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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150)

20화

상대가 미남일 거라는 느낌이 오자 윈터의 눈이 다시금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난 거지?

에르퀼의 말을 개무시하고 마력을 펑펑 써가며 마누트라 섬 곳곳을 헤집고 다녔던 윈터였다.

그런데 그동안 이런 남자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혹시 여긴 처음이야?”

“맞아.”

두 사람은 곧 자연스레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놀러 올 만한 곳은 아닌데.”

“누구 좀 만나러 왔어.”

“아하, 친인척?”

“그건 아니고…….”

말끝을 흐린 남자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음, 주인님이랄까?”

“뭐?”

윈터가 가슴이 철렁해서 되물었다.

저 위험한 목소리로 저런 위험한 말을 하다니.

남자가 픽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윈터도 간신히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뭐야, 농담이구나?”

딱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윈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게 여러 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나려던 사람은 만났어?”

“……응.”

“잘됐네.”

희미하게 웃으며 말하는 윈터의 얼굴에 남자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곧 그가 물었다.

“그쪽은 원래 여기 살아?”

“뭐, 비슷해.”

“이건 다 선물인가? 되게 많네.”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저 짐도 처음엔 반반씩 나눠 들거나 아니면 윈터 혼자 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물건을 돌려주러 왔으면서, 윈터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하며 토끼 가면은 그 많은 짐을 저 혼자 다 들었다.

그녀 혼자서는 벅차기 그지없던 물건들을 가볍게 드는 모습에 윈터의 눈빛이 한층 더 빛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맞아, 챙겨줄 사람이 많거든.”

윈터는 토끼 가면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자신을 칭찬했다.

“내가 좀 착한 편이라서.”

만약 에르퀼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말이었다. 보나 마나 착하기는 개뿔이. 라고 이죽거리셨겠지.

다행히 토끼 가면은 착하다는 윈터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순진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윈터는 그에게 마누트 섬 이곳저곳을 설명해줬다.

원래 별로 말이 없는 것인지, 남자는 종종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만 할 뿐이었지만 워낙 눈이 즐거워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희한한 건 남자가 음식 파는 데만 보면 멈춰서서는 윈터에게 꼭 하나씩 사서 건넸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고맙다며 하나씩 받아먹었던 윈터였지만, 점점 주는 양이 많아지니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저기, 나 이제 배 터질 것 같은데.”

“…….”

그 말에 토끼 가면이 움찔 놀랐다. 전혀 생각도 못 한 것 같은 반응에 윈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 배탈 난다고.”

설탕이 코팅된 과일이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걸 지그시 바라보며 윈터가 힘주어 말했다.

곧 반짝이던 과일이 사라졌다. 그때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 사람이 먹는 건데.”

뭐야, 이 자식. 몸매는 착한데 주둥이는 못됐잖아? 배탈이 나든 말든 일단 넣고 보라는 거야, 뭐야?

윈터가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에 흠칫 어깨를 굳혔다.

‘그, 그러다 배탈이라도 나시면…….’

‘괜찮아, 괜찮아. 다 사람이 먹는 건데, 뭘.’

언젠가, 그런 대화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함께 시내를 누비며 신나게 먹고 마시고 뛰놀던 기억. 생각해보니 이상한 불량배들에게 시달렸던 것도 비슷했다.

묘한 기시감에 윈터가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깨운 것은 토끼 가면이었다.

“머무는 건 어디서 머물러? 데려다줄게.”

양손 가득한 짐을 들어 보이며 묻는 말에 윈터가 대답했다.

“안 머물러. 오늘 떠나거든.”

“그래? 아쉽게 됐네.”

성인이 되는 날을 앞두고 윈터는 공작가로 연락을 취했다.

이제 황도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공작가에서 그녀를 데리러 사람들이 오는 날이었다.

물론 윈터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 가겠지만, 아직 그녀의 능력은 에르퀼 외에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 없었다.

8년 만에 만나는 딸을 안전하고 빠르게 만나고 싶었던 블라디미르 공작은 당연히 자신의 비밀 호위대 중에서도 최정예만을 꼽아 보냈다.

곧 그들을 만나야 할 시간이었다.

“이만 여기서 헤어질까?”

윈터가 한적한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마력으로 만든 새를 타는 장면을 보여주는 건 좀 그래서, 적당한 곳에서 헤어질 작정이었다.

“신기하네.”

그때 남자가 말했다.

“응? 뭐가?”

“이름도, 얼굴도 안 궁금해하잖아.”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묻는 말에 윈터가 작게 웃었다.

“알면 더 아쉬울 것 같아서.”

이렇게 오래 여기저기 다니며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윈터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랑 이렇게 편하게 오래 대화를 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너도 내 이름 안 물어봤는데?”

윈터가 장난스레 되묻자 남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난 안 물어봐도 되거든.”

“응? 그게 무슨…….”

그때 예고도 없이 남자가 훅 가까이 다가왔다.

뭔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가늘게 뜬 눈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와닿았다.

이상하다. 눈동자 색이, 아까는 분명 녹색이었는데……?

언뜻 붉게 반짝이는 것 같아 윈터가 집요하게 가면 속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그녀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남자의 눈동자는 여전히 녹색이었다.

“역시, 이제는 작네.”

남자는 그사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줄곧 들고 다니던 짐을 가지런히 윈터 앞에 내려두었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어.”

“어? 어어.”

가볍게 손을 흔든 남자가 곧 몸을 돌렸다.

그러나 윈터는 그곳에서 못 박힌 듯 굳은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쟤, 방금…….”

조금 전 남자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또 만나, 윈터.’

그건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 * *

“걔는 대체 뭐였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법 새 위에 드러누운 윈터가 홀로 중얼거렸다.

금발의 녹색 눈.

몸매가 군침 돌게 끝내주던 그 남자가 자꾸만 그녀의 생각을 붙잡고 늘어졌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헤어질 때까지 모든 게 모호했다.

이런 미남을 또 어디서 만날까 싶어 일부러 이름도 안 물어보고, 얼굴도 보여달라고 안 했는데 그게 새삼 후회가 되었다.

“그냥 보여달라고 할 걸 그랬나.”

영 찝찝한 마음을 가지고 윈터가 누트라 섬에 안전하게 착지했다.

언덕길을 올라 소담한 이층집 문을 벌컥 열자마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막 계단을 내려오던 얼굴이 무척이나 반가웠기 때문이다.

“아이셀 언니!”

“오랜만이다, 망아지야.”

비죽 웃은 아이셀을 보고는 윈터가 와다다 달려가 와락 안겼다.

그러자 아이셀의 미소가 짙어졌다.

“무겁다, 저리 가라.”

여전히 말투는 퉁명스러웠으나 윈터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그걸 알기에 윈터도 그저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사실 두 사람이 이렇게 친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엔 분명 마법사님, 마법사님 하면서 아이셀을 따르던 윈터였다.

그러나 마누트라 섬으로 오게 되면서 두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부딪혔다.

아이셀은 원래부터 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매사 냉소적이었다.

몸이 아파 잔뜩 예민해져 내숭이라고는 대번에 집어치운 윈터와 상성이 맞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 큰 어른이 어린 애를 끝까지 이겨 먹으려고 하는 거 너무 웃기지 않아?’

‘호오, 너같이 건방진 망아지는 처음이구나. 아주 본때를 보여주지.’

‘흥! 그러시든가.’

에르퀼이 시끄럽다며 둘 다 내쫓은 적이 여러 번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도록 많이 싸웠다.

다행히 이번에도 시간은 약이 되어 주었다.

싸우다 정든다는 게 이런 것일까.

놀랍게도 두 사람은 점점 서로를 이해하게 되며 나름 절친이 되어갔다.

덕분에 지금은 오랜만에 만나면 뜨겁게 포옹 정도는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짐은 다 챙겼냐?”

“응? 아니. 어차피 거기 가면 다 준비되어 있을 텐데, 뭐. 그리고 언제 여기로 또 오게 될지 모르잖아.”

히히 웃는 윈터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이셀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봉인이 좀 흔들린 것 같은데, 설마 또 그 무지막지한 새 같은 걸 만들고 논 건 아니겠지?”

윈터가 뻑 하면 마력을 이용해 새를 만들어 온 동네를 쏘다닌다는 걸 아이셀이 모를 리가 없었다.

“왜 아니겠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하는 말에 아이셀은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너 진짜……. 스승님한테 한 소리 듣지 않았냐?”

“들었지.”

“근데도 그런다고?”

“그 정도로는 끄떡없다니까.”

윈터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내며 볼꼴 못 볼 꼴 다 보고 나니 사람 싫어하는 에르퀼도 윈터에게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원래도 겁이 없는 윈터가 저를 예뻐하는 대현자에게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하여간, 스승님을 안 무서워하는 사람은 너뿐일 거다.”

아이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나 곧 다시 진중한 얼굴이 되어 경고했다.

“그래도 조심해라.”

“응, 그럴게.”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지만 윈터는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대현자와 그녀의 제자까지 달려들어 한 연구는 반만 성공했다.

무한으로 마나를 빨아들여 재생산하는 윈터의 체질을 바꿀 수는 없었지만, 마력을 빨아들이는 구멍 자체를 작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윈터의 심장에 자리한 열두 개의 봉인. 그것이 그녀의 마력 폭주를 막아주는 금제였다.

그 봉인 덕분에 윈터의 심장은 마력 개화를 마치고도 멀쩡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고난 체질과 재능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기에, 윈터는 여전히 펑펑 마력을 써도 별로 지치지 않았다.

“언니는? 갔던 일은 잘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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