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뭐, 나름.”
아이셀은 마도구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았다.
윈터에게 보여줬던 통신석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제작하는 게 많았다.
윈터는 전생의 기억까지 총동원해 그런 아이셀에게 여러 아이디어를 제공하곤 했는데, 그게 두 사람이 친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줬다.
아이셀은 칼리스타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일정 로열티를 받으며 본인이 개발한 마도구를 대륙에 유통했다.
그게 칼리스타를 대륙에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몇 가지 물건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대륙에 상용화되었고, 칼리스타와 아이셀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다.
덕분에 돈 좋아하는 아이셀의 주머니도 풍족해진 것은 두말하면 입 아픈 일이었다.
새로운 마도구를 구상한다는 명목으로 아이셀은 일 년에 한두 달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곤 했다.
이번에는 제국에서 열리는 마법 학회에 정식으로 초대받아 다녀오는 길이었다.
“다들 이번에 제작한 물건에 관심이 많더라.”
이번에 제작한 물건이란 말에 윈터가 제 허리춤에서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크기의 물건을 꺼냈다.
디자인 자체는 윈터의 아이디어였기에, 이것은 전생의 ‘총’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기능은 마력 제어구. 마력 조절이 힘든 자들을 위한 보조기구였다.
성년이 되는 윈터의 생일선물로 아이셀이 직접 개발해 선물한 물건이었다.
이 발명품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던 윈터는 상용화를 추진하려고 했지만 아이셀은 별로 내키지 않아 했다.
“어린이용으로 개발해 보는 건 어때?”
“그러기엔 위험성이 좀 있지. 경량화하기도 어렵고. 아마 대륙 통틀어서 그걸 쓸 만한 사람은 너뿐일 거다.”
막 개화를 시작한 어린아이들은 마력을 제어해야 할 만큼 마력이 강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감당이 안 될 만큼 무지막지한 마력을 개화하는 사람은 윈터가 거의 유일했다.
“마력 증폭기도 아니고, 굳이 이런 걸 왜 만들었는지 배경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
학회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아이셀이 말했다.
“이번에도 관심을 독차지했겠는데?”
“뭐, 내가 워낙 유능한 탓이지.”
얼마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시늉을 하며 아이셀이 거들먹거렸다.
“그럼 거기서 뒤풀이도 하고 그러지 왜 벌써 왔어.”
“출가하는 망아지가 있는데 뒤풀이가 뭐 중요하다고.”
아이셀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일정이 촉박했을 텐데도 잊지 않고 자신을 배웅하러 와준 그녀의 마음에 윈터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너어, 어차피 또 황도에서 만날 건데, 지금 울면 앞으로 10년 치 놀림감이다.”
그걸 뻔히 아는 아이셀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씨, 안 울거든!”
윈터가 발끈해서 바락 외쳤다.
아이셀의 말은 무척이나 효과가 좋아서, 나오려던 눈물도 그대로 쑥 들어갔다.
“어휴, 또 싸우지. 이 화상들.”
나란히 앉아서 투닥거리는 두 철딱서니를 보며 에르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윈터를 향해 말했다.
“결계에 신호가 왔다.”
“그럼…….”
“그래. 네가 기다리던 자들이 도착한 모양이군.”
그 말에 윈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도로 돌아가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마냥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설렘 반 아쉬움 반이었다.
섭섭함이 뚝뚝 떨어지는 윈터의 표정에 에르퀼도 아이셀도 피식피식 웃었다.
“빨리 가봐.”
“그래, 얼른 썩 꺼져라.”
에르퀼은 원래도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아이셀은 신비감을 위해서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대현자의 제자인 것을 숨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배웅은 여기서 이뤄졌다. 윈터는 그동안 정들었던 이층집에서 두 사람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성큼성큼 언덕을 내려갔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펄럭이는 셔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윈터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곧 섬 끝에 정박한 작은 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쪽에서도 윈터를 발견한 건지, 여자 하나와 남자 둘이 내리는 게 보였다.
“……어?”
반가움에 발걸음을 재촉하던 윈터가 문득 우뚝 멈춰 섰다.
맨 뒤에 걸어오는 남자 하나가 무척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저, 가면…….”
어디선가 많이 본 토끼 가면이었다.
‘누구 좀 만나러 왔어.’
‘아하, 친인척?’
‘그건 아니고…….’
말끝을 흐리던 목소리는 다시 떠올려 봐도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음, 주인님이랄까?’
설마 그 주인님이라는 게 자신이었다니.
그러니 제 이름도 알았던 거였다. 새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나왔다.
세 사람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다가오는 사람들 모두 모르는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윈터의 시선은 줄곧 맨 뒤의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하나 더 있었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보란 듯이 제 가면을 벗은 것이었다.
가면이 얼굴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노을 지는 바다를 배경으로 천천히 숨겨져 있던 흰 얼굴이 나타났다.
동시에, 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깔도 노을에 물들어 변모했다.
마침내 마법이 풀리고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 얼굴은 윈터가 오래전부터 상상하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기도, 동시에 전혀 다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반짝이는 결 좋은 은발. 어느 오래된 펜던트를 닮은 붉은 눈동자.
충격에 빠진 윈터가 입을 틀어막았다.
“메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메이딜리언의 눈이 크게 휘었다.
곧 슬쩍 시선을 흘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바.’
“……바?”
‘람.’
바람? 바람이라고? 이어지는 말을 해석하고자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둥.’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참나.”
‘이.’
윈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이 저를 보고는 바람둥이라니. 8년 만에 만나 나누는 인사치고는 꽤 싱거웠다.
* * *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가씨. 저는 히르칸이라고 합니다.”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이어서 그가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순서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데보라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인 데보라가 인사했다.
슬쩍 자신을 향하는 데보라의 자줏빛 눈동자에 적의가 담겨 있음을 알고 윈터는 의아해졌다.
데보라는 원작에서도 나왔던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제니마 상회에서 키워진 한타의 수양딸쯤이라고 하면 되려나.
원래라면 제니마 상회에 있어야 할 인물이 왜 공작가의 비밀 호위대가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자신조차 죽지도 않고 살아 있는 마당에 이제 와 이런 자잘한 것들을 원작과 비교해서 뭐 하나 싶은 윈터였다.
그나저나 데보라는 소설 속에서 메이딜리언에 대한 충심이 굉장히 투철한 인물이었는데, 그런 자가 왜 자신을 적대하는지 윈터는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전부터도 알던 사이면 모르겠지만,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그리고 여기는 딜런입니다.”
히르칸의 손이 메이딜리언에게 향했다.
“딜런이라.”
비밀 호위대에서 쓰는 가명에 어이가 없어진 윈터가 혀를 찼다.
진작 자신이 죽고 멸문했어야 할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멀쩡한 것도, 심지어 비밀 호위대가 되어 있는 메이딜리언도 어이가 없었다.
황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해 물밑에서 활동할 때 쓰던 가명을 비밀 호위대에서 쓰는 건 더 황당했다.
“참나.”
이 와중에 윈터는 문득, 8년 전 블라디미르 공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 멋대로 굴려도 상관하지 않을 게냐?’
‘나는 제 밥벌이도 못 하는 식충이는 키우지 않아.’
밥값은 하게 시키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그게 설마 비밀 호위대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가시죠, 아가씨.”
오랜만에 만나는 아가씨를 위해서 공작가는 잔뜩 힘을 들였다.
누트라 섬에서 작은 배를 타고 마누트 섬에 가자 거대한 여객선이 정박해 있는 것이 보였다.
아주 가끔 칼리스타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들여올 때 쓰는 배보다도 두 배는 더 큰 여객선에 섬사람들이 멀찍이서 웅성거렸다.
“설마 타는 사람이 이게 전부야?”
배에 오르며 윈터가 작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히르칸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예. 혹시 따로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선원들을 제외하면 정작 탑승객은 윈터와 비밀 호위대 셋뿐이었다. 더 데려가고 싶은 사람이 있냐는 물음에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윈터에게 닿았다.
“아니. 됐어.”
8년 만에 봐서 그런가. 새삼 공작가의 돈지랄이 대단하구나 싶은 윈터였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윈터는 황도를 감싸고 도는 대운하를 통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배가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윈터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빠르게 말했다.
“일단 난 좀, 쉬어야겠어.”
그러고는 안내받은 객실로 들어가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안에 들어간 윈터는 완전 패닉에 빠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줄곧 멍하던 머리가 서서히 사태 파악을 끝내는 중이었다.
마누트 섬을 동행한 몸매 미남이, 사실은 메이딜리언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신이시여!”
덕분에 윈터는 오랜만에 신을 찾았다.
낮에 만난 그자가 비밀 호위대인 건 딱히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 비밀 호위대가 메이딜리언인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혹시 자신이 추태를 부리거나, 메이딜리언을 홀대하거나, 사기를 친 건 없는지 점검하느라 윈터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틈틈이 토끼 가면의 몸매를 훑어보거나, 보면서 흐뭇하게 웃거나 하던 추태를 떠올리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쳤지. 내가 미쳤어.”
당장 주먹을 입에 넣고 엉엉 울기라도 할 것 같은 윈터를 말린 것은 노크 소리였다. 문밖의 기척에 윈터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듯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들어와.”
그리고 몸을 돌리자마자 굳어버렸다. 객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 다름 아닌 메이딜리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