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피하십시오, 아가씨!”
히르칸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윈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거의 절벽 끝에 있던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쟤들 왜 이쪽으로 오는 것 같…….
“……지가 아니라 진짜 여기로 오잖아!”
그대로 뒤로 달려 도망치려던 윈터는 코앞의 낭떠러지에 욕을 짓씹었다.
“젠장, 이거 뭐 어떻게 해야…….”
그때 윈터가 깔아둔 얼음에 휘청한 말들이 그대로 미끄러졌다.
이대로 부딪힌다면 추락하든 추락하지 않든 어디 한군데 부러지기라도 하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윈터가 뭔가를 어떻게 해보기도 전이었다.
휙, 자신을 감싼 누군가와 함께 그녀는 아래로 추락했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뜨자 겨울을 형상화한 것 같은 남자가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다.
윈터가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메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메이딜리언이 하핫, 기분 좋게 웃었다.
“아가씨, 이대로 같이 떨어져 죽어도 전 좋을 것 같아요.”
해사한 얼굴은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떨어져 죽는다는 말에 윈터가 기겁하며 외쳤다.
“무슨 개소리야!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렇지만 이대로면 저기에 부딪혀서 뼈가 다 으스러질 것 같은데요?”
태평한 소리에 윈터의 속이 뒤집혔다.
메이딜리언이 가리키는 곳에는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아래로 은근히 발을 디딜 법한 좁은 평지 같은 것도 보였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작게 중얼거린 윈터가 이를 악물었다.
몸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의 말대로 이대로 부딪히면 머리가 깨져 죽고 말겠지.
간신히 만난 최애와 동반 추락사라니. 누가 시켜준다고 해도 사양이었다.
“메이, 나 꽉 잡아.”
그렇게 말한 윈터가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짙은 금빛의 안광이 맴돌았다.
앞으로 휙 뻗은 윈터의 손에 빠르게 마력이 맺히고, 곧 그대로 바람이 되어 두 사람을 감쌌다.
덕분에 두 사람은 둥실 떠올랐다.
여전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건 맞지만,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대로 천천히 내려가기만 한다면 추락이 아니라 착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문제는, 워낙 다급하게 아무렇게나 만든 마력이라 영 허술했다는 것이었다.
“어어?”
불안정한 마력이 휘청하는 사이 그대로 아래로 쏘아졌다.
날카로운 바람은 두 사람이 디딜 만한 바위와 좁은 평지까지 모조리 날려버렸다.
“와우, 깔끔한데요?”
메이딜리언이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허공에서 같이 떨어지는 중만 아니었어도 한 대는 때려줬을 텐데.
윈터는 위기감이라곤 없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젠장.”
그런 윈터의 시야에 빠르게 흐르는 계곡물이 보였다.
메이딜리언도 그걸 봤는지 윈터의 허리를 단단히 잡으며 속삭였다.
“아가씨, 수영 잘해요?”
아무래도 물 위로 떨어질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예상대로, 그들은 바람의 마력에 감싸인 채 그대로 계곡물에 풍덩 빠졌다.
바람과 물 덕분에 충격의 대부분은 상쇄됐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계곡의 물살이 생각보다 거셌다.
“푸하, 메이! 괜찮아?”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윈터는 메이딜리언부터 찾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 싸늘한 계곡물에 금세 이가 덜덜 떨렸다.
“네! 아가씨도 괜찮…… 아가씨? 아가씨!”
저를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던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빠른 유속을 이기지 못하고 윈터가 그대로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마법이라도 쓰려고 했지만 급격한 체력 소모로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윈터는 그대로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윈터!”
* * *
“안 되겠어. 이번에도 실패야.”
무거운 몸을 일으킨 윈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종 약물이 담긴 병과 천장에 닿을 듯 가득 쌓인 종이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무수한 수식들.
“우욱.”
윈터가 메슥거리는 속에 그대로 입에 있는 것들을 토해냈다.
새빨간 피들이 점점이 떨어지며 그녀의 오른발을 적셨다.
적잖이 내상을 입었는지 속이 뒤집히며 화끈거렸다.
와중에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대체 뭐가 문제죠, 스승님?”
“……글쎄.”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선 윈터를 보며 에르퀼과 아이셀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윈터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잿빛 물약 위로 비치는 얼굴은 잔뜩 야위어 볼썽사나웠다.
겉모습만으로 짐작해 보자면 아마 마누트라 섬으로 온 지 3년쯤 됐을 시기다.
처음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실험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며 모든 고통을 감내했던 윈터지만 실험은 매일, 매번 다양한 방법으로 실패하고 있었다.
당시의 윈터는 그만, 이 모든 쓸모없는 실험을 포기하고 싶었다.
“이제 그만해.”
고통으로 푸르게 물든 입술이 간신히 발음했다.
그러자 에르퀼과 아이셀이 동시에 윈터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니, 꼬마야?”
“이제 그만하라고. 어차피 나는 죽을 운명이고 우리 중 누구도 그걸 바꿀 수는 없어.”
신경질적인 얼굴이 단언했다.
와락 표정을 구긴 아이셀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에르퀼이 그녀를 말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
에르퀼의 물음에 윈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나는 황도로 돌아가야 해.”
“어째서?”
“거기에 내가 정말로 운명을 바꿔주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
“어리석은 것. 그러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에르퀼의 시선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경고처럼 건네진 말에도 윈터는 그저 비죽 웃을 뿐이었다.
“상관없어. 그건 이미 오래전에 각오한 일이니까.”
고작 죽음 같은 게 두려울 리 없었다.
그런 윈터를 유심히 바라보던 에르퀼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떠하냐?”
고민 끝에 에르퀼이 제안한 것은 윈터의 심장을 봉인하는 것이었다.
잔에 가득 담긴 물이 언제든 넘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윈터의 몸은 아슬아슬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거라면 봉인이 버티는 한 죽지는 않겠지.”
열두 개의 봉인진 전부를 윈터의 몸에 새긴 에르퀼이 말했다.
노인의 잿빛 머리카락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명심해라. 이 봉인은 절대 무한하지 않아.”
번뜩이는 눈빛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맑고 또렷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현자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얼굴은 지독히도 어렸다.
동시에 어느 예언에서처럼, 검은 머리에 금빛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네가 하려는 일은 결국 봉인을 느슨하게 만들고, 너의 숨통을 조여올 것이다.”
두려움 하나 없이, 윈터가 활짝 웃었다.
고통을 감내하느라 짓이겨진 입술이 엉망이었으나 그저 천진하기 짝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 고마워, 할머니!”
천하의 대현자를 스스럼없이 할머니라고 부르는 어린 꼬마.
그로부터 얼마 후, 그 꼬마의 손에서 칼리스타라는 길드가 탄생했다.
* * *
“……헉!”
오랜 꿈속을 헤매다 깨어난 윈터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는 버릇처럼 제 심장을 꾹 눌러 보았다. 정신을 잃었다 다시 일어나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보통 사람보다 느리게 뛰는 심장은 다행히 고요했다.
열두 개의 봉인도 여전히 건재했다.
“하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윈터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둑어둑한 동굴. 벽에 그림자를 남기며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
물에 빠지면서 푹 젖었을 셔츠는 어느새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뭐야. 습기에 강하다더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나 보네.”
심술부리려고 눈을 반짝이던 데보라를 떠올리며 윈터가 픽 웃었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메이딜리언에게 향했다.
속눈썹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옅은 숨소리가 들린다.
어릴 때와 똑같이 얌전히 잠들어 있는 모습에 윈터는 웃음을 삼켰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킨 그녀가 메이딜리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잔뜩 숨죽인 윈터가 메이딜리언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그때였다. 메이딜리언의 몸이 스르르 옆으로 기울었다.
“어어.”
당황한 윈터가 얼른 메이딜리언을 붙잡았다.
어느새 메이딜리언은 그런 그녀의 무릎을 베고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나 참.”
메이딜리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윈터가 비식 웃었다.
그런데 그녀의 손길이 일순 그대로 멎었다.
손끝이 닿은 곳마다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너무 높았다.
“……메이?”
혹시나 해서 제대로 짚어본 이마에 열이 잔뜩 올라 있었다.
“메이!”
“……으음.”
말 그대로 펄펄 끓는 체온에 당황한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작게 신음만 할 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했다.
“메이, 일어나 봐. 너 이마가, 이마가 불덩이야. 메이, 괜찮아?”
윈터가 여러 번 깨우자 다행히 메이딜리언이 눈을 떴다.
“……아가씨? 윽…….”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던 메이딜리언이 비틀거렸다.
평소와 달리 일그러진 얼굴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힘없이 쓰러지는 메이딜리언을 붙잡은 윈터가 황급히 물었다.
“너 괜찮아? 어디 아파? 다친 거야? 어, 어디 다친 거야? 팔? 어깨?”
당황한 윈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릴 때는 메이딜리언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으면 다 제가 혼쭐을 내주곤 했는데.
이번에 메이딜리언을 다치게 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윈터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길래 왜 거기서 날 구했어? 괜히, 괜히 너만…….”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윈터가 제 입술을 사리물었다. 코가 찡해졌다.
울먹이며 말을 내뱉는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은 메이딜리언이었다.
“아가씨 혼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느릿느릿 이어지는 작은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윈터의 몸이 점점 메이딜리언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이런 건 그냥, 자면 나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물살에 휩쓸리면서 원래 있던 곳이랑 좀 많이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누군가 우릴 찾으러 올 거고요.”
열에 들떠 나른하긴 했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덕분에 윈터의 복잡한 머릿속도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곧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