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메이딜리언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는 건 블라디미르 공작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두 꼬마는 10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애처로운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그러니 지금쯤 윈터는 멀쩡히 배에 올라 마누트라 섬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블라디미르 공작은 이 발칙한 꼬마를 시험해보고 싶어졌다.
“배은망덕한 것. 설마 그러고도 내가 널 살려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각오, 하고 있습니다.”
성인도 기겁하며 벌벌 떠는 블라디미르 공작의 기세를 받아내며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런데도 이 작은 꼬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그 모습에 블라디미르 공작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문득 제 딸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호언장담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 생각보다 훨씬 밥벌이는 잘할걸요?’
죽은 선황, 미쉘라를 꼭 닮은 저 얼굴이 여전히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블라디미르 공작은 이미 윈터와 한 약속이 있었다.
저 건방진 꼬맹이가 다 자라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맡아주기로.
물론 맡아준다는 것은 블라디미르 공작의 방식으로 할 것이지만.
“각오라. 그래, 네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꾸나.”
그렇게 말한 블라디미르 공작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일라를 불러왔다.
“이 녀석을 데려다 오늘부터 철저히 훈련시켜라. 장차 자라서 제 몫을 하면 비밀 호위대의 일원으로 넣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나일라가 흠칫 놀랐다.
여태까지 비밀 호위대에 이렇게 어린 녀석을 들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감상일 뿐. 나일라는 블라디미르 공작이 하는 말이라면 강아지를 날게 하라고 시켜도 무조건 수행하는 인간이었다.
“……존명.”
짧게 부복한 나일라는 그대로 메이딜리언을 데리고 나왔다.
그날로 메이딜리언에게 지옥과도 같은 나날이 펼쳐졌다. 유스터스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과 별개로 비밀 호위대에 들어가기 위해 암습이나 독살 같은 임무들을 배워가며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메이딜리언은 마력과 체력, 검술 훈련까지 매일매일 쉬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했다.
그러나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처럼 괴리감만 커졌다.
“……이게 아냐. 이걸로는, 이걸로는…….”
제 마력으로는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없던 메이딜리언은 날마다 절망했다.
‘그럼 다른 쪽으로 잘 개발해 봐라. 기왕이면 네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도록.’
윈터를 데려간 마법사의 말대로 어떻게든 개화를 시작한 마력을 다스려보려고 했지만 매번 실패만 하기 일쑤였다.
그가 타고난 마력으로는 윈터를 살리기는커녕 미약한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우울해하는 메이딜리언을 위로해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타였다.
윈터가 하필 그를 삼촌이라고 말한 바람에, 한타는 종종 블라디미르 공작가에 물자를 납품하는 날이면 메이딜리언을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 마력을 다루는 일이나, 검술은 한타의 전문 분야였다.
메이딜리언은 타고나길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인간이었기에 딱히 어려운 부분은 없었으나, 한타가 옆에서 지나가듯 해주는 이야기들이 나름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한타를 처음엔 영 이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메이딜리언은,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그에게 먼저 말을 걸 정도로는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감격한 한타가 엉엉 울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한타가 메이딜리언과 친해지길 기다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것은 엘리슨이었다. 그녀는 메이딜리언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그에게 출생의 비밀을 밝혔다.
“내가 황자라고……?”
“예! 맞습니다.”
“흐응, 그렇구나.”
정작 그 말을 들은 당사자보다 얘기한 사람이 더 감격해서 눈물을 찔끔 흘렸지만.
메이딜리언이 궁금해한 부분은 오히려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혹시 아가씨도 그걸 알고 있어?”
“예? 아아, 그럼요. 저희한테 제일 처음 알려준 것도 그 아가씨인걸요.”
그럼 아가씨는 혹시 자신이 황자라는 사실 때문에 잘해줬던 것일까?
메이딜리언은 어릴 적부터 타인의 감정에 예민했다. 특히나 애정에는 더욱 민감했고.
영리한 어린애의 머리는 윈터가 고작 그딴 이유로 제게 잘해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심장은 불안감으로 술렁거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끝 간 데 없는 애정.
윈터의 마음이 고작 그런 것에 기인하지 않았으리라고 메이딜리언은 생각했다.
만일 정말로 윈터가 자신이 황자라서 그렇게 잘해준 것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어.”
메이딜리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애써 자신의 불안을 잠재웠다.
“근데 내가 황자라는 거, 딱히 밝히지 않아도 상관없는 거잖아. 그렇지?”
“……예?”
전혀 뜻밖의 말에 엘리슨과 한타는 끼룩 굳었다.
“저, 황자님?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황자니 뭐니 그런 거 다 귀찮다는 뜻이지.”
“아니, 황궁으로 돌아가면 황자님의 가족분들도 기다리고 있고, 또 온갖 산해진미에 금은보화도 가득한데요. 게다가 여기서 굳이 이렇게 힘들게 지내실 필요도 없으신데 대체 왜 귀찮으시단 거죠?”
엘리슨이 황자가 되면 좋은 점을 열심히 설파했지만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오히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음, 그게…….”
얼른 고개를 끄덕이려던 엘리슨은 차마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고작 열두 살, 이라고 하기엔 메이딜리언은 이미 세상의 쓴맛을 너무 많이 봤다.
물정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꼬마에게 황자가 얼마나 좋은지 말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게 당연했다.
제 누이의 자리를 낚아채 섭정 황제가 보위에 오른 지 10년이 넘었다.
아직 미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메이딜리언을 제외하면 유일한 황자인 아스터는 제 삼촌의 기에 눌려 유약하기 짝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엘리슨의 입장에서야 제가 원래 모시던 황제의 후계들이 섭정 황제에게서 황위를 되찾으면 좋겠지만, 메이딜리언 입장에서는 딱히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골치 아픈 일들만 가득하겠지. 독살은 덤이고.”
난처하게 일그러진 엘리슨의 표정을 보며 메이딜리언이 픽 웃었다.
“난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이렇게, 마구간지기 아들로 평범하게 살래.”
그러기엔 외모부터 능력까지 비범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시의 메이딜리언은 아직 그런 쪽으로는 둔했다.
그로부터 몇 달을 엘리슨을 필두로 한 아르카의 단원들이 전부 달라붙어 돌아가며 메이딜리언을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요지부동이었다.
장점도 이득도 없는 황자 자리를 굳이 받아들여야 할 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엘리슨은 메이딜리언이 마력을 단련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황, 아니 메이딜리언 님. 대체 왜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키려 하시는 겁니까? 타고난 마력은 바꿀 수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보통 때는 이렇게 물어도 무시하기 일쑤인 메이딜리언이었지만, 이번에는 의외로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걸 반대로 바꾸면, 아가씨를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의 손에서 가볍게 바스러진 꽃잎들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걸 본 엘리슨의 눈빛이 달라졌다.
드디어 메이딜리언을 움직일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 아가씨 말인데요. 심장 쪽 문제라고 그랬죠?”
“……응.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엘리슨이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슨이 작게 속삭였다.
“심장이 마력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면 다른 심장을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내 거라도 드릴까?”
무슨 쿠키 반쪽 떼주듯이 심장을 준다는 말에 엘리슨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아니, 그런 거 말고요.”
“그럼 또 무슨 방법이 있는데.”
“이건 황실에 내려오는 비사이긴 한데요.”
비사라는 말에 메이딜리언의 귀가 쫑긋했다. 엘리슨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황제의 금고에, 드래곤의 심장이 있다고 합니다.”
“……드래곤의 심장이라.”
“예, 황제가 되면 꼭 그 심장이 아니더라도 온 대륙의 심장이란 심장은 다 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체 누가 비사에나 나오는 심장을 얻겠다고 섭정 황제와 맞서냐고 누군가는 비웃을지 몰랐다.
하지만 상대는 메이딜리언이었다. 윈터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가진 어린 소년이라면 충분히 이 말에 넘어올 거라고 엘리슨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어느새 열중해서 검을 닦던 것도 멈추고 메이딜리언이 완전히 몸을 돌려 앉았다.
당장에라도 섭정 황제의 목을 따러 갈 것 같은 기세에 엘리슨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제의 금고에 들어 있다는 드래곤의 심장.
그것이 메이딜리언이 황제가 되고자 한 이유였다.
그리고 다시 현재.
메이딜리언의 시선은 어린 시절과 다름없이 윈터만을 집요하게 쫓았다.
“데보라, 몸 상태는 좀 어때? 괜찮아졌니?”
“괘,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리 가세요.”
여전히 그의 아가씨는 착해 빠졌다.
어린 자신을 지나치지 못하고 지켜줬던 것처럼 윈터는 삐딱선을 타는 데보라에게도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제게 호의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쩜 저렇게 살뜰히 보살피시는지.
행장을 점검하는 히르칸과 마차를 끌게 될 마부와 말들까지 살피느라 바쁜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작게 혀를 찼다.
환영 인사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고 살짝 입 맞췄던 뒤로 줄곧, 윈터는 메이딜리언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어색해서 이리저리 다른 사람에 말을 거는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뒤틀리는 속은 어쩔 수 없었다.
당신의 다정한 손길은 나만의 것인데.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가 불길하게 번뜩였다.
아무래도 조만간 저 눈엣가시 같은 것들을 말끔히 치워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고요한 다짐을 하던 메이딜리언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몰려온 폭풍우는 며칠째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휘몰아치고 있었다.
덕분에 운하를 타고 황도로 돌아가는 가장 짧은 코스는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배를 망가뜨리진 않아도 되어서 참 다행이야.”
작게 키득키득 웃던 메이딜리언이 이내 활짝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