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고, 윈터가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깊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운 제 몸뚱이였다.
분명 가만히 누워 있는 것 같은데도 빙글빙글 도는 듯한 머리는 덤이었다.
“으으…….”
메슥거리는 속에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쓰러진 사이 약을 얼마나 먹인 건지 입안이 온통 씁쓸했다.
“일어났냐?”
어둠 속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부스스 눈을 뜨자 희미한 시야에 서늘한 아이스 블루색 눈동자가 들어왔다. 아이셀이었다.
“……마, 법사님……?”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는 윈터를 보며 작게 혀를 찬 아이셀이 곧 몸을 일으켰다.
물 잔에 미지근한 물을 따라온 아이셀이 조금씩 윈터의 입에 그것을 흘려 넣어주었다.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굴과 달리 섬세하기만 한 손놀림에 윈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아이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흘 만에 눈 떴으면서 웃음이 나오느냐, 이 못된 망아지야.”
사흘이라는 소리에 윈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기껏해야 반나절이겠거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마법사님이 준 약 먹으면, 크흠, 괜찮았었는데요.”
잔뜩 잠긴 목소리에 헛기침을 하며 윈터가 말했다.
그러자 아이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 약은 그저 마력을 안정화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해. 불안정한 마력 덩어리와 온종일 붙어 있는데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가 있나.”
윈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셀의 말에서 이번 마력 폭주의 원인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불안정한 마력 덩어리. 그건 아마 메이딜리언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뭐, 하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혀를 차며 한탄하는 소리에 윈터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이셀의 예상과 달리 윈터는 알고 있었다.
갓 마력을 개화하는 자의 파장이 제게 별로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거라는 것을.
그리고 메이딜리언이 마력을 개화할 예정이라는 것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좀 위험하다 정도로 언급되어 있었을 뿐이라, 윈터 또한 그런가 보다 했었다.
설마 이렇게 심하게 앓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윈터!”
멋쩍은 침묵을 깨뜨린 것은 블라디미르 공작이었다.
윈터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공작이 와락 윈터를 끌어안았다.
“윈터, 내 아가! 이제 괜찮은 것이지? 그렇지?”
“네, 그럼요. 전 멀쩡해요.”
윈터가 일부러 씩씩하게 대답했다.
자신이 쓰러진 사이에 공작의 얼굴이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처럼 까칠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거면 됐어.”
애써 울음을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로 공작이 연신 주억거렸다.
몇 번 눈을 깜박인 그녀는 금세 냉정한 공작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막 깨어난 내 딸이 기뻐할 만한 소식부터 전해줘야겠지?”
“무슨 소식이요?”
혹시 메이딜리언의 소식인가?
사실 윈터는 아까부터 메이딜리언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던 찰나였다.
반색하는 윈터를 보며 흐뭇하게 웃은 공작이 말했다.
“감히 공작가 담을 넘어 널 납치하려던 무뢰배 말이다. 그놈이 지금 지하 감옥에 있단다.”
“……예?”
그러나 돌아온 소식은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
갑자기 지하 감옥? 무뢰배라니?
그나마 담을 넘었다는 게 큰 힌트가 되어 주었다.
“네가 깨어나면 선물로 주려고 내가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내버려 뒀다.”
“설마 한타……?”
“오오,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구나.”
한타를 지하 감옥에 구금했다는 소리에 윈터가 이마를 짚었다.
딸의 생각이 어떤지는 꿈에도 모르고 공작이 들떠서 속삭였다.
“손목이든 발목이든 뭐든 잘라 가지렴. 네가 좋아하잖니. 후훗.”
“……그렇게 악당처럼 웃지 마요, 엄마.”
나일라가 가끔 제게 하던 소리를 그대로 돌려준 윈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털끝 하나 안 건드린 건 잘하셨어요.”
“그렇지? 이 엄마가 온전히 네 몫으로 남겨 뒀…….”
“아뇨. 손목도 발목도 안 자를 거예요. 그 사람, 메이 삼촌이거든요.”
“……뭐?”
딸에게 특별한 선물을 줄 생각으로 들떠 있던 공작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갑자기 메이 삼촌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우선 그 아저씨 몰골 좀 구경해야겠어요.”
윈터가 바르작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채 제 몸을 반도 일으키지 못하고 그대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공작은 부쩍 야윈 제 딸아이를 부축했다. 그러고는 문 앞에 부복해 있던 기사 중 하나를 불렀다.
“행어 경.”
“예, 각하.”
“윈터를 좀 도와주게.”
방 안으로 들어온 유스터스가 윈터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사이 어지러움이 조금 가라앉은 윈터가 입술을 삐죽이며 유스터스를 불렀다.
“행어 경.”
“예, 아가씨.”
“공주님 안기는 좀 부끄러운데.”
“그러십니까?”
그러나 이 못된 기사는 그저 빙글빙글 웃을 뿐 딱히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놀리는 게 뻔해 윈터가 퍽 소리가 나게 유스터스의 어깨를 때렸다.
그래봤자 어린애의 힘이었다. 유스터스는 모기가 깨물었나 싶게 담담한 얼굴이었다.
씨알도 안 먹히는 폭력 행사에 한숨을 푹 내쉰 윈터가 다시 말했다.
“……그냥 업지.”
“예, 분부대로.”
윈터는 제가 바라던 대로 유스터스의 등에 업혀 지하 감옥에 가게 되었다.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자 횃불이 일렁이는 벽면이 보였다.
알 수 없는 축축함과 번들거림, 어딘가 음습한 비린내가 풍기는 공간이었으나 블라디미르의 핏줄과 가신답게 윈터도 유스터스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여기입니다, 아가씨.”
유스터스가 가장 안쪽 감옥 앞에 섰다.
그 안을 들여다본 윈터가 비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지하 감옥이 체질인가 봐?”
사흘 동안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자지도 못했을 한타의 몰골을 신나게 비웃어주리라 다짐했는데, 의외로 한타는 멀쩡했다.
그게 참 다행이라고 윈터는 몰래 생각했다.
“응? 이 목소리는…….”
느닷없이 감옥에 울리는 어린애의 목소리에 무료하게 벽에 기대어 있던 한타가 눈을 번뜩였다.
유스터스가 슬쩍 몸을 돌리자 등에 매달려 있던 윈터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고, 윈터가 샐쭉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아저씨.”
“오오, 꼬맹이! 너 이제 괜찮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한타가 창살을 붙들며 외쳤다.
그러자 유스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엄숙하게 경고했다.
“아가씨 앞에서 경거망동하지 마라.”
“엥? 아, 아가씨?”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듯 한타는 순진하게 눈만 슴벅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윈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어른, 대체 이 모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저러지.
“내가 아가씨야.”
“꼬, 꼬맹이 네가……?”
“응. 나 이 집 귀한 아가씨거든.”
씨익 웃는 사악한 미소에 한타는 충격에 빠졌다.
어쩐지 황자님을 동네 강아지 부리듯 한다 했더니,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자였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다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아무에게나 반말하는 말본새나 묘하게 건방진 태도 같은 것.
물론 윈터는 굳이 공작가 후계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났다.
“왜 갑자기 기사들이 달려드나 했더니, 끄응.”
이제야 모든 것을 이해한 듯 한타가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이 지경까지 되어서도 여태 몰랐다는 게 오히려 윈터에게는 충격이었다.
대체 눈치가 얼마나 없는 거야? 깊은 생각이라고는 거의 해본 적도 없고, 늘 본능대로 짐승처럼 살아온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심각한 지경일 줄이야.
서로가 서로에게 충격인 시간이었다.
“솔직히 순순히 잡혀준 건 의외였어.”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한타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던 윈터가 대뜸 말했다.
한타는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머리 두 개는 큰 거구였다.
신체 조건이 날 때부터 불공평할 정도로 뛰어났고, 그 신체에 뒤지지 않는 무예도 갖추고 있었다.
비밀 호위대 아르카에서도 무위로는 최상위에 속하는 남자가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얌전히 지하 감옥에 있었다니.
그의 의도가 뭐였든 공작가 기사들에게는 더없이 다행인 일이었다.
“소중한 황…… 아니, 꼬마님이 있는데 함부로 날뛸 수는 없지.”
씩 웃으며 한타가 말했다.
이 와중에도 윈터가 제 무위를 어떻게 아는가는 전혀 생각지도 않는 얼굴이었다.
그를 보며 속으로 쯧쯧 혀를 차던 윈터가 줄곧 저를 업고 있던 유스터스를 가리켰다.
“그나저나 둘이 인사해. 여기는 유스터스 행어 경. 메이의 검술 스승이야.”
“엉?”
갑작스러운 자기소개였다.
한타는 그걸 왜 나한테 알려주냐는 듯 맹한 얼굴로 윈터를 바라보았다.
윈터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또박또박 강조해서 말했다.
“행어 경, 여기는 한타 아저씨. 메이의 삼촌이야.”
설마 지하 감옥에서 창살 하나를 마주 보고 학부모와의 만남을 하게 될 줄 몰랐던 유스터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반면에 한타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어진 상황을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나? 내가 삼촌? 황…… 아니, 꼬마님의 삼촌이라고?’
뻐끔뻐끔 입 모양을 읽어낸 윈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타도 금시초문이겠지. 약 30분 전에 윈터가 정한 거니까.
그러나 역시 깊은 생각 따윈 하지 않는 한타다웠다.
금세 상황을 받아들인 한타가 곰 발바닥같이 두꺼운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대고는 조금 수줍게 웃었다.
‘내가……삼촌?’
샤라랑, 꽃무늬 배경이 뒤에서 찬란하게 펼쳐지는 것 같았다.
눈이 썩을 것 같은 광경에 윈터도, 제대로 된 영문을 모르는 유스터스도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반갑습니다. 메이의…… 삼촌이시라고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유스터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꾸벅 고개를 숙인 한타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이고, 예! 제가 우리 황…… 아니 메이 님의 삼촌님입니다. 하핫! 나 이거 참, 삼촌은 처음이라서 제가 너무 황송할 따름이네요! 우리 메이 님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철없는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지하 감옥에 쩌렁쩌렁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