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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50)

9화

“거기 글로바인가 421번지에 있는 거 말하는 거 맞지?”

“맞습니다, 아가씨.”

“그래. 그럼 수고해!”

발랄하게 손을 흔든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데리고 본성으로 돌아갔다.

얼른 씻고 나오라고 메이딜리언을 방으로 밀어 넣은 윈터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뽀송뽀송하게 샤워를 마쳤다.

말간 얼굴로 나온 윈터는 초조하게 이리저리 방을 돌아다니다 결국 메이딜리언의 방으로 찾아갔다.

“……아, 아가씨?”

벌컥 열린 문에 당황한 메이딜리언이 뒤로 물러섰다.

제 방인 양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선 윈터는 아직 촉촉이 젖어 있는 메이딜리언의 머리카락을 보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 내가 머리 제대로 말리라고 했지? 안 그러면 감기 걸려.”

하녀를 시켜 수건을 가져오게 한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자리에 앉혀 놓고 꼼꼼히 머리카락을 말려줬다.

강아지 털이라도 말려주는 것처럼 거칠고 빠른 손놀림에 이리저리 휘청이면서도 메이딜리언은 얌전히 무릎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메이, 오늘 검술 연습 땡땡이치고 나랑 놀러 갈래?”

어느 정도 물기를 털어낸 윈터가 수건을 옆에 두며 물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좋아요!”

누가 봐도 검술 연습 땡땡이는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윈터와 놀러 갈 생각에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꼬맹이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공작가를 빠져나왔다.

가끔 메이딜리언이 타이그의 횡포를 피해 도망칠 때 쓰던 개구멍을 통해서였다.

“우와!”

개구멍에서 기어 나온 윈터가 대로변으로 나오자마자 감탄사를 터뜨렸다.

윈터는 원래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평민들과 같은 길을 쓰기 싫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서였다.

필요한 물건이야 알아서 사용인들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고, 옷은 재단사를 불러 지으면 됐으니 굳이 나갈 일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전생을 깨달은 지금, 윈터에게 바깥세상이란 별천지와 다름없었다.

여태 공작 저에서 해온 것이라곤 책 읽기, 약 먹기, 밥 먹기, 메이딜리언 구경하기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메이딜리언 구경하기는 온종일 해도 질리지 않았지만, 그렇게 맘 놓고 앉아만 있다간 평생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었다.

윈터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메이.”

“네?”

“내가 오늘 아주 만반의 준비를 했거든?”

돈이 든 주머니를 짤랑 흔들며 윈터가 방긋 웃었다. 그 해맑은 미소에 메이딜리언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 그걸로 뭐 하시려고요?”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어야지.”

성에서 나오는 식단은 영양 균형에 맞춰 짜인 싱겁고 건강한 음식들 뿐이었다.

물론 그게 몸에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가끔은 자극적이고 불량한 맛도 당길 때가 있는 법이니까.

“하, 하지만 그런 걸 함부로 먹다가는 아가씨가…….”

“쓰읍.”

혹시라도 윈터가 잘못될까 저어된 메이딜리언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지만 금세 윈터에게 막혔다.

“밖에 나왔을 때는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 그럼 금방 들키잖아.”

“그럼 뭐라고 불러요?”

“윈터라고 부르면 되지.”

“위, 위…….”

깜짝 놀란 메이딜리언이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이름을 부르라니.

그런 메이딜리언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윈터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짝 다가갔다.

“지금 한 번 해봐!”

“뭐, 뭘요?”

“날 윈터라고 불러 봐, 메이.”

갑작스러운 요구에 메이딜리언이 숨을 들이켰다.

대체 무슨 기대를 하는 건지 윈터의 금빛 눈동자가 평소보다 배는 더 반짝였다.

주춤 뒤로 물러섰던 메이딜리언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터.”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위, 윈터!”

두 눈을 질끈 감고 메이딜리언이 와락 외쳤다.

그러고도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평소와 달리 조용한 윈터가 이상해서 슬쩍 메이딜리언이 눈을 떴다. 곧 그의 시야에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는 윈터의 얼굴이 들어왔다.

메이딜리언은 자기도 모르게 헤, 입을 벌렸다.

기쁜 듯 휘어진 윈터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가슴에 쿡 박히는 것 같았다.

“응, 메이.”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다정한 목소리에 괜히 메이딜리언의 귓가가 화끈거렸다.

“그럼 이제 준비는 끝난 것 같고. 어디 한 번 제대로 놀아볼까?”

잔뜩 신이 난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어, 천천히 가요, 아가…… 아니, 윈터!”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윈터는 까르르 웃으며 대로를 질주했다.

난처한 듯 울상이던 메이딜리언 또한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심장이 쿵쿵, 기분 좋게 뛰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딜리언의 미소는 증발하고 말았다.

“저…… 윈터.”

“응?”

“그렇게 먹다가는…….”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은데요.

메이딜리언은 애써 말끝을 흐렸다.

윈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우물우물 상점가에서 파는 빵을 한가득 욱여넣고 씹는 윈터의 품 안에는 각종 과자와 장난감 같은 것이 가득했다.

물론 그 비슷한 것이 이미 메이딜리언의 양손에도 묵직하게 들려 있었다.

그동안 못 먹고 못 즐겼던 한을 오늘 전부 풀기라도 할 것처럼 윈터는 눈에 보이는 족족 사들이고 입에 넣어봤다.

예고도 없이 상점가에 나타난 꼬마 큰 손을 상인들이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망나니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사실 윈터는 누가 봐도 귀엽고 천사 같은 어린이였다. 게다가 옆에는 인형같이 사랑스러운 메이딜리언도 있었으니까.

두 손 꼭 잡고 이리저리 다니는 꼬맹이들을 상인들은 금방이라도 깨물어주고 싶다는 듯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메뉴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시키니 누군들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긴 했다.

덕분에 서비스까지 왕창 받은 두 꼬마는 양손 무겁게 상점가를 누볐다.

윈터는 돈을 펑펑 쓰며 이 순간을 즐겼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여전히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윈터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그러다 배탈이라도 나시면…….”

“괜찮아, 괜찮아. 다 사람이 먹는 건데, 뭘.”

그게 나쁜 음식이라 배탈 난다는 게 아니라,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날 수도 있다는 뜻이었지만,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작은 몸에 대체 저게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 모르겠지만, 윈터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신나게 상점가를 맛보고 즐겼다.

“꼬마 아가씨, 수박 주스도 한잔하는 게 어때?”

“음, 좋아! 두 잔 줘.”

상인의 호객행위에도 흔쾌히 넘어가 준 윈터가 막 수박 주스 두 잔을 받아들 때였다.

뭔가를 눈치챈 듯 동시에 두 꼬마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메이.”

“……네.”

“너도 느꼈지?”

“맞아요. 저기 뒤에…….”

“쉿, 돌아보지 마.”

윈터가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처음엔 사람들이 많아서 미처 몰랐는데, 아까부터 두 사람을 따라오는 자들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다른 데로 갈까요?”

“좋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윈터와 메이딜리언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작은 욕설과 함께 우당탕탕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이리저리 골목 사이로 빠져나갔다.

안타까운 것은, 윈터와 메이딜리언 모두 황도 상점가에 그리 빠삭하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을 따라오는 불량배들을 피해서 열심히 달렸지만, 결국 두 사람 앞에 막다른 길이 나타나고 말았다.

“쳇.”

아무래도 몰이를 당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윈터가 작게 혀를 찼다.

그때 낄낄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여섯 명 되는 남자들이 골목 입구를 가로막았다.

꽤 유명한 인간 말종들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건달들을 못 본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작게 혀를 찬 윈터가 앞으로 나서자 비식거리던 남자 하나가 말을 걸었다.

“이런, 꽤 귀한 집 자제분들이신가 봐. 이렇게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활보하면 당연히 우리 와이번 파가 탐내지 않겠습니까, 아가씨, 도련님?”

와이번 파는 또 뭐야? 유치한 작명 센스에 윈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휘황찬란은 무슨. 내 나름대로 수수한 걸로 골라 입은 거야.”

“……뭐라고?”

겁먹기는커녕 심드렁한 윈터를 보고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향해 윈터는 제 소매에서 금 단추 하나를 떼서 던졌다

“자, 이 정도면 만족스럽겠지? 괜히 주제도 모르고 덤비다가 애먼 손목 잃지 말고 조용히 사라져.”

바닥을 도르르 구르는 금 단추를 보며 남자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그가 슬쩍 턱짓하니 뒤에 있던 비쩍 마른 남자 하나가 키득키득 웃으며 얼른 단추를 주웠다.

아무래도 제일 앞에 나선 우락부락한 얼굴의 왕눈이가 두목인 모양이었다.

두 손을 비빈 왕눈이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 이 몸이 너희들 몸값을 두둑이 챙겨야겠다.”

“이봐, 두꺼비. 헛된 욕심 부리다가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어.”

“보자 보자 하니까 어린 아가씨가 못 하는 말이 없네?”

왕눈이의 두꺼운 손이 윈터의 멱살을 잡아챘다. 가볍고 마른 몸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들렸다.

“아가씨한테 뭐 하는 짓이야! 그 손 저리 치워!”

윈터가 잡히자마자 기겁한 메이딜리언이 왕눈이의 팔에 매달렸다.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 같은 얼굴이 이를 드러내더니 그대로 왕눈이의 팔을 물어뜯었다.

“으악, 이 건방진 게 감히!”

따끔한 고통에 윈터를 놓친 왕눈이가 그대로 몸을 돌려 메이딜리언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으로 내던졌다.

“안 돼, 메이!”

예고 없이 가해진 폭력에 윈터 또한 표정이 서늘해졌다.

좀 전까지 차분하던 눈빛이 낮게 가라앉더니 섬뜩한 안광을 드러냈다.

“감히 내 메이를 건드리다니. 이제 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얼간이.”

“하핫, 어린 게 벌써부터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구나. 여기서 너희를 구해줄 만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왜 없다고 생각해?”

“……무, 뭐?”

“설마 이런 귀한 집 아가씨가 아무런 대비도 안 하고 돌아다닐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와이번 파가 주춤했다. 윈터가 생긋 웃으며 천사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하여간, 안일하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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