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 *
“데보라, 몸 상태는 좀 어때? 괜찮아졌니?”
윈터의 물음에 데보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고열과 구토를 반복하며 체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뮬라니르에 정박한 뒤로 데보라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물론 예상치 못한 폭풍우 때문에 배는 그대로 뮬라니르에 두고 마차를 타게 되었지만.
“괘,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리 가세요.”
새침하게 대답한 데보라가 얼른 자리를 피했다.
잔뜩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 같은 반응에 윈터는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저, 아가씨,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그런 윈터에게 히르칸이 다가왔다.
이번 여정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손에는 경로가 표시된 지도가 들려 있었다.
“가는 데는 최대 한 달 정도는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먼저 뮬라니르에서 출발해서…….”
히르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윈터의 시야에 문득 메이딜리언이 들어왔다.
우중충하게 비를 쏟아내는 하늘을 보면서도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짝반짝 예쁜 웃음에 윈터는 홀린 듯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여기서 하루 정도 머문 다음 이웃 영지인 테슨에서…….”
손가락으로 이동 루트를 가리키며 열성적으로 설명하던 히르칸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시점부터 윈터의 반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윈터의 눈은 지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쪽으로 향한 채였다.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가던 히르칸이 이내 와락 표정을 구겼다.
“쯧, 저거, 저거.”
작게 혀를 차는 소리에 드디어 윈터가 정신을 차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고개를 돌린 윈터가 물었다.
그러자 히르칸이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아닙니다. 그저…….”
“그저?”
“저 녀석이 저렇게 웃을 때면 안 좋은 일이 생기곤 해서요.”
히르칸의 말에 윈터가 눈을 빛냈다.
“메…… 아니, 딜런을 잘 아나 봐?”
나일라를 통해 간신히 한두 번 상황을 확인한 적은 있지만,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보는 메이딜리언은 어떨까. 윈터는 그것이 궁금했다.
이번에 같이 파견 나온 것도 그렇고, 평소에 대화하는 것도 들어봤을 때 히르칸은 메이딜리언과 꽤 친숙한 사이인 것 같았다.
“네, 뭐. 저 녀석이 요만할 때부터 봐왔으니까요.”
제 허리 정도를 가리키며 히르칸이 픽 웃었다.
자연스레 윈터도 어린 메이딜리언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땠어?”
“예? 아, 딜런이요?”
“응. 일은 잘하는지 궁금하네.”
“그거야 뭐…….”
말끝을 흐린 히르칸이 슬쩍 윈터의 눈치를 봤다.
호위대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아가씨에게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윈터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음, 우선 신입이 오면 딜런이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해줬습니다.”
“오.”
군기를 제대로 잡았다는 소리군.
“저 녀석이 온 뒤로 기강이 확실히 세워졌고요.”
“아하.”
더러운 성질을 숨기지 않은 모양이다.
“호위대에 오래 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후임에게 확실히 예의를 차리게 되었죠.”
“그래?”
위아래 상관없이 패악을 떨었겠지.
“덕분에 서로 무척 돈독해졌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
메이딜리언이라는 거대한 악에 대항하기 위해 나머지 사람들끼리 똘똘 뭉쳤다는 뜻인 것 같았다.
예상했던 상황들에 윈터는 그저 허허, 웃었다.
“저어, 아가씨, 출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때 마부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고개를 끄덕인 히르칸이 윈터를 마차 쪽으로 에스코트했다.
“이만 가시죠, 아가씨.”
“알겠어.”
윈터가 밀착 호위를 맡은 데보라와 함께 마차에 오르고, 그들은 곧 뮬라니르를 떠났다.
* * *
예상치 못하게 몰려든 비구름은 뮬라니르를 벗어나며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윈터는 잿빛으로 가득한 하늘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도무지 비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그때, 그런 그녀를 노리고 도끼가 날아들었다.
“하압!”
“아가씨!”
놀란 히르칸이 외쳤다.
그러나 그가 상상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쏘아진 마력에 쾅, 하는 굉음이 났다.
곧 윈터를 노리던 남자의 손이 그대로 어깨까지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이런, 명중이네?”
아이셀이 선물해준 마도구를 슬쩍 내려다보며 윈터가 씩 웃었다.
비도 오는데 어쩜 이렇게들 부지런하신지.
윈터 일행의 마차가 가는 길마다 산적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누가 마차가 이동하는 루트를 알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가득 꼬이는 산적들을 보며 윈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크비누스 그 인간 진짜, 얼마나 해 먹고 있는 거야.”
스스럼없이 섭정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메이딜리언의 어머니인 선대 황제가 죽은 지 17년이다.
황자가 어리다는 이유로 섭정을 맡게 된 크비누스는 탐욕에 찌든 인물이었다.
어릴 적 후계 싸움에 밀리고 종교에 귀의했던 그는 교황청까지 마수를 뻗었다.
황제와 귀족들은 제국민들을 외면했고, 종교는 부패했다.
갈수록 착복이 심해지는 영지들이 나오고,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약한 인간들을 상대로 도적질하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도적들이 기승이라고는 들었는데 설마 이렇게 심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볍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히르칸이 말했다.
고작 셋뿐인 비밀 호위대이지만 그들 하나하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렴, 세계관 최강자라고 꼽히는 메이딜리언이 있는데 고작 산적들에게 당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나저나 뜻밖이십니다.”
“응? 뭐가?”
“이렇게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실 거라곤 예상도 못 했습니다.”
히르칸이 어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어쩌다 보니 윈터도 산적들을 상대하는 걸 거들고 있었다.
아이셀이 새로 개발한 마도구를 시험 삼아 사용해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봉인을 했다고 하지만 윈터의 마력은 종종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여차하면 폭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셀이 개발한 마도구 덕분인지 이전에는 어려웠던 세밀한 조율이 조금 더 수월했다.
“다 이것 덕분이지.”
윈터가 손에 든 마도구를 가볍게 흔들었다.
은빛의 몸체에 푸른색 주술이 그림처럼 새겨진 마도구를 히르칸이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걸로 마력을 증폭시키는 건가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산적들을 상대하던 윈터의 모습을 떠올린 히르칸이 물었다.
“으음, 뭐, 비슷해.”
묘한 웃음을 지은 윈터가 말을 얼버무렸다.
마력 증폭은커녕 오히려 마력을 억제하는 도구라는 걸 굳이 여기저기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저도 한 번 살펴봐도 되나요?”
어느새 다가온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산적들의 뒤처리를 다 마친 모양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윈터는 선뜻 손에 든 마도구를 내주었다.
겉에 새겨진 주술을 살펴보며 골몰하는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꽤 진지했다.
“이걸로 마법을 쓰는 거예요? 빙결 마법인 것 같던데.”
“응. 맞아.”
빙결 마법은 윈터의 특기 중 하나였다.
“제국에서 화염 계열은 많이 봤지만 빙결 마법은 드문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옆에서 히르칸이 감탄하며 외쳤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표정에는 걱정이 역력했다.
“이제 마법을 써도 아무렇지 않은 거예요?”
“응? 아아, 그럼. 당연하지.”
너무 무리하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윈터를 보면서도 메이딜리언의 안색은 그리 밝지 못했다.
마력 폭주 때문에 죽을 뻔했던 윈터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그는 여전히 윈터가 자유자재로 마력을 다루는 것이 믿기지도 않고, 불안한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윈터가 슬쩍 메이딜리언의 팔꿈치를 잡고는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이제 정말로 괜찮으니까.”
그런 윈터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메이딜리언이 입을 열 때였다.
“저는…….”
“잠깐 지나갈게요.”
“어어.”
예고도 없이 데보라가 두 사람 사이를 휙 지나갔다.
당황한 윈터가 뒤로 물러났고 메이딜리언이 얼른 비틀거리는 그녀를 붙잡았다.
“어머, 죄송.”
데보라가 샐쭉 웃으며 말했다.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딱 봐도 메이딜리언과 윈터 사이를 샘내는 중이었다.
“아냐, 괜찮아.”
윈터는 포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더 맘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별로 개의치 않는 윈터의 모습에 입술을 삐죽대던 데보라가 곧 휙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흐음.”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메이딜리언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서 심상치 않은 느낌을 감지한 윈터가 얼른 입을 열었다.
“데보라 말이야. 정말 귀엽지 않니?”
전부 충성심에 기인한 행동이었으니, 윈터는 얼마든지 관대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게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은 메이딜리언이 윈터 쪽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속삭였다.
“여전히 쓸데없이 상냥하시군요.”
“……뭐?”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질투 난다고 했잖아요.”
낮은 음성과 함께 메이딜리언의 입술이 윈터의 귓불에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윈터가 얼른 제 귀를 부여잡고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너, 너, 또……!”
잔뜩 빨개진 윈터의 얼굴을 보며 메이딜리언이 예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참고로, 이번엔 환영 인사로 한 거 아니에요.”
“메이!”
비밀 호위대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가명으로 부른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윈터가 와락 외쳤다.
당황했다는 증거였다.
혹시 누가 봤을까 싶어 윈터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누구도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윈터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그녀의 착각이었다.
두 사람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까.
“전하께서 대체 왜 저런 약한 인간이랑……!”
마차 뒤에서 두 사람을 훔쳐보던 데보라가 분통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섬에서 요양했다는 아가씨는 어딘지 좀 이상했다.
자신이 아무리 괴롭혀도 울기는커녕 실실 웃기만 했다.
약해 빠져서 메이딜리언의 앞길에 방해만 될 것이 뻔한데. 갈수록 눈엣가시 같아서 너무 거슬렸다.
빙결 마법 쓰는 걸 보면 나름 쓸만했지만, 어차피 저 마도구가 없으면 전부 무용지물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데보라가 멈칫했다.
“잠깐, 마도구만 없으면……?”
곧 그녀의 시선이 윈터를 향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