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50)

22화

눈이 마주치자 작은 약과 물잔이 올려진 쟁반을 손에 든 메이딜리언이 방긋 웃었다.

“너……!”

그 미소에 윈터는 속이 뒤집혔다.

“몸이 안 좋아 보이셔서 약을 챙겨왔습니다.”

“하, 참나! 약?”

윈터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자신이 보낸 연락은 싹 무시해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메이딜리언이 황당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부들거리는 윈터의 속은 꿈에도 모르고 메이딜리언이 불쑥 다가섰다. 커다란 손이 윈터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음, 열이 좀 있는 것 같…….”

“수작 부리지 마!”

발작적으로 외치며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손을 쳐냈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시선을 마주하고 나니 어쩐지 죄책감이 들어 윈터가 슬쩍 눈을 굴렸다.

“왜 화났어요?”

“무, 뭐? 화 안 났거든?”

“그럼 기뻐요?”

그렇게 묻고는 메이딜리언이 눈을 휘어 예쁘게 웃었다.

“나는 기쁜데.”

그 얼굴을 지척에서 마주한 윈터는 괜히 귀가 화끈거렸다. 이게 수작이 아니라고? 이게, 이게?

수작이 아니라니까 더 화가 났다. 속에서 자꾸만 열불이 나는 스스로가 이상할 정도였다.

생각보다 더 잘생겨서 그런 건가? 소설 세계관 최강의 미모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 정도로 대단할 필요는 없잖아!

결 좋은 은발이 차르르 예쁘게 떨어지고, 은빛의 긴 속눈썹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거둬내고 보석같이 붉은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시종일관 입가에 맺힌 미소는 황홀하기 짝이 없어서 자꾸만 사람을 멍하게 만들었다.

흠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에, 널따란 직각 어깨와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몸이 가뜩이나 얇은 옷 때문에 너무 적나라하게 보였다.

“아가씨……?”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이번에도 아주 대놓고 감상하고 말았잖아.

짐짓 모른 척 시선을 돌리고 시치미를 떼자 머리 위에서 낮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만나서 좋아요. 오랜만이에요.”

나직한 목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좋았다. 가릉가릉 목을 울리는 낮은 톤이 이상하게 귓가에 계속 남아 있는 듯했다.

마치 세이렌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윈터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퉁명스레 되받아쳤다.

“조, 좋기는 무슨! 거짓말하지 마!”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시무룩하니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윈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던 욕을 참았다.

분명 원작에서는 안하무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던 인간이었는데. 예의는커녕 싸가지도 깔끔하게 말아먹은 인성 파탄 흑막 아니었어? 저렇게 고분고분 아양을 떨며 제가 가진 미모를 십분 활용하는 메이딜리언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메이딜리언이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왔다. 윈터는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멀어졌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입술을 꾹 깨문다.

“제가 뭐 잘못했나요?”

아래로 떨군 시선이 서글프기 짝이 없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아름다운 얼굴이 속삭였다.

“저는 아가씨 말대로 멋진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는데. 그리고 아가씨만 기다리면서, 약속대로 아가씨를 만나러 왔는데. 아가씨는 제가 별로 반갑지 않은 것 같아요.”

고개를 번쩍 든 메이딜리언의 붉은 시선에 움찔한 윈터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저 악당 같고 사악하고 튼튼하기 짝이 없는 메이딜리언이 금방이라도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가여워 보이다니.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모양이었다.

“역시 이제 제가 싫어지신 건가요? 제가 꼴도 보기 싫으신 거면, 그냥 이거라도 다시 쓰고 있을까요?”

그때 메이딜리언이 어디선가 가져온 가면을 내밀었다. 낯익은 토끼 가면에 윈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잊고 있던 안 좋은 기억이 금세 되살아났다.

“그건 내 눈에 안 띄게 당장 치워버려. 아, 그러고 보니…….”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너 그건 무슨 의미야?”

“뭐가요?”

“나한테 바람둥이라고 했잖아.”

“아, 그거요.”

예상 밖의 화제였는지 메이딜리언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윈터는 순간 팽팽 머리를 굴렸다. 혹시 자신이 뭔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건 아닌가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골목에서요.”

“골목에서, 뭐?”

“아가씨가 제 몸 보고 감탄하는 거 다 봤…….”

“악! 그만 말해!”

비명을 지른 윈터가 얼른 메이딜리언의 입을 막았다. 역시나, 제 무덤을 판 물음이 맞았다.

잠시 객실이 고요해졌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입을 막았던 손을 뗐다.

삐걱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윈터를 보던 메이딜리언이 낮게 말했다.

“제가 왜 싫어졌는지 말이라도 해주세요. 고칠게요. 더 노력할게요. 네? 아가씨.”

당장 빌기라도 할 것 같은 애원 조의 말에 윈터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윈터는 원래도 메이딜리언이라면 간이고 쓸개고 상관없이 다 빼줄 듯 굴던 인간이었다.

8년 만에 만난 최애가 화사한 미모를 뿜어내며 저렇게 애절하게 말하는데 안 넘어갈 인간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네가 싫어진 게 아니야.”

한숨처럼 나온 대답에 메이딜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활짝 웃었다.

싫지 않다는 그 한 마디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그냥 좀, 섭섭했던 거지.”

시선을 피한 윈터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뭐가 섭섭했는데요?”

“그거야, 당연히……!”

버럭 외치려던 윈터가 말끝을 흐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대체 얼마나 더 유치해져야 하나 싶어 자꾸만 짜증이 났다.

“내 편지, 왜 답장 안 했어?”

자신 없는 듯 웅얼거리며 나온 말에 이번에는 메이딜리언이 움찔했다.

“편지, 요?”

“그래. 네 생일에 맞춰서 선물이랑 같이 보냈는데.”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설마 여기서 그 얘기가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었다.

그게 괘씸해서 윈터가 바짝 메이딜리언에게 다가섰다.

“무려, 지난 3년 동안이나 말이야. 몇 번을 보냈는지 셀 수가 없어!”

아니다. 사실은 셀 수 있었다. 정확히 열네 번이었다.

“근데 너는 받았다는 표시는커녕 연락 한번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뭐? 다시 만나서 기쁘다고? 참나, 내가 어이가 없어서.”

유치해서 못 하겠다며 망설이던 건 어디 갔는지. 지난 3년간 끙끙 앓던 서운한 속내를 와다다 쏟아낸 윈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윈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메이딜리언의 눈빛이 지독히도 낮게 가라앉았다.

“편지를, 어디로 보냈어요?”

서늘한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윈터가 순순히 대답했다.

“……제니마 상회.”

“제니마. 제니마 상회라.”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메이딜리언이 금세 화사하게 웃었다.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네요.”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체 뭘 알겠다는 건지. 그리고 아니긴 또 뭐가 아닌 건지.

윈터는 아직도 답답해 죽겠는데 메이딜리언은 모든 의문이 해결된 듯 한결 산뜻해진 얼굴이었다.

곧 그가 헝클어진 윈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어요. 아가씨. 사정이 있어서 미처 답장하진 못했지만…….”

잠시 말을 멈춘 메이딜리언의 입매가 더 짙은 호선을 그렸다.

“조만간 제대로 된 답장을 준비할게요.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그러고는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왔다. 갑자기 왜 거리가 더 좁혀지나 싶어 고개를 들었던 윈터는 이마에 닿는 낯선 체온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 지금…….”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해요, 윈터 아가씨.”

제 이마를 황급히 가린 윈터가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이미 남는 공간이 없었다. 등에 닿는 벽에 윈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잔뜩 털을 곤두세운 그녀를 마주한 메이딜리언은 아무렇지 않게 방글방글 웃을 뿐이었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환영 인사요.”

당당하게 이마에 입 맞춘 게 환영 인사라는 메이딜리언의 말에 윈터는 어이가 없었다.

“야, 우리가 아직도 열 살 아홉 살 어린 애들도 아니고 이게 무슨…….”

황당한 마음에 중얼거리자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혹시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저는 그냥 아가씨를 다시 만난 게 너무 기뻐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해 보이는 얼굴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애처로운 모습에 윈터는 입을 떡 벌렸다.

아직 사춘기가 안 끝났나. 제 말 한 마디에 감정이 이리저리 널뛰는 메이딜리언이 낯설었다.

이러다 8년 만에 만난 최애를 울리는 건 아닌가 싶었던 윈터가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불쾌한 건 아니고.”

“그럼 좋았어요?”

불쑥 들어온 질문에 윈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좋았냐고? 최애가 반짝거리는 얼굴로 이마에 입을 맞췄는데, 그게 고작 좋았다는 말로 설명이 되나?

가뜩이나 약해빠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윈터는 애써 그런 마음을 감췄다. 집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이 그걸 알아채고는 작게 혀를 찼다.

“넌 일단 뒤로 가. 너무 가까워.”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어깨를 꾹 뒤로 밀었다. 손에 닿는 단단한 체온에 윈터는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갑자기 귀가 화끈거리며 이 방에 단둘이 있는 게 무척 신경 쓰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싱숭생숭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 윈터도 알고 있었다.

“아가씨.”

“왜.”

윈터가 미는 대로 순순히 물러나며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윈터의 감정을 기민하게 살폈다.

처음보다 미묘하게 붉어진 귀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곧 메이딜리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거죠?”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제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당황한 윈터가 얼른 메이딜리언을 밀어내던 손을 떼어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기는. 아까보다 눈에 띄게 빙글거리는 얄미운 얼굴에 윈터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이 시리도록 달콤하게 웃은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푹 쉬세요. 곧 강행군이 시작될 테니까.”

멍하니 객실을 나가는 메이딜리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윈터는 문득 의아해졌다.

“아니, 얌전히 배 타고 가다가 내리면 되는데, 강행군은 무슨 강행군이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