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50)

17화

곧 윈터가 통신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붉은 마석이 점멸했다.

“메이……?”

윈터가 조심스레 메이딜리언을 불렀다.

통신석이 연결되었는데도 반대편에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드디어 메이딜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만으로도 윈터는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안도와 별개로 요 며칠 사이 메이딜리언의 목소리는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아가씨가 살아날 방법이 있다는 말에 공작가 사람들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추고 난리였으니 아마 윈터가 곧 떠날 거라는 것을 메이딜리언도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 있잖아…….”

조심스레 말문을 연 윈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분명 스스로도 괜찮을 거라고, 연구가 보란 듯이 성공해서 다 나아 건강한 모습으로 메이딜리언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윈터는 메이딜리언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윈터는 자신보다 메이딜리언이 더 걱정되었다.

혼자서도 이미 너무 잘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막상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가 원작과는 다른 더없이 행복한 결말을 맞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전 괜찮아요, 아가씨!]”

그런 윈터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메이딜리언이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아가씨가 영영 안 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치료하러 가는 것뿐이잖아요. 그렇죠?]”

“그럼. 당연하지.”

윈터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메이 넌 분명 잘할 거야. 내가 이미 준비 다 해놨으니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제니마 상회에 도움을 구해. 알겠지?”

“[네, 그럴게요.]”

씩씩하기 짝이 없는 메이딜리언의 목소리에 내내 아프도록 긴장하고 있던 윈터의 어깨가 느슨해졌다.

곧 두 아이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담담하고, 소소하고, 마치 내일도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금세 그리워질 목소리를 들으며 윈터는 애써 울적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연구가 성공하든 안 하든 상관없었다. 성공한다면 더 오래 메이딜리언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고,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8년은 도울 수 있으니까.

육지와는 연락 닿기도 힘든 외딴 섬에 갇히더라도 반드시. 어떻게든 길을 찾아내리라.

어둠 속에서 윈터의 금빛 눈동자가 맹수처럼 빛났다.

* * *

다음 날, 윈터는 마차 앞에서 공작가 사람들의 배웅을 받았다.

“아가씨. 밤늦게까지 깨어 있지 마시고, 이상한 책도 그만 읽으세요. 아셨죠?”

나일라는 흐트러진 옷을 여며주며 윈터에게 당부했다.

“알았어. 나일라도 휴가 좀 적게 다녀.”

휴가를 빙자한 비밀 호위대 임무 때문에 종종 다쳐오는 나일라를 알기에 윈터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 새 부리 같은 입술을 톡 두드리며 나일라가 후후, 옅게 웃었다.

“네, 그럴게요.”

집사와 주치의, 주방장까지 전부 나와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딘지 시원섭섭해 보이는 얼굴들을 윈터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꼭꼭 눈에 담았다.

그리고 마지막은 당연히 블라디미르 공작이었다.

“내 아기, 건강하게 돌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윈터를 꼭 안아주며 블라디미르 공작이 코를 훌쩍였다.

이미 전날 밤에 혼자 펑펑 운 듯 눈가가 잔뜩 부어 있었다.

철혈의 공작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여린 어머니의 모습에 윈터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녀오겠습니다!”

손을 크게 붕붕 흔든 윈터가 이내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기 전, 문득 윈터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별채에서 격리 중이기에 윈터를 만나러 올 수가 없었다.

이미 어젯밤에 한참 인사를 했으면서도 괜히 서운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흐응, 그 울보 꼬마라도 찾는 거냐?”

“맞아요.”

아니라고 시치미를 뗄 줄 알았는데, 윈터는 순순히 인정했다.

시무룩한 윈터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아이셀은 금세 마음이 불편해졌다.

“시간이라는 건 상대적이지. 섬에서 지내다 보면 10년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있을 거다.”

“제가 성년이 되기까지 8년밖에 안 남았다는 건 알고 계신 거죠?”

“……나의 이 유능함으로 시간은 최대한 단축해 보지.”

그러나 윈터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그 지루한 섬에서 제가 뭘 하면서 지내야 할지 벌써 막막한데요.”

“할 게 왜 없어?”

“그럼 사람도 없는 그 외딴 섬에서 할 게 뭐가 있어요?”

“사람은 없어도 할 건 아주 많을 거다.”

아이셀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윈터가 뭔가 말하려는 찰나, 공작가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뭐? 지금 그게 무슨, 아니……다고?”

“이럴 때가 아니야. 당장…….”

“너는……와!”

갑작스레 분주해지는 사람들을 보느라 윈터가 마차의 창문 밖으로 목을 쭉 내밀었다.

“뭐지? 무슨 일 있나?”

“그러다가 다친다. 얼른 얌전히 앉아라, 망아지야.”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가는 기사들이 보였는데, 그 목적지가 어디인지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아이셀의 만류에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흐음.”

기사들의 행방을 고민하던 윈터는 저택 오른쪽으로 돌면 뭐가 있나 생각을 해보았다.

연무장이랑, 마구간이랑, 식료품 창고도 그쪽 아니었나?

“도둑이라도 든 걸까요?”

“글쎄. 누가 거하게 사고라도 쳤을지도 모르고.”

아이셀은 뭔가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죽 웃었다.

그 얼굴에 윈터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일부러 선택지에서 제외한 것이긴 한데, 저택 오른쪽 뒤에는 별채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거기엔 메이딜리언이 머물고 있었다.

“혹시 메이가…….”

거기까지 중얼거린 윈터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말이 씨가 될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별채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윈터가 재차 아이셀에게 물었다.

“널 보고도 모르겠냐? 겉으로 보는 게 다가 아니란다.”

“그건 또 무슨 뜻이에요?”

“그 울보 꼬마는 네가 없어도 알아서 잘 자랄 거라는 뜻.”

아이셀은 별채에서 봤던 매서운 눈빛의 어린 맹수를 떠올렸다.

하도 윈터가 싸고돌길래 뭐 얼마나 어리숙하고 해맑은가 싶었는데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독사 같은 꼬마였다.

‘어린 게 벌써…… 위험한 걸 익혔군.’

별채 주위로 무성하게 자라 있던 풀들이 죄다 누렇게 죽어 있는 것을 보며 아이셀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블라디미르 공작가는 어떻게 생겨 먹은 가문이길래 마력을 개화하는 꼬맹이들마다 전부 이 모양이란 말인가.

‘이딴 능력은 필요도 없는데.’

제 손을 내려다보며 음울하게 중얼거리는 꼬맹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 작달막한 머리를 꾹 누르며 아이셀은 말했었다.

‘그럼 다른 쪽으로 잘 개발해 봐라. 기왕이면 네 아가씨에게 도움이 되도록.’

아가씨라는 단어에 마법처럼 혼탁하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그 섬뜩한 모습에 아이셀은 혀를 내둘렀다.

살아만 있다면, 두 녀석 모두 미래가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 * *

황도에서 동쪽 끝까지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물론 마차로 가는 것은 제일 먼저 기각되었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제안한 의견은 마법이었다.

기왕 초빙한 마법사도 있는 김에 한 번에 뚝딱 마누트라 섬으로 가는 게 어떻냐는 것이었는데.

우선 마누트라 섬에는 대현자 에르퀼이 결계를 쳐두었기 때문에 마법으로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블라디미르 공작이었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 갖은 보화들을 바리바리 싸준 덕분에 윈터의 짐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아이셀은 루비로 공기놀이는 하고 싶어도 그 루비를 제 귀한 마력을 써 가며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니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황도 남쪽으로 트인 대운하를 통해 바다까지 나가는 것이었다.

“와, 저게 뭐야?”

“어느 귀족가에서 통째로 빌렸다는데?”

“그럼 당연히 블라디미르 공작가겠군!”

대운하에 정박된 거대한 배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하지만 누구는 감탄을 금치 못하는 배의 모습이 윈터의 눈에는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말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미련이 잔뜩 남아 배에 올라타는 것 자체를 미적거리며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리 안 탈 거냐. 다들 널 기다리고 있는데.”

뭘 두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윈터를 보다 못한 아이셀이 한마디 했다.

“……알겠어요.”

한숨처럼 대답한 윈터가 이내 배 위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하를 따라 천천히 배가 움직였다.

그때였다.

“아가씨!”

커다란 목소리에 윈터가 휙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 메이딜리언이 있었다.

대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건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에 윈터가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목에 걸고 있던 통신석에서 반짝 빛이 났다.

“메이! 너 대체…….”

“[흐흡.]”

뭐라 말하려던 윈터가 멈칫했다.

통신석 너머에서 메이딜리언이 작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의 의연한 모습과는 다르게 메이딜리언은 거칠게 제 눈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아가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을게요!]”

메이딜리언은 밤새 준비했던 말들을 벅찬 가슴을 내리누르며 외쳤다.

“[자, 잘…… 클게요. 정말 잘 커서, 만나러 갈게요, 아가씨. 알겠죠?]”

윈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눈물로 번진 메이딜리언의 시야에도 똑똑히 들어왔다.

“그래, 메이딜리언. 널 기다릴게.”

“[……다녀오세요, 아가씨.]”

“응! 안녕, 메이.”

그렇게 두 꼬마는 헤어졌고, 8년이 흘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