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50)

23화

문제는 다음날 발생했다.

데보라가 고열에 시달리며 구토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보고하러 왔던 히르칸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혹시 뱃멀미는 아니겠지?”

“그렇다기엔 여기까지 올 때도 배를 타고 와서요. 멀미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는 동안에는 멀쩡했던 데보라가 갑자기 아프다니. 옆에서 증상을 듣던 선장이 입을 열었다.

“증상만 들었을 때는 식중독일 가능성도 있겠는데요?”

그 말에 히르칸의 표정이 더 난처해졌다.

“그렇다는 건…….”

“예, 배에 있는 음식이 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보라 하나만 아픈 거로 끝나면 모르지만, 만약 음식이나 물이 상한 거라면 다른 사람들도 곧 위험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윈터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우선은 근처 도시에 정박해서 전체적으로 다시 정비하지. 데보라의 치료도 필요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배는 곧 뮬라니르라는 도시에 멈췄다. 골골거리는 데보라는 히르칸에게 업힌 채였다.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가씨를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비밀 호위대가 오히려 일정에 차질을 빚었으니 히르칸은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송구한 마음에 그는 등에 업힌 데보라까지 재촉했다.

“데보라, 너도 얼른 아가씨에게 사과드려라.”

“뭐? 아니야. 아픈 사람한테 사과는 무슨. 됐어.”

윈터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히르칸의 등에 업혀 달뜬 숨을 내쉬던 데보라가 눈을 떴다.

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윈터를 노려보는 시선은 선명했다.

입술을 삐죽이는 데보라를 보며 윈터는 여전히 의아했다. 제가 아프게 한 것도 아닌데 왜 이쪽에 적의를 불태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데보라의 표정이 삽시간에 창백해지더니 그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데보라의 눈이 묘하게 뒤쪽으로 향하기에 혹시나 해서 돌아보니 역시나. 메이딜리언이 있었다.

윈터는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원작에서도 사악하기 짝이 없던 메이딜리언이었다.

보나 마나 또 제 성질대로 마구 패악을 떨었겠지. 눈만 마주쳐도 벌벌 떠는 데보라가 가엽기 짝이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윈터가 얼른 몸을 움직였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이빨을 드러내는 맹수를 조련하는 심경으로 그녀는 메이딜리언과 데보라 사이로 끼어들었다.

“좋은 아침, 딜런.”

윈터의 목소리에 메이딜리언이 움찔했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윈터가 물었다.

“왜?”

“그냥요. 아가씨가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게 어색해서요.”

“어색할 것도 많다.”

픽 웃은 윈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배가 정박한다면서요?”

“응. 내려서 한 번 정비해야 할 것 같아.”

“흐음.”

이미 데보라의 증상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는 것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윈터야 가뜩이나 아픈 데보라에게 메이딜리언이 혹시라도 제 못된 성질을 부릴까 싶어 애써 돌려 말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 사악한 성질머리 때문에 배신당하고 망했던 인생 아닌가. 지금이라도 미리미리 주위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으면 했다.

그런 윈터의 모습이 메이딜리언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데보라를 감싸는 것처럼 보였지만.

눈을 가늘게 뜬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숙여 윈터에게 속삭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아끼시는 거 아닌가요?”

“뭐?”

“감쌀 사람을 감싸야죠.”

“너 그게 무슨…….”

“자꾸 그러면 질투 납니다.”

낮게 깔리는 저음이 귓가에 닿았다가 휙 사라진다.

금세 멀어지는 뒷모습에 미련이라곤 없어 보였다.

황당한 마음에 윈터가 작게 혀를 찼다.

“나 참, 질투는 무슨.”

어이없는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배에서 내려서 치료를 받으러 들어가던 데보라가 대뜸 윈터에게 말했다.

“전 아가씨가 참 부러워요.”

“……내가 부럽다고?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렇게 약해 빠졌는데도, 딜런 님은 아가씨께 충성을 다하잖아요.”

“으음, 저기…….”

잔뜩 열이 올라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윈터는 잠시 난감해졌다.

약해 빠졌다니, 대체 누가?

“아가씨는 아실지 모르지만 딜런 님은 고작 여기에 머무르실 분이 아니에요. 더 높은 곳을 향해 가야 하실 분이라고요.”

이미 윈터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그걸 원했고.

그러나 데보라에게는 윈터가 그저 타고나길 약한 몸으로 메이딜리언의 동정을 사서, 그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가씨가 정말로 딜런 님을 아낀다면, 그만 그분을 놓아주세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적해줘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윈터가 바라 마지않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는데.

충심과 열정, 적의로 똘똘 뭉친 어린 눈동자를 마주하며 윈터는 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정말 소설이랑 똑같잖아!’

메이딜리언의 무위에 반해 그에게 충성심을 바치는 불도저 같은 성격의 데보라.

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에 윈터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그, 그럼 전 이만.”

제 나름 심한 소리를 했는데도 여전히 초롱초롱한 윈터의 눈동자에 오히려 데보라가 움찔했다.

황급히 멀어지는 데보라의 뒤통수를 보며 윈터는 속으로 비명을 삼켰다.

‘귀여워! 앙칼져!’

윈터 일행은 데보라도 치료하고, 배도 정비하며 뮬라니르에서 체력을 회복하기로 했다.

얼마 안 가 다시 출발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슬프게도 윈터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폭풍우라고?”

히르칸의 말에 윈터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아까까지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예. 원래 이 시기에 이런 일은 드문데…….”

순조롭게 망해가는 일정에 히르칸이 채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면 지금 음식이나 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창밖을 내다보던 선장이 잿빛 하늘만큼이나 우중충한 얼굴로 말했다.

“좀 오래 걸리더라도 마차를 이용해서 가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폭풍우가 온다면 배는 너무 위험합니다, 아가씨.”

“예. 마침 뮬라니르부터는 수도까지 가는 도로가 잘 닦여 있어서 가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히르칸도 얼른 맞장구를 쳤다. 주먹을 꽉 쥐는 걸 보니 여기서 더는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고 굳게 다짐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알겠어. 마차로 가지.”

“그럼 저는 얼른 쓸만한 마차부터 수배해오겠습니다.”

윈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히르칸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윈터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갑작스레 데보라가 아파서 정박을 했는데, 마침 그 도시가 도로가 잘 정비된 곳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것도 그렇고.

마치 누군가 그녀가 마차를 타고 이 도시를 지나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에이, 아니겠지.”

기우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에 윈터가 픽 웃었다.

그러나 문득, 왠지 이상한 예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타이밍도 좋게 창밖으로 여유롭게 걸어가는 메이딜리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 * *

8년 전, 떠나는 윈터를 배웅하며 눈물을 쏙 뺐던 메이딜리언은 탈출한 그를 잡으러 온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기사들 손에 의해 그대로 끌려갔다.

“어휴, 대체 이게 무슨 난리냐.”

눈이 퉁퉁 부은 채 기사들 손에 달랑달랑 들려온 메이딜리언을 보며 유스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메이딜리언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아낀 만큼, 메이딜리언도 윈터를 무척 잘 따랐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때때로 메이딜리언이 지나치게 집착적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떠나는 윈터를 뒤쫓으려고 공작가를 탈출할 줄이야.

“각하께서는 자비라고는 모르시는 분이다. 오늘 네 행동이 아가씨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유스터스가 일부러 엄하게 말했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지독히도 올곧았다. 그래서 오히려 뒤틀려 보일 만큼.

“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한낱 어린애의 치기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유스터스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열던 찰나였다.

“너…….”

“행어 경.”

어느새 소리도 없이 뒤에 와 있던 나일라 때문에 유스터스가 흠칫 놀랐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아가씨의 전담 시녀는 지나치게 기척이 옅었다.

“실례지만 그 꼬마를 제게 넘겨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일라의 서늘한 눈빛이 메이딜리언에게 소리 없이 향했다.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에 유스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의외인 것은 메이딜리언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블라디미르 공작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순순히 나일라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일라의 눈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조심히 다녀와라.”

유스터스가 메이딜리언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부디 사지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뜻을 저 꼬마가 알아들었을지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가라.”

한편 메이딜리언은 나일라를 따라 블라디미르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전에도 한 번 와본 적 있긴 했지만, 다시 들어와도 여전히 살벌한 공간이라고 메이딜리언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마냥 기죽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저를 내려다보는 블라디미르 공작의 시선을 당당히 마주했다.

“호오.”

일부러 시험해보고자 약하게나마 기세를 피워올렸던 블라디미르 공작이 작게 감탄했다.

처음 봤을 땐 비루먹은 망아지만도 못한 볼품없는 꼬마 녀석이 제법 볼만한 눈을 가지게 되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되는 데까지는 아마…….

“윈터가 널 제대로 키운 모양이구나.”

“…….”

“그런데 넌 오히려 그런 내 딸을 죽이려 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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