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아가씨가요……?]”
다행히 이번엔 메이딜리언의 반응이 조금 긍정적이었다.
마치 메이딜리언이 자신을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윈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꼭 널 만나러 갈게.”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드디어 나온 차분한 대답에 윈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위험한 고비 하나를 넘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제가 마력을 개화할 거라는 걸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어? 어어, 그건, 그러니까, 으음…….”
위기는 금세 또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윈터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말을 던졌다.
“마, 마법사님이! 마법사님이 알려 주셨…….”
애석하게도 윈터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그 입에서 나온 ‘마법사님’이라는 말에 아이셀이 환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윈터는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만사 불평불만 많은 인간이 웃다니. 왜지?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마법사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가씨도 치료해주고, 이런 신기한 물건도 만들어내셨잖아요.]”
“그, 그렇지? 하하하.”
어색하게 웃은 윈터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전히 옆에서 집요하리만치 반짝거리는 아이셀의 눈빛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저 인간 앞에서 더 대화를 이어가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불렀다.
“저, 메이?”
“[네, 아가씨.]”
“나 이제 약 먹을 시간이어서 말이지. 우리 내일도 또 연락하자.”
“[알겠어요, 아가씨.]”
담담한 목소리에 윈터가 작게 미소 지었다.
울보 꼬마라는 말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생각보다 메이딜리언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대견하기도 하면서 안심이 되었다.
“그래. 식사 거르지 말고. 알겠지?”
“[아가씨도요.]”
곧 통신석의 불빛이 잦아들었다. 윈터의 방도 고요해졌다.
“흐음.”
“하, 하핫.”
어느새 아이셀의 반짝이는 눈빛이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보시죠?”
“참 대단한 마법사님이야, 그렇지?”
“무, 뭐가요?”
“감히 대현자가 와도 모를 마력 개화 시기를 딱딱 맞추고, 게다가 애초에 누가 마력을 개화할 줄도 알았다는 게 정말 대단하지 않니?”
윈터가 손뼉을 짝 치며 감탄했다.
얼굴에는 한껏 어린이 같은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와아, 그러게요! 정말 대단한걸요!”
“모른 척하지 마라, 망아지야.”
“뭘 모른 척한다는 말씀이세요……? 전 그저 메이가 걱정돼서 그럴듯하게 변명한 것뿐……”
말을 하면 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걸까.
후훗, 하고 웃는 재수 없는 아이셀의 미소에 윈터는 끝내 문장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이제 아예 의자에 등을 편하게 기댄 아이셀이 먼 옛일을 떠올리는 듯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오래전, 스승님과 처음 만난 날 내가 제일 먼저 들은 말이 무엇인 줄 아느냐.”
“뭔데요……?”
“‘쓸 만한 마법사가 나타났다기에 와봤더니, 검은 머리가 아니구나.’”
“…….”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시의 아이셀은 대현자의 뒤를 이을 세기의 천재라 일컬어졌다.
누구보다도 특별했으며, 누구보다도 대단한 아이. 온 세상이 그녀를 칭송했다.
그런데 정작 뒤늦게 나타난 대현자라는 사람은 그런 아이셀을 보며 실망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린 나이에도 그게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고 마음이 불편하던지. 아이셀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 말을 잊지 못했다.
“대현자 에르퀼 모네스티에는 일곱 가지 예언을 했다. 몇 가지는 알려졌고, 몇 가지는 아직 비밀이지. 내게도 스승님께서 예언 하나를 주셨다.”
윈터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뭔가를 생각하고 계산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처럼, 이 뒤로 이어지는 말을 듣는 건 위험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을 삼킬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금빛 눈의 까마귀. 그자가 바로…….”
지옥의 파수꾼처럼, 달빛을 등진 아이셀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결말을 벗어나는 자’이다.”
하늘에서 내려지는 선고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윈터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결말을 벗어나는 자.’ 어쩐지 그 말이 지금 제가 하는 일과도 닿아 있는 것 같았다.
한편 아이셀은 제 눈앞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이 역력한 커다란 금빛 눈동자.
어둠에 가득 물든 검은 머리카락. 대현자의 예언과도 꼭 닮은 이 아이가 어째 제 앞에 와 있는가. 왜 이리도 자꾸만 마음이 뒤틀리는가.
우습게도 이 감정이 질투와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이셀은 더 크게 웃었다. 스스로를 비웃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그 예언 속 까마귀가 너인 것 같구나.”
“하, 하하하. 에, 에이. 그럴 리가요…….”
“그러니 약속한 대로 최선을 다해 널 살려주겠다, 꼬마야. 어디 마음껏 발버둥 쳐봐라.”
그 말에 어색한 듯 웃고만 있던 윈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당황하던 표정은 어디로 치운 건지, 금세 심드렁해져서는 아이셀을 바라보았다.
“아니, 필요 없는데요.”
까마귀니, 결말을 벗어나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에 괜히 잔뜩 쫄았었는데.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이 ‘내가 널 살리겠다’라니.
예상과 다른 반응에 아이셀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너, 너는 더 살고 싶지 않은 거냐?”
그러자 윈터가 한숨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살면 좋죠. 근데 마법사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거 알아요.”
윈터 블라디미르는 마력 개화가 끝나면 죽는다.
메이딜리언의 삶을 바꾸고자 하고 있고, 바꾸고 있는 윈터이지만 자신의 인생까지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고 있었다.
소설 속 어딘가에서 그녀가 살아날 만한 실마리라도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대현자의 예언도, ‘결말을 벗어나는 자’에 대한 것도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기만 했다.
특히 아이셀 같은 경우 원작에서 진작에 치료를 포기하고 사라진 전적이 있지 않은가.
윈터는 이제 와서 헛된 희망을 품고 싶지 않았다.
“전 그저 아프지만 않으면 돼요.”
앞으로 8년 정도면 충분했다. 충분하지 않더라도 충분하도록 만들 거였다.
“……내가 없어도 그 애는 잘할 테니까.”
* * *
최선을 다해 살려주겠다는 말이 영 허언은 아니었는지, 그 뒤로 아이셀은 약을 잔뜩 만들어두고는 연구에 매진했다.
윈터 또한 방 안에 거의 감금되다시피 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메이딜리언을 도울 방법들을 생각해냈다.
제일 먼저 윈터와 담판을 지은 것은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공작이었다.
“안된다.”
“엄마!”
윈터는 굳이 만나지 않아도 좋으니 메이딜리언을 본성으로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물론 블라디미르 공작은 단칼에 거절했다.
“만나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절대 안 만날게요. 네?”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하아, 대체 왜요? 왜 안 되는데요?”
“가까이해서 하등 좋을 게 없는 아이니까.”
그 말에 윈터의 눈빛이 달라졌다. 블라디미르 공작이 메이딜리언을 그저 하잘것없는 마구간지기의 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면 절대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만약에 블라디미르 공작이 메이딜리언이 황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라면 아마도 메이딜리언은 이 성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대대로 황가와는 대척점에 서 있던 것이 블라디미르 공작가였다.
귀족원을 대표하는 철혈 공작. 사사건건 황제와 대립하는 극악무도한 악역. 그것이 바로 이 공작가의 주인, 오필리아 블라디미르였다.
그렇기에 윈터 또한 공작이 메이딜리언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것에 대비해 제니마 상회와 빠르게 접촉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바뀌었다.
이렇게 자신이 공작가에 발이 묶여 있는 이상, 제니마 상회뿐만 아니라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힘도 가능한 한 전부 끌어다 써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윈터가 먼저 제 패를 뒤집었다.
“그 애가 황자라는 건 저도 알아요.”
“너…….”
윈터의 말이 전혀 뜻밖이었는지, 블라미디르 공작의 눈이 커졌다.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그냥 여기에 있게만 해주세요. 그 애가 다 자라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만.”
자신이 죽고 나서도, 메이딜리언을 위한 튼튼한 울타리가 필요했다.
윈터의 간절한 눈빛에 블라디미르 공작의 마음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오랜 침묵 끝에 블라디미르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윈터의 표정은 밝아졌다. 대체로 어머니가 저렇게 한숨을 쉴 때면…….
“……내 멋대로 굴려도 상관하지 않을 게냐?”
승낙이기 때문이었다.
벌써 방글방글 웃고 있는 딸을 보며 블라디미르 공작이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제 밥벌이도 못 하는 식충이는 키우지 않아.”
“그럼요. 메이가 동의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요!”
그러나 윈터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메이딜리언만큼 유능한 남자는 없으니까.
“엄마 생각보다 훨씬 밥벌이는 잘할걸요?”
제 일처럼 기뻐하며 윈터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윈터를 보던 블라디미르 공작의 표정이 금세 애처로워졌다.
“녀석, 언제 이렇게 철이 들어서는.”
고작 열 살짜리 꼬마라기엔 말도 행동도 부쩍 어른스러워진 윈터였다.
물론 전부 전생을 떠올린 덕분이지만. 블라디미르 공작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가만히 블라디미르 공작의 눈을 들여다보던 윈터가 싱긋 웃으며 그럴듯한 거짓말을 꺼냈다.
“곧 마법사님이 절 살려줄 방법을 찾아준댔어요. 그러니까 전 안 죽을 거예요,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만은 더없이 착한 딸의 위로에 블라디미르 공작은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널 믿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