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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50)

26화

어느새 마차 여행을 한 지 이주 가까이 지났다.

테슨 지역에서 이틀 정도 머물며 여독을 푼 그들은 곧 다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히르칸이 공작가에 전서구를 보내는 동안 잠시 시간이 비던 그때, 데보라가 조심스레 윈터에게 다가왔다.

“저…… 아가씨…….”

“응? 무슨 일이야, 데보라?”

“이, 이거요.”

조금 발그레한 얼굴로 데보라가 불쑥 윈터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든 윈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게 뭐야?”

“제 선물이에요.”

“선물이라고?”

“네, 그동안 제가 너무 무례하게 군 것 같아서…….”

데보라가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에 윈터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전에 메이딜리언이 데보라를 유심히 보던 게 좀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말썽꾸러기 강아지를 단속하는 심정으로 이리저리 돌아보았지만, 다행히 메이딜리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옷이에요.”

데보라가 대뜸 선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에 들고만 있고, 좀처럼 뜯어볼 생각을 하지 않는 윈터 때문이었다.

“아, 그래?”

의외의 선물에 윈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펼쳐보니 짙푸른 색의 가벼운 셔츠였다.

“특수처리한 천이라서 습기에도 강하고 일정 부분은 방수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언제 또 이런 걸 샀어?”

“아까 출발하기 전에요.”

뭐가 그렇게 부끄럽고 민망한지 데보라는 윈터의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고마워. 잘 입을게.”

그 모습이 의외였던 윈터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데보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 지금 입어보시는 게 어떠세요? 눈대중으로 산 거라 혹시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꿔와야 하니까요!”

“으음, 그냥 수선하면 될 것 같은…….”

너무 크거나 하면 재단사에게 맡길 생각이던 윈터가 말끝을 흐렸다.

눈을 반짝이는 데보라 때문이었다.

어딘지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에 윈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입어볼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봐온 것 중 가장 적극적인 모습에 윈터가 잠시 멈칫했다. 셔츠를 갈아입는 걸 도와준다고?

곧 그녀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뭐, 그럼 나야 고맙지.”

짙푸른 색 셔츠는 윈터에게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선물한 데보라마저 잠시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봤을 정도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옷은 금세 더럽혀지고 말았다.

어김없이 윈터 일행의 마차를 노린 습격이 벌어진 탓이다.

“젠장, 숫자가 너무 많잖아!”

마구 검을 휘두르며 히르칸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다들 작정이라도 한 건지, 평소 습격하던 인원의 세 배는 많은 것 같았다.

아무리 날고 기는 호위대라고 할지라도 백병전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싸울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밀려오는 인간들은 가득했으니까.

창밖을 내다보던 윈터는 혀를 내둘렀다.

“이게 전부 산적들이라고?”

대체 어느 산적이 이렇게 떼로 몰려다니면서 사람을 한군데로 몬단 말인가.

이들의 목적은 마치 보석이나 금품이 아닌 사람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잠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마차 안에서 쉬던 윈터가 바깥으로 나왔다.

그걸 놓치지 않고 메이딜리언이 재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에 그냥 계세요, 아가씨.”

“이 인원으로는 감당이 안 될 것 같은데.”

원래라면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부리며 덤비는 놈들을 곤죽으로 만들어놨을 메이딜리언도 뜻밖에 부진했다.

개인적으로 특기라고 생각하는 ‘그’ 마법도 쓰지 않았다.

우직하게 검으로만 승부하는 메이딜리언을 보던 윈터는 그가 혹시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건가 싶었다.

“딜런, 어디 다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막 달려들던 남자를 걷어찬 메이딜리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먹잇감을 노리며 번뜩였다.

마력이 없더라도 그는 이미 훌륭한 검사였다.

마치 제 수족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검은 적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혹시 원하시면, 손목이라도 잘라서 드릴까요?”

막 숨통을 끊어놓은 산적 하나를 달랑 들고는 메이딜리언이 싱긋 웃었다.

뺨에 튄 피까지 무섭도록 잘 어울리는 모습에 윈터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니, 이제 안 좋아해.”

“흐응, 그렇구나. 아쉽게 됐네요.”

“근데 우리 이러고 한가롭게 농담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어째 몰려오는 인원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제일 선두에서 싸우는 히르칸이 발작처럼 외쳤다.

“으아악, 딜런! 이 자식! 당장 제대로 못 하냐!”

“얼른 가서 도와주고 와. 여긴 내가 알아서 할게.”

“쳇.”

윈터의 재촉에 메이딜리언이 작게 혀를 찼다.

어지간히도 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느릿느릿하게 걸어 나가면서도 메이딜리언은 닥치는 대로 제 앞을 막는 인간들을 도륙해나갔다.

“근데 진짜 그 마력은 대체 왜 안 쓰는 거지……?”

메이딜리언의 진짜 무서움은 바로 그가 가진 마법의 힘이었는데.

윈터는 일단 눈앞의 위기부터 해결하고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 지금 내가 쟤를 걱정할 때가 아니지.”

어느새 그녀를 노리는 산적들이 잔뜩 몰려들고 있었다.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에 윈터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 흐아악!”

상황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마부가 비명을 지르며 달음질쳤다.

“안 돼, 그쪽은……!”

함정이라고.

윈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부가 밧줄에 걸려 넘어졌다.

곧 그가 그물에 걸려 그대로 나무에 매달렸다.

“사, 살려줘!”

버둥거릴수록 점점 그의 몸을 조여오는 그물에 마부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었다.

그 처절한 모습을 보곤 산적들이 낄낄댔다.

“어이, 아가씨. 저 꼴 나기 전에 순순히 따라오는 게 어때?”

“맞아. 뒤쪽은 이미 절벽이잖아. 여기서 죽는 건 아가씨도 싫을 텐데.”

윈터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 말대로 마차는 산적들을 피해 달리고 달리다 낭떠러지 코앞까지 온 상태였다.

“자아, 그럼 이만 이쪽으로 오실까요, 아가씨?”

여전히 윈터의 의심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냥 죽이고 가진 금품을 뺏어서 도망치면 그만일 텐데.

한사코 자신을 노리는 이유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몸값이라도 받아내려고 하나?

물론 윈터는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 참. 너희들이야말로 자기 앞날을 좀 걱정해보는 게 어때?”

“호오, 왜? 아가씨도 검 들고 싸우시게?”

“그건 아니고. 애초에 내 전공은 따로 있…….”

자신만만하게 제 허리춤을 만져보던 윈터의 표정이 굳었다.

늘 이쯤에 걸어두던 마도구가 없었다.

“어, 어라? 이게 왜…….”

혼란에 빠진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데보라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지금 입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당황스러운 마음에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데보라와 눈이 마주쳤다.

“에이, 설마…….”

놀라운 것은 여태껏 수세에 몰린 척하던 데보라가 한 손으로 상대를 쳐내며 샐쭉 얄밉게 웃었다는 거였다.

“하.”

윈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실력을 숨긴 건 아무래도 저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뭐 해, 아가씨?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봐?”

자신만만하게 말해놓고는 영 잠잠한 윈터를 보며 산적들이 조롱했다.

그들과 데보라를 번갈아 보던 윈터는 잠시 고민했다.

기대에 부응해 울상을 짓든 비명을 지르든 해줄까 싶어서.

그러나 역시 착하게 살긴 그른 모양이었다.

“안 좋은 일이라니.”

윈터는 보란 듯 화사한 웃음을 되돌려줬다.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녀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마부는 알아서 멀어져 줬고, 메이딜리언과 히르칸의 위치도 윈터와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날뛰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고작 그거 하나 없다고 마법을 못 써서야 되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윈터의 손에 새하얀 마력이 맺혔다.

눈은 짙은 금빛으로 번뜩이고, 싸늘한 바람이 그녀의 주위에 맴돌았다.

“지금 뭐 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건지 산적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윈터의 손에 맺힌 마력은 선명한 은빛 창을 만들어냈다.

“잘 가, 여러분.”

방긋 웃은 윈터가 그대로 마력으로 만든 창을 쏘아 보냈다.

콰앙―!

거대한 소용돌이와 함께 일대에 폭음이 터져 나왔다.

막 꽃을 피우던 나무들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겨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일대의 기온이 순식간에 내려가며 바닥부터 얼어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뭐야!”

“으아악!”

“살려줘! 사, 살려줘!”

공간을 통제하는 윈터의 마력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살아 있는 것들을 마음껏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피와 살점, 비명이 난무하는 현장 한가운데 오로지 윈터만이 고요했다.

마치 동토의 신처럼 냉엄하고 비범한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도적 패들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비명을 지를 입마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휴, 드디어 조용해졌네.”

주변에 있던 인간들을 전부 얼려놓고도 윈터는 산뜻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내 예상보다 범위가 넓어지긴 했는데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선방이지.”

마도구라는 고삐가 없으면 윈터의 마력은 흉포하게 날뛰곤 했다.

이번에도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마법이 펼쳐진 범위가 넓었다.

“흐음, 나름 줄인다고 줄인 건데.”

바닥에 두껍게 깔린 얼음을 툭툭 건드려보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가릴 것 없이 상냥하게 대해주던 그 얼굴 그대로 천사 같은 모습이 일견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도, 도망쳐! 다들 도망쳐!”

“흐악! 마녀다! 마녀가 나타났어!”

얼음이 맹수처럼 잔당들까지 남김없이 집어삼키려 했다.

그것을 피해 도망치는 산적들 때문에 한 번 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꽁지가 빠져라 내빼는 그들 사이로 윈터는 다시 한번 데보라와 눈이 마주쳤다.

전혀 예상도 못 했던 건지 데보라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윈터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히이잉―!

그것은 바람에 베인 나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비슷했다.

윈터가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잔뜩 날뛰는 말들이 보였다.

안 그래도 시종일관 피비린내와 날카로운 싸움 소리에 불안해하던 말이었다.

커다란 검은 눈을 글썽이던 불쌍한 짐승들은 방금 일어난 폭발음에 놀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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