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메이딜리언이나 저 날건달들은 미처 몰랐겠지만, 윈터에게는 24시간 비밀 호위대가 붙어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나니 같은 딸을 공작이 그냥 방치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윈터는 지금 시한부 선고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윈터에게 평소보다 배는 많은 호위대가 따라붙었다.
그들은 윈터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하고 있으니 아무리 몰래 저택을 탈출했다고 해도 분명 뒤따라왔을 것이다.
신호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겠지.
씩 웃은 윈터가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어이, 거기!”
골목 끝에서 누군가 외쳤다. 반사적으로 돌아봤던 와이번 파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림자만으로 골목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구의 인물이 콧김을 씩씩 뿜으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넌 또 뭐야!……요.”
“곤죽을 만들어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물어라.”
털이 부숭부숭한 험상궂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왕눈이는 기 한 번 못 쓰고 그대로 잔뜩 목을 움츠렸다.
“이, 이야앗!”
듣기 안쓰러울 정도로 초라한 기합과 함께 거구의 뒤에 있던 남자 하나가 덤벼들었다.
그러나 털북숭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 손에 턱, 비실이의 머리를 쥐었다.
“어딜 감히……!”
으르렁거리는 표정이 야차 같았다. 그걸 정면에서 마주한 비실이가 덜덜 손을 떨며 들고 있던 칼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털북숭이가 와이번 파를 해치우는 데는 채 5분조차 걸리지 않았다.
“제, 젠장!”
“두고 보자, 너희들!”
그들은 악당의 전형적인 대사를 읊고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호다닥 도망쳤다.
기합 몇 번만으로 손쉽게 와이번 파를 물리친 거구의 남자를 보며 윈터는 줄곧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원래라면 여기는…….”
원작의 여주인공이 활약하는 대목인데.
오늘 굳이 메이딜리언을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건 다분히 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는 여기서 위기에 빠진 메이딜리언을 원작의 여주인공이 당당히 구해주어야 했다.
이 시기쯤 골목대장으로 활약하던 마력 활용의 귀재.
마법 천재인 여주인공의 등장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털북숭이 아저씨의 등장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타난 사람 또한 나름 중요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윈터가 고대하던 장면은 이미 날아간 뒤였다.
은근한 원망을 담아 털북숭이 아저씨를 노려보는데, 그는 자신을 째려보는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벽을 짚고 일어서고 있는 메이딜리언에게 달려갔다.
“으허헝, 황…… 아니, 꼬마야! 괜찮니?”
인상 한 번 쓴 걸로 와이번 파 대부분을 물리친 인간답지 않게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두꺼운 손이 감히 메이딜리언을 부축할 수조차 없다는 듯 허공을 방황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황…… 아니, 꼬마님의 귀한 얼굴에 이런 상처라니! 황, 아니 꼬마님이 다치신다면 저도 그만 콱 따라 죽을 겁니다! 으어엉!”
메이딜리언을 보며 횡설수설하던 남자가 곧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겨울잠에서 억지로 깨어나 억울한 곰 같은 모습이었다. 그 꼴을 보며 윈터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황, 아니 꼬마님’은 대체 무슨 호칭이야? 저럴 거면 그냥 황자님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다.
“훌쩍, 안 되겠습니다. 나, 정의를 아는 남자 한타! 감히 이런 일을 모른 척할 수 없지! 제가 황, 아니 꼬마님을 모시겠습니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 부복한 거구의 남자는 더없이 늠름했다.
여기가 황도 뒷골목이 아니고, 마주한 사람이 꼬질꼬질한 아홉 살짜리 꼬마만 아니었다면 더 그럴듯했겠지만.
코를 훌쩍이는 한타에게서 슬쩍 물러난 메이딜리언이 윈터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와달라는 듯 울먹이는 붉은 눈동자를 보자 가슴이 아렸지만, 윈터는 애써 티 내지 않고 말했다.
“그래, 좋아. 안내해.”
“훌쩍, 어엉?”
바라던 메이딜리언의 대답 대신 뜻밖의 목소리에 한타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귀하디귀하신 황자님 옆에 어린 여자애가 하나 더 있었다.
“너는 뭐…….”
고개를 갸웃하던 한타는 메이딜리언이 그 여자애의 손을 꼭 잡는 것을 보고는 금세 헤죽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답삭 두 꼬마를 품에 안은 한타는 가뿐히 달려 어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제니마 상회>
간판에 적힌 단정한 필체를 읽어내린 두 사람은 정반대의 표정을 지었다.
윈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메이딜리언은 작게 혀를 찼다.
“어이, 베일리! 베일리, 어디 있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간 한타가 우렁차게 외쳤다. 덕분에 상회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타에게 집중되었다.
“한타 씨, 또 무슨 일이에요? 점장님은 잠깐 바깥에…….”
저 멀리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던 여자가 급히 다가와 한타에게 물었다.
그러다 문득 한타의 품에 안겨 있는 윈터와 메이딜리언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나저나 얘들은 다 누구예요? 설마 귀엽다고 어디서 무작정 주워온 건 아니겠죠?”
“하핫! 그럴 리가 있나. 레이첼, 이분의 얼굴을 보고도 모르겠나? 여기 이분은 다름 아닌 황……, 읍.”
껄껄 웃으며 줄줄 메이딜리언의 이력을 말할 듯한 한타를 잽싸게 윈터가 말렸다.
조막만 한 손에 입을 틀어막힌 한타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듯 슬금슬금 눈치를 봤다.
“황……?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한타 씨?”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하. 그, 그보다 이 꼬마가 많이 다쳤는데 치료를 부탁해도 될까?”
“어머, 그러게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람. 얼른 이쪽으로 데려와요.”
슬슬 멍이 올라오는 메이딜리언의 얼굴을 본 레이첼이 깜짝 놀라며 안쪽 사무실로 그들을 안내했다.
“꼬마님, 이제 걱정하지 마십쇼. 이 한타가 네 곁에서 충실히 보필하겠습니다.”
곰 발바닥처럼 두꺼운 손으로 메이의 이마에 톡톡, 약을 발라주며 한타가 말했다.
대체 몇 번 본 적도 없는 꼬마한테 보필이니 뭐니 하는 어른이 어디에 있는지.
소설에서 나온 그대로 단순 무식 순진의 결정체인 한타의 모습에 윈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때, 이 한타가 아주 믿음직스럽지 않습니까?”
“부담스럽긴 하네.”
쉼 없이 자신을 어필하는 한타를 보다 못한 윈터가 이죽거렸다.
그 말에 한타의 부리부리한 시선이 윈터에게 향했다.
맹수처럼 거대하고 섬뜩한 외양에 보통 꼬마라면 진작에 울음을 터뜨리고도 남았겠지만 윈터는 보통 꼬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팔짱을 낀 채 피식 웃기만 하는 이상한 어린이의 모습에 오히려 한타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머리는 좀 나빠도 한타는 짐승 같은 제 감을 믿었다. 아무래도 윈터가 심상치 않은 꼬마라는 느낌이 들었다.
윈터는 그사이 사무실 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3층짜리 건물은 이름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황도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한 상회였다.
어린 메이딜리언은 자신을 찾아 헤매던 제니마 상회의 인물들과 맞닥뜨린 뒤 이곳을 본거지 삼아 황궁 귀환 계획을 세우게 된다.
“흐응, 나쁘지 않네.”
짧은 평을 내린 윈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노크도 없이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푸른색의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슨. 얼마 전 메이에게 심부름을 보냈던 편지의 수신인이었다.
“아아, 드디어 등장하셨네.”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나자 윈터가 반갑다는 듯 활짝 웃었다.
“한타 씨! 레이첼이 한타 씨가 무슨 애들을 납치해왔다고 하던데 사실이에요?”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
억울한 한타가 우어엉 울부짖었다.
“요 앞 골목에서 이상한 것들한테 얻어맞았더라고. 그래서 모셔왔어.”
“이상한 것들이라고……?”
고개를 갸웃하던 엘리슨이 드디어 한타의 덩치에 가려져 있던 아이들의 정체를 맞닥뜨렸다.
울먹이며 주위를 살피는 붉은 눈동자의 꼬마는 분명, 얼마 전에 편지에서 봤던 그…….
“와이번 파.”
당황해서 반쯤 넋이 나간 엘리슨을 보던 윈터가 대뜸 말했다.
“와이…… 뭐?”
“걔들 이름이 와이번 파랬어.”
“와이번 파라…….”
윈터의 말에 한타의 눈이 번뜩였다. 조만간 그들은 뼈도 못 추릴 만큼 호되게 당하게 되겠지.
그때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응? 왜 그래, 메이?”
“저 이제 별로 안 아파요. 그러니까 그만 가요, 우리.”
“무슨 소리야. 너 손목도 삐었잖아.”
부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손목을 가리키며 말하자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전 괜찮은데요, 아…….”
버릇처럼 아가씨라고 부르려던 메이딜리언이 멈칫했다.
바깥에서는 이름을 부르라고 했던 윈터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약속을 잘 지키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기분 좋은 듯 헤헤 웃었다.
그 꼴을 본 한타는 영 못마땅했다.
감히 황자 전하를 자기 강아지 부리듯 오냐오냐하다니.
나잇값 못하고 한타가 괜히 눈을 부라렸지만 윈터가 고작 그런 것에 겁먹을 리가 없었다.
“아저씨는 왜 눈을 그렇게 떠?”
대뜸 들어오는 황당한 질문에 작게 혀를 찬 한타가 물었다.
“넌 대체 정체가 뭐냐, 꼬마야.”
“나? 윈터.”
별로 좋지 못한 분위기에 눈만 굴리던 메이딜리언이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 이, 이상한 아저씨 따라가지 말랬는데…….”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한 메이딜리언의 손등을 토닥이며 윈터가 그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여기 오려고 했으니까 괜찮아.”
그 말에 이상함을 느낀 것은 엘리슨이었다.
“여기에 원래 오려고 했다고?”
“응. 내가 그 편지 주인이거든.”
“……편지라니?”
“얼마 전에 받은 적 있지? 보라색 연애편지. 그거 내가 보낸 거야.”
윈터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