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 *
윈터의 지시에 따라 메이딜리언에게 새 보금자리가 생겼다. 크기는 좀 작았지만 윈터의 방 바로 옆이었다.
사실 크기도 윈터 기준에서나 작았지 메이딜리언에게는 무척이나 커다랗고, 창문도 있는 훌륭한 방이었다.
공작가의 망나니 아가씨가 대체 마구간지기 아들에게 왜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퍼주는지는 모르지만, 다들 타이그의 비보를 듣고는 뭐라 말을 더 얹지 못했다.
그러다 자기 손목도 잃을 수는 없으니까.
아침 일찍 깨어난 메이딜리언은 제게 주어진 포근한 베개와 이불에 뺨을 비비며 난생처음 맛본 평온함을 만끽했다.
‘우리 메이, 건드렸더라?’
‘감히 내 메이를 건드리다니, 손목 하나 정도 내놓을 각오는 돼 있겠지?’
요즘 들어 제게 일어나는 일들이 꿈만 같았다.
“우리 메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내 메이, 라고 했어.”
끄악, 작은 비명과 함께 이불을 푹 덮어쓰고 우당탕 발버둥을 치던 메이딜리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전기가 일어난 은빛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에 솜털처럼 반짝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얼른 몸단장을 해야지.
부지런히 세수하고 말끔하게 옷까지 갖춰 입은 메이딜리언이 호다닥 거울 앞에 가서 섰다.
아직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아 옷을 들치면 멍 자국이 가득했지만, 어쨌든 겉은 나름 멀쩡해 보였다.
“헤헤.”
바보처럼 웃던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곧 다시 우울해졌다.
거울의 반도 차지 않는 제 몸이 갑자기 무척이나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제 윈터 곁에 서 있던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겁고 긴 장검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며 굳건하게 윈터를 지키던 날카로운 얼굴. 거대한 어깨와 단단한 몸까지.
자신은 밀쳐내지도 못하던 아버지를 한 손으로 짓누르던 강인함이 무척이나 대단하고 부러웠다.
‘어휴……. 이 작은 게 언제 다 크지.’
혼미한 정신 속에 들었던 윈터의 중얼거림까지 떠오르자 메이딜리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렇게 안 작은데. 금방 크는데.”
불쑥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을 차지한다.
자식의 키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다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래도 많이 못 클 것 같았다.
그 기사님만큼은 커야 아가씨를 번쩍번쩍 들고 어디든 다닐 텐데.
입술을 삐죽이던 메이딜리언이 거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강해지고 싶다. 강해져서 지켜주고 싶다.
유리처럼 붉은 눈동자 안에서 기이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 * *
“흠흠.”
빠르진 않지만 마구간지기도 치웠고, 차근차근 계획대로 흘러가는 상황들을 보며 윈터는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나란히 복도를 걷던 나일라가 한껏 신이 난 윈터를 보며 슬쩍 말을 붙였다.
“그거 아세요?”
“응? 뭐를?”
“요즘 아가씨한테 새로운 별명이 생겼더라고요.”
“별명?”
“네. 손목 수집가라고 불리시던데요.”
그 말에 윈터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아직 한 번밖에 안 그랬는데 벌써 그런 소문이 났다고? 이대로 흑막의 길을 차근차근 밟으면 되겠군.
윈터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짠 판에서 장난질 치려면 손모가지 정도는 걸어야지.”
그 말에 나일라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아가씨, 제발 그렇게 노름꾼처럼 말하지 좀 마세요.”
“왜. 도박 맞지. 목숨을 건, 미래를 위한 도박! 음하하하!”
“어휴…….”
점점 이상해지는 아가씨를 보며 나일라가 이마를 짚었다.
그때 뭔가를 발견한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황급히 앞으로 튀어 나갔다.
“메이!”
윈터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메이딜리언이었다.
잔뜩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곧 윈터를 발견한 얼굴이 활짝 피어오른다.
“여긴 어쩐 일이야?”
바로 옆방 쓰는 사이에 문 앞에서 기다릴 일이 뭐가 있나 싶어 윈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줄곧 고민하던 말을 꺼내려던 메이딜리언은 막상 말을 꺼내기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가씨. 저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이라고? 뭔데?”
평소에는 바라는 거 없냐, 원하는 거 없냐 아무리 물어도 없다고만 하더니. 느닷없는 부탁에 윈터가 반색했다.
“저, 저도…….”
“응, 응. 너도 뭐?”
제게 집중하는 시선이 어지간히도 부담스러웠는지, 메이딜리언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검을 배우고 싶어요!”
“……검?”
“네, 거, 검이요.”
질러놓고 나니 불끈 쥐었던 주먹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메이딜리언은 화끈거리는 제 뺨을 꾹꾹 눌렀다.
고작 마구간지기의 아들이, 감히 검을 배우고 싶다 청하다니.
주제 넘는다고 혼이 나면 어떻게 하지? 뒤늦게 걱정이 밀려왔다.
메이딜리언의 걱정과 달리 윈터는 벌어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내 최애야.
안 그래도 따로 시키려고 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한다고 하니 이게 웬 떡인가.
“나일라.”
“예.”
“내가 지난번에 지시한 거 있지? 그거 그대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집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아가씨.”
“오늘따라 날 찾는 사람이 많네. 무슨 일이야?”
“아가씨를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뭐, 그래. 알겠어.”
평소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집사가 저런 표정이라니. 손님이라지만 이미 누구일지 뻔했다.
이 시기에 공작가를 찾을 만한 사람은 ‘그자’뿐이니까. 한순간 윈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원작의 윈터는 그자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그 무성의한 돈벌레!’
이름부터 밝히자면 아이셀 마티아스. 대현자 에르퀼 모네스티에의 유일한 제자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대한 마법사이다.
몇 년 전 대현자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고 아이셀도 행방이 묘연해졌다.
실상은 술이나 먹고 게임이나 하며 이리저리 한량 같은 방랑 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지만.
블라디미르 공작은 하나뿐인 딸의 병을 고치고자 본인의 자본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아이셀을 수소문하고 거금을 들여 초빙했다.
원래라면 귀족들 뒤치다꺼리는 딱 질색인 아이셀이지만, 하필 가진 돈이 똑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초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윈터냐?”
응접실로 들어서는 윈터를 보자마자 아이셀이 대뜸 물었다.
비죽 웃는 눈동자는 서늘한 아이스 블루 색이었다. 푸석한 더벅머리는 간신히 뒷덜미를 가릴 만큼 짧았다.
원작의 윈터는 처음부터 아이셀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줄곧 공작가의 독재자로 군림하던 윈터였으니, 제게 존대는커녕 존중도 없는 아이셀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아무리 돈이 부족해서 왔다지만 성격 나쁜 마법사가 갑자기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결국 두 사람은 시종일관 으르렁대며 대립하다가 끝내 아이셀이 돈도 치료도 포기하고 공작가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생의 윈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열여덟이 되면 죽겠지만, 그 전에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여야 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방긋 해맑은 웃음을 뿌리며 아이셀 앞에 앉은 윈터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아이셀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내가 마법사인 건 어떻게 알았지?”
“집사가 알려줬어요.”
오는 내내 아이셀이 얼마나 위대한 마법사인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윈터였다.
평소라면 그 말을 들은 척도 안 했을 텐데.
순순히 마법사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윈터의 모습에 집사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공작가에 오기 전에 윈터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아이셀이 제 앞에 앉은 작은 꼬마를 살펴보았다.
블라디미르 공작가 직계의 상징이라는 새카만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짝였다.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핏기없는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며 마르고 있는 몸은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유독 아이셀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윈터의 눈이었다.
곧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는 기이한 열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너, 꽤 웃긴 꼬마로구나?”
픽 웃은 아이셀이 말했다. 곧 그녀가 집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예? 하, 하지만…….”
집사가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아이셀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 녀석의 상태를 정밀하게 확인하려면 주변을 물리는 게 가장 나아.”
“그래, 집사. 그렇게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윈터까지 아이셀의 말에 동의하자 집사는 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이셀의 지시대로 주위 사람들까지 모두 물렸다.
이내 사방이 조용해지고, 응접실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셀이 윈터에게 다가왔다. 청명한 아이셀의 눈을 마주하며 윈터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건, 섣불리 몸을 움직이지 말 거라.”
“네, 알겠어요.”
아이셀의 커다란 손이 윈터의 이마를 짚었다. 곧 우웅―하는 진동음과 함께 응접실의 집기가 요동쳤다.
작게 중얼거리는 아이셀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윈터의 주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윈터의 눈이 커졌다.
원작의 아이셀은 윈터의 시건방짐에 빈정이 상해서, 마력을 눌러주는 약을 만들어주고, 주술 몇 가지를 걸어주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자, 이제 됐다.”
“……뭐가요?”
“결계.”
결계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윈터가 작게 인상을 썼다.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는 방어막이 생겼으니, 이제 네 힘이 얼마나 되는지 맘 편히 측정할 수 있겠지. 보이나?”
아이셀의 왼손에 작은 별 무리가 생겨났다. 은빛과 푸른빛이 섞인 마력이 손끝에 어리다가 위로 쏘아졌다.
그녀의 말대로 무형의 반구 모양 방어막이 응접실 내에 생겨나 있었다.
“저걸 있는 힘껏 부숴보아라.”
“제가요?”
“그래.”
“어떻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