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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150)

11화

“네, 네가 편지 주인이라고?”

엘리슨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편지를 말하는 거라면 내가 보낸 게 맞아. 그렇지, 메이?”

“네, 네!”

윈터의 물음에 메이딜리언이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전히 엘리슨은 믿을 수 없다는 허,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윈터가 보란 듯이 생긋 웃었다.

“우리 아무래도 할 말이 되게 많을 것 같은데, 잠깐 자리를 옮길까?”

제 키의 반도 안 돼 보이는 작은 꼬마의 제안에 엘리슨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상회 건물에 마련된 엘리슨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마치 예전에도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윈터는 자연스레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엘리슨이 오히려 손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 편지를 보낸 게 정말 네가 맞아?”

여기까지 오는 내내 침묵을 지키던 엘리슨이 대뜸 편지를 내밀었다.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듯 조금 구겨진 익숙한 편지지를 보며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대답에 엘리슨이 난처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글씨체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대필일 거라 생각한 거지?”

“……하아, 그래.”

편지지의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고는 누군가 제 정체를 숨기려고 일부러 어린애를 시켜 대신 쓰게 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설마 편지를 보낸 자가 정말로 이런 어린애였을 줄이야.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엘리슨은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하도 반복해서 이미 다 외웠으면서도, 그녀는 애꿎은 편지만 다시 펼쳐보았다.

[편지를 가지고 간 꼬마의 이름은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대화를 원한다면 자정에 블라디미르 공작가로 신호를 보내라.]

단 두 문장이었다. 그것만으로 제니마 상회의 일원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사라진 황자를 찾아다닌 지가 무려 9년이었다.

이름은커녕 실존하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는데.

돌아가신 선황 폐하와 똑 닮은 꼬마가 나타나 감히 제 이름 뒤에 카데르 제니어스라는 황가의 성을 붙이다니.

그때의 충격을 생각하면 엘리슨은 아직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그분에 대해서 어떻게 안 거지?”

유심히 윈터를 살피던 엘리슨이 물었다.

아직 윈터의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우선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탐색해 보기로 한 것이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아?”

윈터가 가볍게 혀를 차며 대답했다.

원작에서는 꼬질꼬질하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은 데다 항상 덥수룩하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터라 메이딜리언의 존재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깨끗하고 반들반들하게 닦고 씻기고 입혀 놓은 메이딜리언은 누가 봐도 선황을 쏙 빼닮았다.

물론 선황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야 메이딜리언이 죽은 황제와 닮았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황제의 얼굴을 아는 고위 귀족들은 메이딜리언을 마주칠 확률도 낮으니 아직까지 메이딜리언이 숨겨진 황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윈터에 의해 메이딜리언은 세상에 드러났다.

아마 조만간 블라디미르 공작 정도는 낌새를 알아차릴 테지.

그렇기 때문에 이들과 빠른 접촉이 필요했다. 만일 공작가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된다면 어린 메이딜리언에게 울타리가 되어줄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엘리슨.”

윈터는 더는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저를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보는 엘리슨에게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기로 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여기에 온 것이기도 했다.

대뜸 제 이름을 부르는 윈터 덕분에 엘리슨이 움찔했다.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아니, 그보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 편지를 보낸 거야?”

“왜 모르겠어. 너는 선황 폐하의 비밀 호위대 ‘아르카’의 일원이잖아.”

윈터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옅은 바람이 불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날카로운 단도가 윈터의 턱 밑에 닿아 있었다.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조금 따끔한 통증에 윈터가 오른쪽 눈가를 찡그렸다.

그리 깊이 들어간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살짝 베인 모양이었다.

“꼬마야. 함부로 입을 놀리면 목숨이 위험해진단다.”

여태까지 나눈 대화는 모두 장난이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슨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얼굴을 오롯이 마주하며 윈터는 불량한 얼굴로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어디로 보나 위기감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모습이었다.

“원한다면 더 말해줄 수도 있어.”

“……뭐?”

보통 어린애라면 이쯤에서 울음을 터뜨리던지 조금 무서워하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윈터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얘는 혹시 간을 어디 따로 빼두고 오기라도 한 건가? 황당한 마음에 엘리슨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러나 윈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네가 공간 이동 마법에 특화된 인재라는 거? 그걸로 선황이 죽고 나서 섭정 황제의 눈을 피해 황궁을 빠져나왔다는 것도 알지.”

“너, 마, 말도 안…….”

“아니면 이 상회의 점장인 베일리가 아르카의 수장이자, 네 쌍둥이 동생이라는 것도 말해 볼까?”

엘리슨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윈터가 씩 웃으며 작은 악마처럼 속삭였다.

“이런, 벌써 다 말해버렸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말에 엘리슨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전까지는 그저 정체 모를 누군가가 아이를 앞세워 자신들에게서 뭔가를 캐내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잔재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어린애가 그런 편지를 보내고, 메이딜리언을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실제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도저히 이런 어린애가 줄줄 외워서 읊는다고 볼 수 없는 말들이 오갔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전부 이 꼬마가 벌인 일이라고?

드디어 사태 파악을 마친 엘리슨의 등 뒤로 잔뜩 소름이 내달렸다.

흠칫 엘리슨의 어깨가 떨렸다. 곧 그녀는 검을 거두고 뒤로 몸을 물렸다.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윈터.”

“……이름 말고. 제대로 정체를 밝혀.”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손목 수집가 소문은 들어봤지?”

윈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슨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귀족 명부가 정렬되었다.

최근 황도를 떠도는 소문들도 모두.

편지에 블라디미르 공작가로 신호를 보내라고 쓰여 있었을 때부터 그 가문과 뭔가 연관이 있는 인물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 악랄한 꼬맹이가 이 모든 일의 배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제야 엘리슨의 눈에 윈터의 검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가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네가 그 윈터 블라디미르일 줄이야…….”

천사 같은 얼굴이 새삼 섬뜩해진 엘리슨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손수건이라도 좀 주지?”

칼에 베인 제 목을 쓸며 윈터가 작게 투덜거렸다. 손끝에 묻어난 피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린 윈터가 중얼거렸다.

“가뜩이나 피 토하는 게 일상인데 또 출혈이라니.”

“아, 미안.”

엘리슨이 멋쩍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뭐, 됐어. 일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윈터는 흔쾌히 그 손수건을 받아 상처를 지혈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이 좀 거친 충격 요법을 쓰게 되었지만, 윈터 역시 이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열 살짜리 꼬마는 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터는 엘리슨의 앞에서 굳이 어린애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

엘리슨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만했고, 어차피 이들과 앞으로도 기민하게 협조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어린애가 뭘 알겠냐며 무시당하며 쓸데없는 소모전을 하는 건 사양이었다.

그러니 아르카의 두뇌이자 책사인 엘리슨의 신임부터 얻어야 했다.

한편 엘리슨은 이 비범한 꼬맹이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소파에 파묻힐 정도로 작고 마른 몸.

앞에 놓인 핫초코와 혀가 아릴 듯한 과자들이 어색하지 않은 외양.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당장이라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해맑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뺨을 가진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러나 줄곧 커다란 눈동자가 엘리슨의 시선을 붙들어 두었다.

감히 허투루 눈길을 돌릴 수 없도록 잡아두는 선연하게 빛나는 황금의 마안.

눈으로 직접 보고도 쉬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느낌이었다.

그때 엘리슨의 시선을 알아챈 듯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눈빛을 공유했다.

곧 엘리슨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자신이 마주한 금빛 눈동자 안에 천진함 대신 세계를 꿰뚫어 보는 지혜가 깃들었다는 벼락과도 같은 깨달음이 그녀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워, 원하는 게 뭡니까?”

자연스레 나온 존대에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가볍게 웃은 윈터가 대답했다.

“메이가 황제가 되는 것.”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두 발을 달랑이며 하는 말치곤 제법 묵직하고 거창했다.

엘리슨은 이 말을 꺼낸 자가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직 입지가 부족한 메이딜리언을 어릴 때부터 지원해서 혹시 그가 황제가 되면 뒤에서 조종하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무슨 걱정하는지 아는데, 쓸데없다는 것만 알아둬.”

이미 엘리슨의 생각 정도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윈터가 먼저 말했다.

“다른 소문도 들어봤을 거 아니야.”

가볍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는 말에 엘리슨은 그녀답지 않게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소문을 말하는 것인지 선뜻 골라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8년 안에 죽어.”

이미 정해진 미래를 담담히 고백하는 윈터의 얼굴은 잔물결 하나 없이 고요한 호수 같았다.

그 기묘한 풍경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엘리슨은 줄곧 들었던 의문을 입 밖에 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그 물음에 윈터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엇을 떠올린 건지 줄곧 서릿발처럼 냉랭하고 살벌했던 얼굴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느슨해졌다.

“내가, 그 애를 좋아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윈터의 얼굴은 조금 수줍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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