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메이딜리언의 말이 끝나고,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윈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살수들이었을 줄이야.
“아니, 누가? 대체 왜……?”
“글쎄요. 아마도 아가씨가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자인가 봅니다.”
과연 그게 누구일까.
두 사람은 추리를 시작했다.
윈터가 가장 먼저 의심한 것은 전서구였다.
“중간에 누가 가로챈 건 아닐까?”
“그렇다면 전서구가 안 온 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각하께서 기사들을 보냈을 겁니다.”
“아, 그러네.”
첫 번째 가설은 바로 폐기됐다.
처음엔 끊임없이 덤벼들던 산적들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산적이든 살수든 비밀 호위대나 윈터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전혀 의심을 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애초에 블라디미르 공작이 잠잠한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딸 사랑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바로 블라디미르 공작이었으니까.
“그럼 혹시 전서구가 가져간 서신을 누군가…….”
거기까지 말한 윈터가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훔쳐봤을 리가 없구나.”
두 번째 가설은 말하던 도중에 폐기해버렸다.
비밀 호위대가 공작에게 보낸 서신을 감히 누가 손댈 수 있단 말인가.
이로써 현재 블라디미르 공작은 윈터가 처한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게 확실해졌다.
만약 공작이 지금 상황을 모두 알고 있었다면…….
“각하라면 공작가 기사들을 전부 보내고도 남으셨을 겁니다.”
“그렇겠지.”
윈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렇다는 건…….”
윈터 일행이 언제,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정확히 알고 있고, 산적에게 습격당하더라도 그런 상황을 적절히 숨겨 보고할 수 있는 자.
전서구를 사용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가짜 보고로 얼마든지 공작의 눈을 가릴 수 있는 자.
“……히르칸.”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나온 이름에 지레 놀란 윈터가 흠칫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이미 메이딜리언 또한 같은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는 애써 치밀어오르는 한숨을 내리눌렀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저는 히르칸이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뜻밖이십니다. 이렇게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실 거라곤 예상 못 했습니다.’
‘피하십시오, 아가씨!’
절벽에서 추락하기 전 들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겉으론 전혀 안 그래 보였는데.”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아저씨라고 생각했던 윈터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너랑도 되게 잘 아는 사이 같았어.”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불쾌한 듯 와락 인상을 썼다.
“이번 임무로 처음 같이 일해보는걸요.”
“……그래?”
우선 히르칸이 용의선상에 올랐는데, 그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골몰하던 윈터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메이.”
“네, 아가씨.”
“근데 정말로 히르칸이 이번 일의 주모자면, 데보라가 위험한 거 아니야?”
* * *
“젠장, 젠장, 젠장!”
데보라가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처음엔 그저 윈터가 제 무력함을 깨닫고 알아서 물러났으면 해서 벌인 일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아가씨를 돕는다며 얼쩡거리다가 마도구를 슬쩍 하는 건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물론,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서 빼돌린 마도구는 데보라의 허리춤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만약에라도 정말 위기가 찾아온다면 은근슬쩍 떨어진 걸 주웠다며 다시 돌려주거나, 여차하면 제가 달려가 멋지게 윈터를 구해줄까 했으니까.
자신의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본다면 알게 모르게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윈터의 기세를 그대로 눌러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윈터는 데보라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다.
마력 증폭기인 줄 알았던 마도구를 쓰지 않고도, 기존에 쓰인 양을 훨씬 웃도는 마력을 뿜어내며 산적들을 단번에 몰살시킨 것이었다.
아직도 그 눈빛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자비 없이 적들을 쓸어버리는 싸늘한 눈빛이 그대로 데보라의 심장을 저격했다.
아무래도 반한 것 같았다.
‘무, 무슨! 그런 거 아니야!’
자연스레 이어진 생각에 데보라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자꾸만 바닥에 얼음으로 된 창을 내리꽂는 윈터의 모습이 반복해서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도 멋졌다. 반한 게 확실했다.
‘아니라니까!’
무형의 적과 싸우는 기분으로 데보라가 씩씩거렸다.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반했니 뭐니 할 때가 아니었다.
가볍게 기만 눌러주려던 아가씨는 오히려 데보라의 기를 잔뜩 눌러주고 불의의 사고에 휘말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데보라가 미래의 주군으로 점찍어 놓은 메이딜리언과 함께.
게다가 산적들과 싸우다가 어디에 흘리기라도 한 건지, 슬쩍 빼돌렸던 윈터의 마도구도 사라진 상태였다.
‘망했다.’
데보라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 건 하나도 없었다.
전부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불안감이 역력한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꽁꽁 얼어 그대로 저세상으로 간 산적들 사이를 누비며 데보라는 열심히 잃어버린 마도구를 찾아다녔다.
이 와중에도 히르칸은 전서구를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윈터가 실종된 상황을 보고하고 지원군을 요청하려는 모양이었다.
히르칸도 그렇고 데보라도 추적 전문은 아니었으니 확실히 사람이 더 필요하긴 했다.
“난 이제 죽었다, 죽었어.”
아가씨를 제대로 모시지도 못한 데다, 절벽으로 떨어져 실종되기까지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블라디미르 공작의 눈빛을 떠올린 데보라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니, 사실 블라디미르 공작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호위대장인 나일라 귀에만 이 사실이 들어가더라도 데보라는 당장에 목과 몸이 분리되겠지.
제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무모하고 황당한 일이었는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한 데보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제발 마도구만이라도 찾게 해주세요!”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던 데보라의 기도를 누군가 들은 것 같았다.
두 대의 마차 중 아가씨의 짐과 패물 등이 들어 있는 짐마차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마도구를 발견한 것이었다.
“찾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마도구를 찾아냈다는 기쁨도 잠시.
데보라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분명 제 허리춤에 있어야 할 마도구인데, 대체 이게 왜 여기 있단 말인가.
“발이라도 달렸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마도구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데보라의 시선이 슬슬 마도구가 있던 짐 쪽으로 향했다.
“……이거, 히르칸 아저씨 건데?”
히르칸의 짐 속에, 윈터의 마도구가 들어 있었다.
심지어 이 마도구는 이미 데보라가 한 번 빼돌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가씨는 실종되었다.
뚝뚝 끊기는 사실들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혼란스럽게 떠다녔다.
비록 머리는 그리 좋지 않아도 데보라의 감만은 매우 뛰어났다.
아무래도 지금 이 상황은, 제게 지독히도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거기서 뭐 해?”
“……!”
갑작스러운 기척에 데보라가 휙 고개를 돌렸다.
마차 입구를 막고 선 히르칸이었다.
“아, 뭐 좀, 찾을 게 있어서…….”
슬쩍 다시 허리춤에 윈터의 마도구를 찔러넣고 데보라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보던 히르칸이 픽 웃더니 비켜섰다.
“곧 수색대가 도착할 거야. 얼른 내려.”
“어, 으응.”
고개를 끄덕인 데보라가 느릿느릿 마차에서 내렸다.
사방이 고요했다. 침묵은 무거웠다.
어느새 배어 나온 식은땀이 느릿느릿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눈을 깜박인 순간, 챙! 하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검을 막아낸 데보라가 눈을 부릅떴다.
“와, 제법 감이 좋은데?”
히르칸이 픽 웃으며 그대로 체중을 실어 검을 내리눌렀다.
“미쳤어?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안타깝게도 산적들 때문에 몰살당하는 상황이지.”
“하, 누가?”
“나 빼고 전부.”
얼굴은 사람 좋은 미소 그대로인데, 휘둘러지는 검에는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어놓을 것처럼 살기가 등등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검을 간신히 막아내며 데보라는 잽싸게 발을 놀렸다.
이리저리 바닥을 구르면서도 끝내 치명타를 피해내는 그녀를 보며 히르칸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대단하네, 데보라. 근데 이제 힘 그만 빼고 순순히 잡혀주는 게 어때?”
“이익, 너 같으면 그렇게 하겠냐!”
바락 외친 데보라가 제 왼쪽 어깨를 꾹 눌렀다.
좀 전에 크게 베인 곳이었다.
“……젠장. 어쩐지 운이 더럽게 없더라니.”
여기서 이렇게 죽을 운명이었나 보다.
물론 아무리 수세에 몰려 있다고 하더라도 히르칸에게 얌전히 죽어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목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이빨 하나는 예쁘게 박아줘야지.
데보라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하!”
짧은 기합과 함께 데보라가 자리를 박차고 날아들었다.
작고 가벼운 몸을 이용한 유연한 검술은 마치 곡예와 같았다.
묵직한 힘을 실어 밀려드는 공격을 흘려낸 데보라가 빠르게 반격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누가 우세한지는 금세 판가름이 났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데보라가 앞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검으로 바닥을 짚은 채 간신히 서 있는 반면, 히르칸은 지친 기색은 역력해도 두 발로 서 있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정말 성가시게 하네.”
죽을 듯하면서도 귀신같이 치명상은 피한 덕분에, 데보라는 온몸이 피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멀쩡했다.
예정보다 늦어지는 일정에 히르칸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이제 그만 끝내자, 데보라.”
“누구, 맘대로…….”
바득바득 이를 갈며 투지를 불태우던 데보라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히르칸의 손에 들린 마력 폭탄 때문이었다.
“후우, 내가 이것까지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거라면 널 형체도 없이 짓이겨줄 거다.”
휙, 폭탄 겉에 붙어 있던 봉인 주술을 떼어낸 히르칸이 그걸 그대로 데보라에게 던졌다.
곧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고, 지축이 흔들렸다.
자욱하게 퍼지는 흙먼지 너머를 가늠하며 히르칸이 절대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해치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