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애초에 마력으로 만든 새를 이용해 대륙을 횡단하는 무지막지한 짓은 그녀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걸로 황도에 있는 제니마 상회에 연락을 취했고, 메이딜리언에게 보낼 편지와 선물들을 전달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메이딜리언에게서는 답장 한번 없었다.
어쩌면 아파서 쓰러져 있는 동안 마음이 많이 상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원래도 망한 인성을 제게도 드러내는 건지도 모르고.
윈터는 애써 상심하지 않으려 자신을 달랬다.
‘자, 잘…… 클게요. 정말 잘 커서, 만나러 갈게요, 아가씨. 알겠죠?’
그래도 어릴 땐 애가 참 착했는데. 자꾸 생각해봤자 괜히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정말 잘 컸을까?”
원작에 나오는 메이딜리언도 아마 이 시기쯤일 것이다.
잠시 다 자란 메이딜리언을 상상하며 윈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참나. 그렇게 좋아하면서 무슨 애인이 아니라고.”
평소와 달리 헤실헤실 풀어진 윈터의 얼굴을 보곤 리어트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윈터는 금세 정색하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애인은 아니고, 그냥 내가 응원하는 사람이야. 그나저나 오늘 왜 이렇게 툴툴대?”
“제가요? 제가 언제요? 전 항상 단주님만 바라보는 일편단심 해바라기인데, 단주님은 애인 말고는 관심도 없으시니까 그런 거 아닐까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불평에 윈터가 까르르 웃었다.
리어트야 반쯤 진심을 담아 한 소리였지만 윈터는 그 말이 순전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그러지 마. 곧 만나게 될 거야.”
아니, 만나기만 하겠는가.
윈터는 칼리스타를 통째로 메이딜리언에게 바칠 작정이었다.
그가 황제가 되는 데에는 정보는 물론이고 물밑에서 더러운 일을 맡아줄 그림자가 필요할 테니까.
혹시나 윈터 자신이 죽더라도 이들은 제니마 상회 사람들과 함께 메이딜리언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정말 그 녀석이 우리가 원하는 걸 이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장난스러운 낯은 집어치우고 리어트가 물었다.
대륙에서 수인족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자기들과 다른 외형을 경외시하거나 배척했다.
안타깝게도 수인족은 배척당하고 차별당하던 역사가 길었다.
리어트 또한 이 작은 섬에 처박혀 살아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렇게 되게 할 거야.”
원작에서도 메이딜리언은 수인족 수하들을 여럿 두었다.
귀족들을 기반으로 한 1황자와 대립하기 위해서는 전혀 반대급부의 세력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윈터는 귀족 세력도, 그 반대되는 세력도 모두 메이딜리언의 앞에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혹여나 누구라도 섣불리 배신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메이딜리언 혼자 고독하게 황좌를 위해 싸우지 않도록.
“황도에 배치되는 인원은 지금보다 두 배로 더 늘려.”
서류 검토를 마친 윈터가 말했다. 작게 미간을 찌푸린 리어트가 되물었다.
“그렇게나 많이?”
“응. 아마 견제해야 할 세력이 한둘이 아닐 거라서.”
“알았어. 근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할 거야.”
“괜찮아. 천천히 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그녀를 따라 리어트가 시선을 옮겼다.
“어디 가?”
“선물 사러.”
“내 것도 사줄 거지, 여보?”
“넌 네 돈으로 사.”
리어트의 농담을 가볍게 걷어찬 윈터가 몸을 돌렸다.
“같이 가줄까?”
킬킬 웃던 리어트가 은근슬쩍 물었지만 윈터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니, 혼자 갈래. 그럼 나 있을 때까지 우리 길드 잘 부탁해.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담백한 작별 인사였다.
곧 칼리스타 본부를 빠져나온 윈터가 사람들 틈에 빠르게 섞여 들어갔다.
시간 맞춰 원하는 물건을 사려면 한시가 급했다.
시장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윈터의 손에는 양손 가득 무겁게 짐이 들려 있었다.
무려 8년 만에 얼굴을 보는 공작가 사람들을 떠올리며 특산물이며 특이한 장식물 같은 걸 한가득 골랐기 때문이었다.
“……흐음.”
맘에 쏙 드는 새하얀 단검까지 구매한 윈터의 눈빛이 한순간 서늘해졌다.
사람들로 가득한 길이었지만, 그녀의 뒤를 쫓는 기척이 느껴졌다.
씨익 웃은 윈터가 태연하게 발을 놀렸다.
곧 그녀는 으슥한 골목길에 다다랐다. 앞이 꽉 막힌 막다른 길이었다.
마누트라 섬을 제 손바닥처럼 훤히 들여다보는 윈터였기에, 그녀가 이곳으로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 귀여운 아가씨? 잠깐 우리랑 얘기 좀 하지?”
왜 이런 애들은 어딜 가나 한둘씩 있는 걸까. 칼리스타의 단주가 되면서 나름 마누트라 섬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낄낄 웃으며 골목 입구를 가로막은 대여섯 명의 남자를 보며 윈터가 혀를 쯧쯧 찼다.
“이런 건 또 오랜만이네.”
양손 가득 들고 있던 물건들을 옆으로 차곡차곡 정리해 내려두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전에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누트라에서 검은 머리 여자를 조심하라는 소문은 못 들었니?”
“뭐? 푸하하! 그건 설마 그쪽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
설마 윈터가 일부러 자신들을 골목길로 유인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남자들이 낄낄 배를 잡고 웃었다.
이내 웃음을 뚝 멈춘 남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윈터와 거리를 좁혀왔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당연히 윈터가 잔뜩 구매한 물건들과 그러고도 여전히 두둑한 주머니였다.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 싸움이었으나 윈터는 전혀 겁에 질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여유롭게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멋모르고 덤비다간 손목 하나씩은 내놔야 할…….”
그때였다.
골목 끝에 소리 없이 등장한 남자가 있었다. 윈터는 하던 말도 다 잇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의 반을 토끼 가면으로 가린 금발 머리의 남자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반사적으로 윈터가 그를 꼼꼼히 살폈다.
군더더기 없이 붙은 근육과 예쁘게 균형 잡힌 몸. 줄곧 못 박힌 듯 마주치는 가면 속 눈동자는 녹색으로 반짝였다.
“……와우.”
애써 긴장감을 덜어내기 위해 윈터가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다가오는 남자는 방금까지 그녀를 겁박하던 건달들과는 압박감 자체가 달랐다.
언제든 상대의 숨통을 끊어낼 준비를 하고 있는 화살촉을 바로 코앞에서 마주한 느낌.
팽팽하게 당겨진 살기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설마, 한패인가?
“어이, 거기 너,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꺼지시지?”
다행히 그녀의 불안은 건달 하나가 금세 가라앉혀 주었다.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컁컁 짖는 건달을 보면서도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남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런데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자식이.”
“그 웃기지도 않는 가면은 뭐……으, 으아악!”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토끼 가면의 남자에게 손을 뻗던 건달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토끼 가면이 그대로 상대의 손목을 잡아채 뒤로 꺾었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골목에 우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약간의 악력만으로 건달 하나를 무력화시키는 위력에 나머지 건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한순간의 만용으로 손목을 잃은 건달은 거품을 물고 그대로 기절했다.
“괴, 괴물…… 괴물이야!”
“흐아아악!”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건달들은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도망쳤다.
토끼 가면은 굳이 애써서 그들을 잡지 않았다. 대신 여전히 골목에 남아있는 윈터에게 시선을 고정했을 뿐이었다.
“아, 하하하.”
윈터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대로 저 인간이랑 싸워야 하나? 괜히 귀찮아질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윈터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토끼 가면과 눈을 마주치고는 흠칫 굳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이 남자가 자신을 해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제게만 고개를 숙인 맹수를 마주한 것 같은 느낌에 잠시 눈을 굴리던 윈터가 대뜸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풀어 내밀었다.
“여기.”
무려 80만 제닌이라는 거금을 들여 산 단검이었다. 그러나 목숨보다는 중요하지 않았다.
“도와준 답례야.”
“…….”
남자는 한참 동안 말없이 단검을 내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윈터는 치열한 고민에 시달렸다.
그냥 지금이라도 시원하게 한 대 갈길까?
슬슬 고자킥이라도 먹이고 튀자, 쪽으로 윈터의 마음이 기울었을 때였다.
남자가 순순히 윈터가 내민 검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잘 쓸게.”
심지어 대답도 한다.
짤막하게 나오는 목소리가 귀에 달큰하게 감겼다. 그 낮은 음성에 윈터의 귓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핫, 나, 난 그럼 이만.”
윈터는 자연스레 남자를 지나쳐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한참을 걸어가던 윈터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 내 선물……!”
너무 당황해서 잊고 있었는데 공작가 사람들 주겠다며 온 섬을 헤집고 다니며 샀던 물건들을 죄다 그 골목에 두고 온 탓이었다.
윈터는 또 한 번 고민에 빠졌다.
“지금쯤이면 왠지 그 토끼 가면도 가고 없을 것 같은데…….”
“……저기.”
“설마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닐 거야.”
“저기, 이거.”
“예? ……헉!”
심각한 얼굴로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를 누가 뒤에서 톡톡 쳤다. 반사적으로 돌아봤던 윈터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토끼 가면이 어느새 지척에 다가와 있던 탓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
남자는 말 없이 양손 가득 들고 있던 물건을 들어 보였다. 뭔가 하고 보니 윈터가 잃어버렸던 바로 그 물건들이었다.
“어? 이거 설마……. 나한테 돌려주려고 온 거야?”
윈터의 물음에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윈터는 그저 얼떨떨했다.
자신이 혹시 이 토끼 가면을 오해하고 있던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이 남자가 여태 자기한테 무슨 해를 끼치거나 한 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도와주면 도와줬지.
조금 무섭긴 해도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인가 싶어서 윈터의 경계심이 살짝 옅어졌다.
공포심이 조금 가시고 나니 확실히 착한 사람 같기는 했다.
특히 몸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