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50)

8화

* * *

“자, 여기.”

검술 훈련을 마친 메이딜리언과 함께 윈터는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줄곧 가지고 있던 연보라색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글로바인 가 421번지, 제니마 상회 재정 담당인 엘리슨에게 주면 돼.”

“네, 알겠습니다.”

메이딜리언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들반들한 얼굴을 보며 윈터가 힘주어 말했다.

“꼭 그 사람한테 전해야 해.”

그 말에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눈에 의문이 어렸다.

“주, 중요한 건가요?”

윈터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연애편지거든.”

연애편지란 소리에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작은 머리통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굴러갔다.

연애편지라니, 누가 누구한테 보내는 거지? 그리고 굳이 그 심부름을 왜 나한테 시키는 거지?

“알겠습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메이딜리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윈터를 뒤로 하고 공작가를 나섰다.

손에 든 편지가 유독 묵직하게 느껴졌다.

글로바인 가 421번지. 엘리슨에게. 윈터가 말한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속으로 열심히 되뇌던 메이딜리언의 눈에 문득 물웅덩이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비가 왔는데.

마차가 여러 번 지나간 듯 웅덩이에 고인 물은 흐렸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손에 든 편지와 웅덩이를 번갈아 보던 메이딜리언은 지독한 유혹에 시달렸다.

“그냥 빠트릴까…….”

잠깐 모른 척하고 있으면 속에 든 잉크가 물에 번져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 거였다.

실수였다고, 죄송하다고 말하면 아가씨가 용서해주지 않을까? 이렇게 크고 무거운 편지지가 웅덩이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아냐. 안 돼. 그러다가 아가씨가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해?”

제 생각에 제가 놀란 메이딜리언이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숨을 폭 내쉰 메이딜리언이 손에 든 편지가 혹시라도 떨어질까 옴팡지게 끌어안았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기도라도 하듯 작게 중얼거리며 메이딜리언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글로바인 가는 공작가가 있는 대로변에서도 황도 광장을 거쳐 꽤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아직 꼬마인 메이딜리언은 쉬지 않고 열심히 걸어 드디어 421번지에 도착했다.

눈앞의 3층짜리 상회 건물을 노려보던 메이딜리언이 곧 보무도 당당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저기요, 여기 재정 담당자 엘리슨이 누구예요?”

“어어, 그게…….”

커다란 상자 세 개를 한 번에 쌓아서 들고 가던 털북숭이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는데, 뒤에서 서류를 이리저리 들춰보고 있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엘리슨은 난데, 너는 누구…….”

대체 어느 집 꼬마가 자기를 찾나 싶었던 엘리슨이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늘 냉정을 잃지 않던 이지적인 회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커졌다. 쓰고 있던 안경이 스르륵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비단 엘리슨뿐만이 아니었다. 상회를 찾은 손님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공간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메이딜리언에게 꽂혔다.

“마, 말도 안 돼…….”

엘리슨은 눈앞의 상황에 경악해서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편지를 들고 나타난 꼬마가 선황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 뭔데. 뭔데 그래?”

손에 든 상자 때문에 작은 메이딜리언이 안 보이는 털북숭이 남자가 이리저리 물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그걸 대답해줄 만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상자를 들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털북숭이 아저씨를 지나친 메이딜리언이 여전히 손을 든 채 멍청히 서 있는 엘리슨에게 다가갔다.

아가씨가 연애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이 여자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이도 한참이나 많아 보이고, 잘난 구석도 전혀 없어 보이는데!

“편지 배달이요.”

퉁명스레 편지를 내밀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반사적으로 그걸 받아든 엘리슨이 그제야 벌렸던 입을 다물고는 손을 뻗었다.

“자, 잠깐 꼬마야!”

다급히 떠나는 메이딜리언을 붙잡은 엘리슨이 애써 침착하게 가라앉힌 낯으로 말을 붙였다.

“너, 너 이름이 뭐니? 나이는 몇 살이야? 사는 곳은, 사는 곳은 어디니?”

그러나 질문이 거듭될수록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전에 윈터가 신신당부했던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우리 예쁜 메이. 혹시 모르는 사람이 너한테 말 걸면서 이름 물어보고, 친한 척 사탕도 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아가씨의 얼굴이 더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멍한 정신 속에서도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곧 저를 붙잡은 엘리슨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뿌리친 메이딜리언이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저리 꺼져.”

아가씨가 알려준 그대로 말한 메이딜리언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상회 건물을 나섰다.

정면에서 그 얼굴을 마주한 엘리슨은 경악해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봐, 봤어? 봤어, 지금?”

주위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봤어. 안 볼 수가 없지.”

곧 눈이 마주친 그들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일제히 외쳤다.

‘돌아가신 선황 폐하랑 똑같잖아!’

그렇다. 제니마 상회는 선황의 비밀 호위대를 하던 자들이 비밀리에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사라진 황자인 메이딜리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뭔데, 뭔데 그래? 나도 알려줘!”

상자를 내려놓고 뒤늦게 달려온 털북숭이 남자가 외쳤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친절히 상황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빨리 편지부터 열어봐!”

누군가의 외침에 엘리슨이 제 손에 들려 있던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잔뜩 긴장감이 어린 얼굴이 편지를 뜯었다.

여러 개의 눈이 우르르 편지 내용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그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 * *

그날 밤, 창밖에 달이 떠올랐다.

달과 닮은 금빛 눈동자가 유리창에 비치고 있었다.

손에는 우유 한잔을 들고 후후후, 윈터가 작게 웃었다.

“아가씨. 공작님 놀이는 그만하고 주무시죠. 늦게 주무시면 키 안 큽니다.”

잠자리를 정리해준 나일라가 담담히 윈터에게 말했다. 몸을 돌린 윈터가 새침한 얼굴로 혀를 찼다.

“쳇, 알겠어. 잘자, 나일라.”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시고 윈터는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나일라는 웬일로 한 번에 말을 듣는 윈터가 의심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뭔가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네, 아가씨도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일라가 곧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 잠드는 척하던 윈터가 눈을 떴다.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윈터가 줄곧 시선을 두던 창밖을 가만히 살폈다.

이내 기다리던 신호가 왔다.

담벼락 너머에서 반짝, 반짝, 반짝. 세 번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한 윈터가 씨익 미소 지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닦달해서 공작가를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아이셀이 준 약 덕분에 최근 윈터는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한동안 미뤄두었던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헉, 허억…….”

“아가씨, 조금 쉴까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물론 운동을 쉬는 동안 체력은 더 바닥을 쳤다.

얼마 뛰지도 않아서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시무룩한 메이딜리언을 보며 제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던 윈터가 물었다.

“너, 너는…… 너는 왜 멀쩡해…….”

“저는 그동안 열심히 했거든요.”

“앞으로, 더, 더 열심히…… 해…….”

이 세계의 흑막답게 메이딜리언은 체력이 쑥쑥 늘었다. 요만큼 뛰는 것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그런 메이딜리언이 부러우면서도 뿌듯해서 윈터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물론 윈터의 손은 애처롭게 바들바들 떨렸다.

“후우, 앉으니까 살 것 같다.”

“이제 괜찮으세요?”

“어어. 아까는 죽는 줄 알았어.”

연무장 옆에 두었던 물을 벌컥벌컥 마신 윈터가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았다.

그 옆에 따라 앉은 메이딜리언은 작게 울상을 지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죽는다는 소리가 어린 마음에 꽤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게 퍽 귀여웠던 윈터가 작게 웃으며 메이딜리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달리기하다 죽진 않을 거니까.”

아직 죽을 날은 좀 남았다.

작게 심호흡을 하며 연무장 뒤쪽을 살피던 윈터가 이내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체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몸은 여전히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오늘은 할 일이 많았다.

아침부터 괜히 바쁘게 움직인 게 아니었으니까.

“메이.”

“네?”

“오늘은 좀 새로운 곳을 탐방해볼까?”

저 멀리 윈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메이딜리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초에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하자는 일에 토를 달아본 적이 없었다.

두 꼬마는 나란히 걸어 건물 뒤쪽으로 돌아갔다.

마침 식자재를 들여오는 시간이었다. 공작가의 후문을 통해 산더미 같이 들어오는 물자들을 보며 메이딜리언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요즘 블라디미르 공작은 아픈 윈터를 위해 몸에 좋다는 산해진미들은 다 들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상회에서 사들인 물건들이 공작가에 들어왔다.

“우와, 이건 뭐야? 신기하게 생겼네!”

열심히 포대를 나르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수레 하나에 다가간 윈터가 외쳤다.

공작가의 아가씨를 발견한 사용인이 얼른 대답했다.

“아, 그건…… 모나 꽃의 열매입니다.”

“흐응, 그렇구나. 난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이거 어디에서 온 거야?”

“제니마 상회에서 구해왔답니다.”

그 말에 두 아이의 표정이 상반되게 변했다.

와락 인상을 쓴 메이딜리언과 달리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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