데보라가 그 물건들을 전부 빼돌렸군요?”

“으음, 아마도?”

“죄송합니다. 이 일은 제가 단단히 징계하겠습니다. 상회에서 워낙 오냐오냐 키웠던 애라 제가 주의가 부족했습니다.”

“아냐, 그럴 것 없어.”

데보라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미 뻔히 알았다.

데보라는 고아 출신으로 한타의 수양딸이 되어 아르카에 들어온 마지막 단원이다.

그래서 아르카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고, 덕분에 메이딜리언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났다.

그녀가 나중에 메이딜리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충직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윈터는 데보라를 좀처럼 미워할 수 없었다.

데보라는 자신만큼이나 메이딜리언에게 충직한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보내준 선물은 잘 받았어요. 아가씨.’

‘조만간 제대로 된 답장을 준비할게요.’

과연 메이딜리언이 준비할 답장이 뭘지 기대되기도 하고.

“많이 관대해지셨군요.”

그러나 그 내막을 자세히 알 리가 없는 엘리슨은 또 한 번 감격했다.

어릴 적엔 마냥 영악하고 사악한 어린애였던 윈터가 이제는 타인의 실수마저도 관대하게 감싸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니!

“그보다 엘리슨.”

“예, 아가씨.”

“프르넷 뿌리를 달여서 농축한 약제가 필요해.”

그 말에 엘리슨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제니마 상회는 특이한 약재를 많이 취급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윈터의 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블라디미르 공작가와 처음 거래를 튼 것도 그 구하기 어렵다는 모나 꽃 열매 때문이었으니까.

특히나 독에 민감한 엘리슨이라면 윈터가 요구하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카토피의 독에 중독된 자가 있습니까?”

“맞아.”

저 먼 서부의 사막에서도 10년에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한다는 백사의 독.

그 구하기도 힘든 값비싸고 희귀한 독은 조금씩 복용하다 보면 점차 쇠약해지며 나중에는 자연사로 죽은 것처럼 티가 나지 않는다.

해독은 초기에 프르넷 뿌리를 달여서 만든 약을 마시면 되지만, 워낙 증상이 미비하고 알아차리기 힘들어서 미리 손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엘리슨이라면 분명 잘 알 것이었다.

선대 황제도 이 독으로 죽었다고 의심하고 있을 테니까.

“한 번 한 짓, 두 번이라고 못 하겠어?”

“……설마.”

엘리슨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윈터가 준비하라고 한 해독제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 당장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크게 동요한 엘리슨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막 문을 열 때였다.

콰앙, 하는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으악!”

“꺄아악!”

“무,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폭음에 상회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이 소란에 윈터 또한 엘리슨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신이시여.”

의외였던 것은 엘리슨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 폭음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해쓱한 얼굴로 신을 찾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엘리슨?”

“아, 그게, 저…….”

윈터의 물음에 엘리슨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부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상회 앞 도로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걸 발견한 윈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윈터의 심장이 크게 쿵쿵, 박동하기 시작했다.

“저거, 혹시…….”

“그, 그게요. 아가씨. ……아가씨?”

윈터는 제게 뭐라 말하려는 엘리슨을 지나 빠르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 자욱하던 흙먼지가 걷히고, 대치하듯 서 있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이미 윈터에겐 너무도 익숙한 메이딜리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재수 없는 자식! 한동안 안 보이더니 또 여긴 왜 왔어?”

퉤, 하고 피 섞인 침을 뱉어내는 목소리가 강렬하게 윈터의 가슴에 꽂혔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빨간 머리카락. 선명하게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

늘씬한 키를 자랑하는 미인이 메이딜리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너야말로 아직도 안 죽었네?”

메이딜리언이 서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무, 뭐?”

“척 봐도 객사하기 딱 좋은 성격인데.”

“이익! 당장 그 말 취소 못 해!”

캬아악, 불같이 화를 내는 미인과 얼음장처럼 싸늘한 미남의 대결에 윈터가 입을 틀어막았다.

곧 두 사람은 주변 기물을 다 박살 낼 것처럼 치열하게 싸웠다.

“저, 아가씨. 그러니까 저 애는 으음…….”

어느새 윈터의 곁으로 다가온 엘리슨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녀의 눈에는 지금 윈터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디, 딜런 님과 저 애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아주 둘이 서로 죽이고 싶어 안달인 사이라니까요!”

“원래 그러다가 나중에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고 그러는 거지.”

“……예? 아, 아니 그럴 리는…….”

윈터의 끔찍한 메이딜리언 사랑을 뻔히 아는 엘리슨은 어떻게든 상황을 변명해보려다 말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분명 지금 상황을 단단히 오해한 윈터가 실연의 아픔이나 질투로 범벅인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엘리슨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뭐랄까.

조금 감동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엘리슨, 그런 얘기 몰라?”

“무, 무슨 얘기요?”

“왜 그런 거 있잖아. 어릴 적부터 앙숙 같던 두 사람이 끝내 미운 정이 들며 자라다가 갑자기 서로를 의식하게 되고, 어느 날 그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는 거 말이야!”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잔뜩 들떠 말하는 윈터는 귀여웠다.

그러나 어딘가 광기에 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되게 통속소설 같은 느낌이네요?”

“그래, 바로 그거야!”

엘리슨의 말에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던 윈터는 어느새 차까지 호록호록 마시며 두 사람의 살벌한 전투를 구경했다.

중간중간 맛집이라는 둥, 더 죽일 듯이 싸워야 한다는 둥 중얼거리는 소리는 곁에서 지켜보는 엘리슨을 더욱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윈터는 지금 이 순간을 꽤 오랫동안이나 기다려왔다.

8년 전 제니마 상회에 왔던 그날, 진작 만났어야 하는 인물을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죽어라, 이 망할 놈!”

불꽃처럼 휘날리는 붉은 머리가 화려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먹이 꽂히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그녀의 이름은 칸나.

귀족가의 사생아지만 아직 본인을 천애 고아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아주 어린 나이에 마력을 개화해 본능적으로 사용 방법을 깨닫고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마법 천재.

한 마디로 이 세계의 여자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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