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 *
파란만장하던 마차 여행을 마치고, 윈터 일행은 드디어 공작성에 입성했다.
“으음.”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윈터가 크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난 8년간 바다 냄새 물씬 나는 데에만 있다가 다시 사람들로 북적대는 황도로 돌아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내리시죠, 아가씨.”
마침내 마차의 문이 열리고,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 순간,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윈터는 잘게 어깨를 떨었다.
공작가를 떠나 섬에서 지냈던 길고도 무료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드디어 메이딜리언의 곁에 서 있을 수 있게 되다니.
오랫동안 상상만 해왔던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아가씨, 저희는 우선 히르칸을 데려가겠습니다.”
멍하니 공작성을 올려다보는 윈터에게 메이딜리언이 다가와 말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윈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는 처음 윈터를 만났을 때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다. 데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짧은 인사를 건넨 두 사람은 비실비실한 히르칸을 끌고 빠르게 사라졌다.
며칠째 최소한의 물과 음식만 주고 끌고 온 터라 히르칸의 꼴은 엉망이었다.
“윈터!”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본성의 문이 열리고 양팔을 활짝 펼친 블라디미르 공작이 보였다.
“어머니!”
그리웠던 얼굴에 활짝 미소 지은 윈터가 한달음에 달려가 블라디미르 공작을 끌어안았다.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그새 몰라보게 장성하셨습니다!”
앞에 나와 있던 공작성의 사용인들도 앞다투어 환영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품에 안아보는구나, 내 딸.”
온 힘을 다해 윈터를 꼭 끌어안았던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릴 수 있다는 아이셀의 말만 믿고, 아주 작은 가능성에 모든 걸 걸었던 그녀였다.
허리에 간신히 닿을 만큼 작고 야위었던 딸이 어느덧 훌쩍 자라 저와 시선을 맞추는 것을 보니 감격스러운 마음이 컸다.
그 기분은 온전히 윈터에게도 전해졌다.
“다녀왔습니다.”
애써 울음을 꾹 눌러 참으며 윈터가 말했다.
“그래, 안으로 들어가자.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구나.”
두 모녀는 손을 꼭 잡고 공작성 안으로 들어갔다.
쫑알쫑알, 섬에서 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열심히 이야기하던 윈터는 뒤따라오던 사용인들이 사라지자 금세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제가 보낸 서신은 보셨죠?”
“당연하지.”
블라디미르 공작의 얼굴 또한 어느새 차게 가라앉아 있었다.
“필요한 건 모두 준비해뒀다.”
픽, 가볍게 웃은 공작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과연 쥐새끼가 누구일지 무척 궁금하구나.”
살벌한 공작의 말에 윈터는 히르칸에게 짧은 애도를 표했다.
아마 지금쯤 고문실에 끌려가 있겠지.
“드디어 오셨군요, 아가씨.”
윈터의 방 앞에는 나일라가 서 있었다.
그녀가 바로 공작이 말한 ‘필요한 준비’를 한 장본인이겠지.
“오랜만, 나일라.”
윈터도 반갑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평소엔 딱히 표정이랄 게 없는 나일라도 이번만큼은 화사하게 웃었다.
“키가 저만큼 크실 줄은 몰랐는데요.”
“우유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했거든.”
제 팔뚝을 불끈, 하며 윈터가 있지도 않은 알통을 자랑했다. 희멀건 치즈 같은 팔을 보며 나일라는 그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우선 쉬려무나.”
“네, 그럴게요.”
친히 윈터를 방 앞까지 데려다준 공작이 짧게 웃고는 나일라와 함께 사라졌다.
두 사람은 아마 히르칸이 있는 고문실로 향했겠지.
“저런, 가엽게도.”
맘에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윈터는 가져온 짐을 방에 풀었다.
오는 동안 줄곧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피곤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어린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방의 전경에 마법처럼 몸이 노곤해졌다.
오랜만에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기분 좋게 목욕을 끝낸 윈터는 그대로 아늑한 침대에 몸을 파묻혔다.
“나 조금 이따가 깨워줄래?”
“네, 아가씨.”
하녀에게 깨워달라고 말한 윈터가 금세 가물가물해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짧은 낮잠을 마친 윈터가 깨어났다.
오는 내내 마력도 체력도 소모도 심했던 터라 잠깐 자고 났어도 몸은 여전히 무겁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마냥 늘어져 있을 수는 없는 법.
윈터는 우선 오랜만에 돌아온 공작성을 가볍게 돌아보기로 했다.
“브렌다!”
그런 그녀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공작가 소유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브렌다였다.
분명 헤어지기 전에도 골골댔던 그녀가 여전히 사서인 것에 윈터는 순수하게 놀라움을 표현했다.
“아직도 살아 있었어?”
그 말에 브렌다가 킬킬 웃었다.
“여전하시군요, 아가씨.”
윈터가 에르퀼에게도 어려움 없이 다가가 친구처럼 지낼 수 있었던 건 아마 8할이 브렌다의 공일 것이다.
어릴 적부터 나이도 지위도 상관없이 그저 격의 없는 말동무 사이였으니까.
그런 브렌다의 뒤를 졸졸 따라 복도를 걷던 윈터가 슬쩍 물었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뭐야?”
“흐음.”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하던 브렌다가 은밀히 속삭였다.
“미남의 정기랄까요?”
“뭐어?”
“홀홀홀.”
눈을 휘어 웃던 브렌다는 도서관 안으로 쏙 사라졌다.
그때, 상상도 못 했던 대답에 입을 떡 벌린 윈터의 곁으로 누군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제가 드릴까요?”
“으악!”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던 윈터가 기겁해서는 벽으로 바짝 붙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토끼 가면을 벗자 생글생글 웃는 얄미운 얼굴이 드러났다.
자신을 놀라게 한 것이 메이딜리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윈터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너, 너 언제 온 거야?”
“좀 전에요.”
두 사람은 곧 나란히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다시 가면을 쓰고 비밀 호위대로 돌아간 메이딜리언이 그녀의 뒤에서 따라 걷고 있는 것이었지만.
“안녕하세요, 아가씨.”
“응, 안녕.”
막 그녀를 발견한 하녀들의 인사를 받아준 윈터의 곁으로 불쑥 메이딜리언이 거리를 좁혔다.
“그나저나, 정말로 안 필요하세요?”
“어? 뭐가?”
“미남의 정…….”
“피, 필요 없거든!”
무심결에 되물었던 윈터는 후회하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윈터가 얼른 메이딜리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누구 들은 사람은 없는지 얼른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까 마주친 하녀들은 벌써 저 멀리에 있었다.
“얘가 진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대체 브렌다와 한 얘기는 언제 들었고, 귀는 또 왜 이렇게 밝은 건지.
울컥한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팔을 찰싹찰싹 쳤다. 그래봤자 제 손이 더 아플 뿐이었지만.
“되게 필요해 보이시던데.”
“아니거든?”
날카롭게 받아친 윈터는 예쁘게 휘어진 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가면의 마법에 의해 색이 변조된 터라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가늘게 눈을 뜨고 메이딜리언을 노려보던 윈터가 슬쩍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흐응, 본인이 꽤 미남이라고 생각하나 봐?”
일부러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메이딜리언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그는 그저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에요? 아가씨가 제 얼굴 좋아하잖아요. 그리고 몸도 좋…….”
“너, 이제 그만 말해.”
어차피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이길 수가 없었다.
다시금 얄미운 입술을 틀어막던 윈터는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이게 뭐야…….”
“뭐가요?”
“내 작고 귀여운 메이는 어디 간 거야! 돌려줘!”
제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드는 윈터를 보면서도 메이딜리언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나름 예쁘게 컸는데. 서운하네요, 아가씨.”
“맙소사, 이렇게 느물거릴 수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윈터가 절망했다.
곧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윈터의 마음에 미약한 안도감이 스몄다.
왜인지 모르지만, 비로소 정말로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 * *
밤이 되었다.
윈터 방의 발코니가 소리 없이 열렸다.
“다행히 리어트가 준비는 잘해놨나 보네.”
몰래 챙겨두었던 빵을 잘 조각내어 바닥에 뿌리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작은 들쥐들이 모여 있었다.
이 녀석들이야말로 칼리스타의 빠른 성공을 이룩한 주역들이자 윈터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아, 그동안 무슨 소식들이 있었나 한 번 털어놔 볼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전생의 격언을 윈터는 잊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수인족들과 힘을 합쳐 정보 길드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을 때, 가장 먼저 이것을 떠올렸다.
수인족들은 제 권속으로 동물들을 다룰 수 있었다.
비둘기나 들쥐, 고양이와 뱀, 심지어 말까지.
어디에나 있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그들이 윈터의 눈과 귀가 되어 주었다.
[3구역 창고에 먹을 거 많음.]
막 들쥐의 등에 매달린 작은 쪽지 하나를 펼쳐 본 윈터가 멈칫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빵 부스러기를 꼭 쥐고 있는 쥐를 응시했다.
“신입이니?”
그러자 쥐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그 쥐를 조종하고 있는 수인족의 행동이긴 했다.
동물들이 단편적으로 모아온 정보들을 정리해서 보내면 윈터가 그 내용을 취합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예측하고 관리하곤 했다.
“음, 좋아. 아주 잘했어.”
신입이라는 말에 윈터는 너그럽게 칭찬해주었다.
제국의 황도 폴렌슈타인에는 윈터가 지정한 몇 가지 포인트 구역이 있었다.
그중 3구역은 에른스트 후작가였다.
“먹을 거라. 군량미를 모으고 있는 건가?”
동물들에게 상황에 대한 분석이나 판단을 맡길 수는 없었지만, 아주 작은 정보로도 윈터는 여러 방면에서 생각을 조합하고 흐름을 읽었다.
“후작도 움직이기 시작했군.”
홀로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다음 쪽지를 펼쳤다.
[1구역 매우 위험. 친구 마니 주거써.]
“…….”
이번에 리어트에게 인원을 많이 늘리라고 이야기해놓긴 했지만, 아직 교육은 덜 된 모양이었다.
글씨체도 철자도 엉망인 쪽지를 읽느라 윈터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물론 비단 글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용 자체도 심각했으니까.
“1구역이라.”
1구역은 황궁, 그중에서도 원작의 남자주인공인 아스터가 있는 곳을 의미했다.
“아스터가 위험하다.”
아스터는 현재 제국의 유일한 황자이자 메이딜리언의 형이었다.
그는 제 외삼촌이자 섭정 황제인 크비누스에 의해 매번 독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아마 쥐들이 가져온 ‘친구들이 많이 죽었다’라는 정보도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