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50)

12화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윈터는 힐끔힐끔 메이딜리언의 눈치를 봤다.

상회에서 나온 뒤로 줄곧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침울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질리도록 볼 얼굴이니 미리 친해지면 좋을 거란 생각에 한타와 둘이 뒀는데, 별로 좋은 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 험상궂은 얼굴이 역효과만 낸 것 같은데.

“메이.”

“……네.”

“혹시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슬쩍 묻는 말에 내내 땅만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던 메이딜리언이 눈을 들었다.

조금 망설이는 듯하던 메이딜리언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딱 봐도 사연 많아 보이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니.

윈터는 이런 일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성격이 못됐다.

“아니기는, 너 지금 입술 꽉 깨문 거 다 보이거든?”

“아, 안 깨물었는데요!”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메이딜리언이 바락 소리치고는 얼른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윈터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해놓고도 어이가 없는지 메이딜리언도 곧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웃음이 잦아들고 나자 메이딜리언이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제가 너무 약해서요.”

메이딜리언의 머릿속에 내내 맴돌던 사람이 있었다.

골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우람한 체구의 한타였다.

자기는 팔에 매달려 물어뜯는 게 고작이던 자들을 한 손으로 제압해버리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러고 나니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아가씨에게 부탁해 검술까지 배우고, 매일 쉬지 않고 훈련하는데도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니.

“강해질 거라고 다짐했는데……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해요…….”

메이딜리언이 다시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모습에 윈터는 애써 웃음을 꾹 참았다. 고작 아홉 살짜리 꼬맹이가 대체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는지.

심지어 메이딜리언은 10년 이내에 원작의 여주인공이 아닌 이상 감히 상대할 자가 없는 강자로 자라게 될 것이었다.

그 미래를 뻔히 아는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어깨를 도닥이며 위로했다.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 메이. 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하지만 전 너무 무서워요.”

“으음,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사실 오늘도 우리한테 비밀 호…….”

“아니요, 제가 다치는 건 별로 상관없어요. 전 아픈 거에 익숙하니까요.”

드물게, 윈터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메이딜리언이 도리질을 쳤다.

아픔에 익숙하다고 말하는 표정은 나이답지 않게 담담했다.

“그렇지만 아가씨는 아니잖아요.”

“어……?”

번쩍 고개를 든 메이딜리언의 얼굴에서 윈터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겁에 질려 애처롭게 떨리는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한 두려움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는, 저는 아가씨가 저 때문에 다칠까 봐, 근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까 봐…….”

“……메이.”

“아가씨가 죽을까 봐 무서워요.”

윈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며 낱말 하나 뱉어낼 수가 없었다.

윈터는 얼마 안 가 죽는다. 그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그렇기에 감히 살기를 바라지도 않았는데.

제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 오로지 본인뿐이었음을 윈터는 그제야 통감했다.

아직 먼 미래이긴 하지만, 그때가 되면 과연 메이딜리언을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윈터는 조금 후회했다.

혹시 자신이 메이딜리언에게 좋은 것만 주고, 행복할 일들만 가득 만들어주고 사라지면 된다고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는 더 강해질 거예요.”

상념을 깨뜨린 것은 메이딜리언이었다.

공포를 밀어내고 선명하게 빛나는, 노을을 닮은 붉은 눈동자.

“그래서 아가씨를 지킬 거예요.”

이 순간 윈터는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래, 이런 인물이었지. 메이딜리언이라는 사람은.

고개를 모로 기울인 윈터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좋아. 기대할게.”

문득 저를 구하겠다며 달려든 탓에 새파란 멍이 든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윈터는 그 위에 작게 입을 맞춰주며 속삭였다.

“네가 날 지켜줘, 메이.”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럴게요. 꼭, 꼭 그렇게 할게요!”

노을이 두 꼬마의 붉어진 뺨을 감춰주어 참 다행이었다.

* * *

말없이 공작 저를 탈출해 사라졌던 터라, 윈터는 블라디미르 공작에게 아주 호되게 혼이 났다.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 애가 철없이, 사용인도 대동하지 않고 황도를 휘저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황도에 예고도 없이 나타났던 검은 머리의 꼬마 큰손에 대한 소문이 짜하게 났기 때문에, 윈터는 감히 그게 제가 아니라고는 말도 못 하고 그저 겸허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결국 윈터는 당분간 근신령을 받았다. 비밀 호위대와 기사들의 감시가 더욱 삼엄해진 건 덤이었다.

우스운 것은 이 와중에 메이딜리언은 상을 받았다는 거였다.

위험한 상황에서 솔선수범하여 아가씨를 지키려고 했다나 뭐라나.

상은 뭐니 뭐니 해도 물질적으로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블라디미르 공작 덕분에 메이딜리언은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벼락부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메이딜리언 기준이다.

윈터는 넉넉한 용돈을 받은 메이딜리언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제가 근신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금세 까맣게 잊어버린 뒤였다.

“이게 다 내 덕분이지, 흐흥.”

한가로이 공작성을 산책하던 윈터가 중얼거렸다.

굳이 따지자면 사실 상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들을 구해준 건 다름 아닌 한타였으니까.

“어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막 장미 정원을 지나치던 윈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후원 쪽 인적이 드문 담벼락 위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보였기 때문이다.

햇빛에 빛이 바랜 듯 구리색으로 빛나는 짧은 머리카락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슬쩍 멀리서 따라오고 있던 기사들을 보던 윈터가 얼른 지난번 이용했던 개구멍으로 쏙 빠져나갔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해?”

“으, 으아악!”

뭔가에 홀린 듯 담벼락 너머를 살피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건방진 꼬맹이, 또 너냐?”

이틀 연속으로 보는 한타였다.

윈터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엘리슨이 약속을 잘 지킨 모양이네.

자신이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건 당분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타는 제가 마주하고 있는 꼬맹이가 누군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귀한 황자님을 강아지처럼 부리는 이상하고 건방진 어린애라고 생각하겠지.

“너, 너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다 보이는데?”

담벼락 너머로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을 가리키자 한타가 아차 싶은 얼굴로 쑥 목을 움츠러트렸다.

그 한심한 꼴을 보며 윈터가 몸 앞으로 야무지게 팔짱을 끼고는 으름장을 놓았다.

“혹시 우리 메이 납치하러 온 거면 손목 하나는 잃을 각오해야 할 거야. 알겠어?”

그러자 한타가 제 발이라도 저린 것처럼 움찔 뒤로 물러섰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 황…… 아, 아니. 그 귀엽고 어린 꼬마님이 혹시 여기서 너한테 구박받으면서 불쌍하게 크고 있는 건 아닌지 해서 보러 온 거야!”

“메이가 구박받으면서 지내는 것처럼 보여?”

“그, 그건…….”

윈터의 물음에 한타가 멈칫했다. 어제 봤던 메이딜리언의 모습이 어땠던가.

와이번 파인지 뭔지 하는 웃긴 건달들에게 얻어맞아서 몰골이 영 아니긴 했지만, 옷도 나름 고급지고, 영양상태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만 빼고 본다면 반질반질 어여쁜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건, 그러니까…….”

제가 생각해도 메이딜리언을 구박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는지 한타가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그걸 보고 윈터가 입술을 삐죽였다.

“정작 진짜로 구박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한타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누구냐, 그게.”

낮게 깔린 목소리에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어차피 이미 손목을 잃어서 다시는 못 그럴 거야.”

“뭐?”

“내가 다 처리했……, 윽.”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나가던 윈터가 갑작스러운 통증에 와락 미간을 구겼다.

가슴부터 시작해서 고통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갑자기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슴을 쥐어뜯는 윈터를 보고는 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어, 꼬, 꼬마야. 너 왜 그래! 갑자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애석하게도 윈터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만한 여력이 없었다.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지더니 곧 울컥 피를 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이셀이 처방해준 약을 먹고 나서 그동안 한 번도 각혈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는데.

이쯤 되자 윈터 또한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안으로…….”

“뭐? 뭐라고?”

어떻게든 입술을 달싹이던 윈터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재빨리 그런 윈터를 받아낸 한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거기 누구 없어? 누구, 이 애를 아는……!”

거기까지 외친 한타의 눈에 담벼락이 들어왔다. 메이딜리언과 같이 지내는 꼬맹이라면 분명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식솔이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뭔가를 더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한타는 윈터를 답싹 들고는 공작가의 담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봐! 누구 없어! 이 꼬맹이를 아는 사람 누구 없냐고!”

갑작스레 공작가 후원에 나타난 거구의 남자가 피투성이의 아가씨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꼴을 보자마자 공작성에는 비상이 걸렸다.

의식이 없는 윈터에게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공작성의 주치의와 아이셀이 불려왔다. 그리고 한타는,

“엥? 나, 나는 갑자기 왜…….”

“당장 이쪽으로 와!”

공작성 지하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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