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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34/150)

34화

전혀 뜻밖의 말에 윈터가 와락 미간을 찌푸렸다.

“자결했다고요?”

“그래.”

재차 묻는 말에 공작이 다시 확인까지 해줬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고문실에서 설마 히르칸 혼자 자유롭게 굴러다니다가 접싯물에 코 박고 죽었을 리는 없고.

앞에서 감시하는 사람들도 있는 데다 몸도 꽁꽁 묶여 있었을 인간이 대체 어떻게 자결했단 말인가.

상황을 파악하던 윈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군요?”

블라디미르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그래. 아직 배후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노리는 거야 뻔하지.”

윈터는 그제야 공작이 연회를 열겠다며 살기등등했던 진짜 이유를 알았다.

감히 넘볼 수조차 없게 하겠다 선언하던 말도.

명실공히 돌아온 후계자를 전면으로 내세워 공작가에 은근히 퍼져 있던 불안을 단숨에 잠재우겠다는 뜻이었다.

“배후를 찾는 건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기왕 칼리스타의 주인이라는 걸 밝힌 김에, 윈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네가?”

“네. 감히 제 자리를 넘보는 무뢰배가 누군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어야 이 블라디미르 가문의 후계자답다고 할 수 있겠죠.”

그림도 그게 더 좋을 것이다.

윈터가 불온한 싹을 찾아내 스스로 후계자의 자리를 공고히 한다면 공작의 그늘 아래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있을 테니까.

겸사겸사 혹시 모를 다른 도전자의 기세도 완전히 꺾어버리면 좋고.

“얼마 안 걸릴 거예요.”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매는 블라디미르 공작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의 방에서 나온 윈터는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너, 너……!”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허옇게 질려서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칙칙한 더티블론드 머리카락과 노란색이 많이 감도는 금빛 눈동자.

비죽 말려 올라간 얇은 입술이 안 그래도 야비한 인상을 한층 더 족제비처럼 돋보이게 했다.

“이런 못생긴 애를 내가 어디서 봤지?”

“뭐, 뭐라고?”

“아, 미안. 내가 지금 소리 내서 말했나?”

말과는 달리 미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무성의한 사과에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익, 네가 감히!”

척 봐도 고압적인 언사에 윈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감히라니. 공작가에서 내게 그딴 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 그건……!”

“너, 어디서 뭐 하는 놈이야?”

윈터의 말에 허겁지겁 변명을 주워섬기던 남자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그가 되물었다.

“하, 나를 모른다고?”

“응. 모르겠는데.”

“역시. 예나 지금이나 안하무인인 건 여전하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꼴을 보아하니 잘하면 곧 혀도 쯧쯧 찰 것 같았다.

“말만 들어보면 날 되게 잘 아는 것 같은데.”

“당연하지.”

“그래서 너 누구냐니까?”

재차 이름을 묻는 윈터의 말에 남자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지더니 이제는 아예 검게 보일 정도였다.

아무래도 윈터가 제 이름을 모르는 게 퍽 민망하고 열받는 모양이다.

정작 여러 번 이름을 물어본 윈터에게는 한 점 악의라곤 느껴지지 않아 더욱더.

윈터는 그저 아무리 물어봐도 자기 이름을 얘기해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길을 막고 비켜줄 생각도 없는 이 남자가 짜증스럽기만 했다.

“……트.”

마침내 남자가 아주 개미만 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말했다.

“응? 뭐라고?”

“알버트 블라디미르라고!”

버럭 소리치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복도에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윈터가 픽 웃으며 물었다.

“원래 이렇게 자기소개를 좀 크게 하는 편이야?”

“이익!”

문제는 제 이름을 거창하게 밝힌 이 남자가 누군지, 윈터는 아직도 모른다는 거였다.

알버트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어렴풋이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이름보다도 이 녀석의 얼굴과 말투가 왜 이다지도 익숙한지.

그나마 추측할 만한 것은, 감히 어울리지도 않는 블라디미르의 성을 받았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녀의 사촌 중 하나라는 의미였다.

“……아.”

흐릿하던 기억을 더듬어가던 윈터가 드디어 제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는 사촌 하나를 떠올렸다.

‘이 거지 같은 게, 어디 그 더러운 손을 대! 당장 핥아서라도 닦아! 닦으란 말이야!’

‘윈터! 이 미친개가 진짜!’

자신을 미친개라 부르며 부리나케 도망치던 뒷모습.

그동안 나이를 얼굴로만 먹었는지 너무 노숙해져서 전혀 못 알아봤지만 묘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포동포동한 볼살과 반들반들 넘긴 머리카락이 눈앞의 남자와 겹쳤다.

“그게 너였구나?”

“흥, 이제야 기억하다니.”

팽 코웃음을 친 알버트가 고개를 돌렸다.

뺨이 씰룩거리는 걸 보니 윈터의 기억 속에 제가 남아 있다는 것이 꽤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윈터가 뭐 때문에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지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래. 그때 도망치는 바람에 다 못 때렸던 그놈이지?”

“무, 뭐?”

우습게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인 듯 알버트가 흠칫 놀랐다.

“꽤 아쉬웠는데 말이야.”

입맛까지 다시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얼굴은 더없이 진심처럼 보였다.

덕분에 어린 시절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알버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러나 윈터야말로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건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은 어릴 적 툭하면 사람을 피해 숨어다니던 메이딜리언을 데려다가 괴롭히고 윽박지르곤 했으니까.

아주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골고루 저지른 인간 말종이었지.

솔직히 윈터는 제가 때린 것보다 알버트가 메이딜리언을 괴롭힌 걸 더 먼저 기억해냈다.

“나야말로 네게 유감이 많아.”

성큼 윈터에게 다가선 알버트가 중얼거렸다.

얼마나 열을 받은 건지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 때문에 그 깡촌에 처박혀 있던 걸 생각만 하면…….”

알버트의 눈이 그때를 회상하듯 이글이글 타올랐다.

당시 윈터가 마력 폭주를 일으키는 바람에 마력을 개화 중인 어린아이는 그 누구도 수도의 공작가 저택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매사 윈터와 부딪히며 트러블을 일으키기 일쑤였던 알버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공작의 눈에 걸려들었다.

결국 그는 찍소리도 못하고 차디찬 북부 공작가 영지로 내려가 한참을 지내야 했다.

“그래봤자 고작 몇 달이었으면서 유난은.”

피식 비웃은 윈터가 이죽거렸다.

자신이 섬으로 떠나자마자 슬슬 공작의 눈치를 보던 리비우스 남작, 그러니까 알버트의 아버지가 그를 수도로 올려보냈기 때문이다.

“너…….”

보기 좋게 무시당한 알버트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어린 시절 하도 당한 것이 많아 처음에 좀 쫄았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윈터보다 키도 한참 크고 건장한 사내가 되었다.

이런 비리비리한 여자애 정도는 한 손으로도 가볍게 짓눌러 버릴 수 있는 강건한 남자.

금세 어쭙잖은 자신감이 차오른 알버트가 턱을 치켜들고는 말했다.

“얼마 못 가 죽는다고 유난이더니, 용케도 살아났구나.”

그러고는 그가 허리를 숙여 낮게 속삭였다.

“그대로 섬에 처박혀서 죽을 것이지. 목숨 한번 질기다니까.”

독사처럼 쉭쉭 이빨을 드러낸 날카로운 말에도 윈터는 눈만 끔벅였다.

아무래도 이놈은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윈터는 무려 그 어린 시절에 공작가에서도 망나니에 미친개, 손목 수집가로 불리던 사악한 꼬맹이였다.

“칭찬 고마워.”

“……하, 칭찬 아니거든? 애초에 다 나았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희멀건 윈터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알버트가 빈정댔다.

놀랍게도 그것이 매우 진실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원인을 해결하지도, 완치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윈터는 동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인 블라디미르 공작도 메이딜리언도 아무렇지 않게 속여넘긴 그녀였다.

무리해서 마력을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봉인을 계속 보수해주면서 기대 수명보다는 더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을 테니까.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낯빛으로 윈터가 싱긋 웃었다.

“궁금하면 한번 붙어볼래?”

윈터가 그렇게 물었을 때, 알버트는 거기서 멈춰야 했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러기엔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 누,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알버트가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 곧 그가 그대로 손을 올렸다.

눈빛만큼이나 뜨거운 열기가 마력을 따라 뭉치는 걸 보며 윈터가 씨익 웃었다.

“좋아. 오랜만에 아주 재밌겠는걸?”

그녀의 시선이 빠르게 알버트의 빈틈을 훑었다.

가장 자주 쓰는 빙결 계열 마법을 이용해 어디부터 얼려줄까, 기대가 가득 차올랐다.

허리춤에서 아이셀의 마도구를 꺼내 그대로 알버트에게 겨눴다.

그걸 본 알버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뭐…….”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제가 꺼낸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알버트의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손이 그대로 그가 만들어낸 화염 계열 마법을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뭐, 뭐야!”

당황한 알버트가 뒤를 돌려고 하는데 상대가 한 발 더 빨랐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알버트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켁, 쿨럭!”

팔로 가볍게 알버트의 목을 누르고 있는 남자는 흰색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다.

“메…… 딜런!”

반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윈터가 멈칫하고는 얼른 가명으로 바꿨다.

“너, 비밀 호위대가, 왜…….”

목이 눌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알버트가 헐떡이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피가 잔뜩 몰려 아까 윈터와 말다툼을 할 때만큼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아가씨를 호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감한 녹색 눈동자가 알버트를 내려다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 무시가 가득한 시선에 알버트는 지독한 모멸감을 느꼈다.

마도구를 집어넣은 윈터는 황급히 두 사람에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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