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50)

5화

* * *

침대에 누운 메이딜리언이 작게 끙끙거리며 앓았다.

사방이 꽉 막혀서 시야가 제대로 구분되지도 않는 꽉 막힌 공간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이죽거렸다.

‘요즘 아가씨가 아껴준다던데, 가서 돈 될 만한 것 좀 훔쳐 와.’

메이딜리언이 윈터와 함께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곳을 교묘하게 때리며 협박했다.

윈터의 방에서 금붙이나 보석 같은 것을 몰래 슬쩍 해오라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덕분에 벌써부터 반항한다며 매일 밤 아버지에게 얻어맞았다.

‘이 건방진 게! 네놈만 호의호식하고, 굶고 있는 아비는 생각도 안 하지!’

그의 아버지는 한 번도 굶주린 적이 없었다. 만약 정말 먹을 것이 없다면 메이딜리언에게 동냥을 시켜서라도 자기 배는 채울 인간이었다.

사실 윈터가 가지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을 때 솔직하게 말했다면, 어쩌면 메이딜리언도 이렇게 심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메이, 아프면 아프다고 해.

그의 아버지는 늘 메이딜리언에게 다 너를 위한 것이라며 손찌검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애정이 아니었다. 그건 오히려 보드라운 비누 향 같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저녁 들판과 같은 눈빛이나 조곤조곤 잠들 때까지 속삭여주는 다정한 목소리와 닮은 것이다.

윈터는 힘도 없고 나약하기만 메이딜리언에게 그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사실 메이딜리언은 이미 윈터가 공작가의 망나니로 유명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불쌍한 척도 해보고, 애써 위해주는 척 몇 번 말을 건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만약 윈터가 잠깐의 장난이자 여흥으로 자신을 위하는 척하는 것일지라도, 메이딜리언에게는 그 온기가 간절했다.

그래서 내내 웅크리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더듬더듬 말했다.

‘아, 아파요.’

‘뭐?’

‘아파요, 아버지. 아파서 죽을 것 같…….’

‘이게 감히 어디서 말대꾸야!’

그러나 그의 아가씨도 틀린 것이 있었다.

아프다고 솔직히 말해도 발길질이 멈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멈추기는커녕 내일은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겠지.

폭력 이후에는 늘 더 끔찍한 협박도 함께였다.

‘만약 오늘도 가져오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네 아가씨를 없애버리겠어.’

메이딜리언은 괜찮았다. 아픈 건 잠깐이니까.

내일이면 다시 포근한 미소를 마주하며 웃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윈터를 언급하는 것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너희 아가씨, 얼마 안 가 죽는다지?’

히죽 웃으며 하는 말에 메이딜리언은 애원했다. 아가씨는 안된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윈터는 늘 메이딜리언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며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따스한 안온함을 떠올리며 메이딜리언은 엉엉 울었다.

메이딜리언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아버지가 물었다.

‘그 약한 몸은 발길질을 얼마나 버틸 것 같아?’

“……헉!”

마침내 메이딜리언이 번쩍 눈을 떴다.

헐떡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이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드디어 일어났네.”

윈터 대신 메이딜리언을 살피고 있던 나일라가 다가왔다.

줄곧 악몽이라도 꾸는 듯 끙끙거리다 깨어난 메이딜리언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 아가씨는요?”

“바깥에.”

나일라의 말에 메이딜리언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이상한 예감이 그를 휘감았다.

“밖에…… 어디요?”

별 고민 없이 나일라가 대답했다.

“네 아비를 만나러 갔단다.”

그 말에 얼굴이 단숨에 하얗게 질린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꿈에서처럼, 혹시라도 윈터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다급히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기하네. 그렇게 맞아 놓고도 그 인간이 걱정되나?”

설마 메이딜리언이 걱정하는 게 윈터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한편 메이딜리언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윈터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공작가의 대저택을 샅샅이 뒤졌다.

“안 돼, 제발…….”

기도와 같은 애원이 흐느낌처럼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안 좋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밤하늘처럼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은 흙으로 더럽혀지고, 상냥한 황금빛 눈동자는 고통으로 일그러지겠지.

작은 새끼고양이처럼 가녀리고 연약한 윈터는 아버지의 잔악한 발길질 한 번이면 그대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혹시 정말로 아버지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것처럼 윈터도 그렇게 빼앗아가는 것은 아닐까?

메이딜리언은 절대로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마침내 그가 연무장에 다다랐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 내쉰 메이딜리언이 황급히 윈터를 찾았다. 횃불이 일렁거리며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웅성웅성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릿속엔 온통 윈터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한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마침내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발견했을 때,

“감히 내 메이를 건드리다니, 손목 하나 정도 내놓을 각오는 돼 있겠지?”

그의 여린 아가씨는 제 아버지를 무릎 꿇린 채 사나운 표범처럼 느른하게 웃고 있었다.

“……어, 어라?”

* * *

한편 윈터의 말에 타이그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예?”

“아무것도 안 훔쳤다고.”

또박또박 재차 대답한 윈터가 고개를 숙였다. 코앞에서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횃불에 비쳐 활활 타올랐다.

“근데 넌 메이가 뭔가를 훔쳤다고 생각하나 봐?”

“저, 그게 아니라…….”

“게다가 당연히 메이는 네가 시켰다고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마, 말씀드렸다시피, 그 녀석이 말끝마다 거짓말에 또 손버릇도 고, 고약한 놈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자기소개는 그쯤 해두고.”

성급하게 주워섬기는 변명은 영 조악했다. 더 들어봤자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을 게 뻔해서 윈터는 말을 끊어냈다.

“왜 걔를 때렸지?”

윈터의 물음에 타이그가 번쩍 고개를 들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락바락 외쳤다.

“마, 맞을 만한 짓을 했습니다! 시키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른을 무시하는 눈빛도 영 질이 좋지 않은 놈입니다!”

처음엔 생각나는 대로 뱉은 말이었지만, 말하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고작 그 비루먹은 자식 때문에 자기가 지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자식을 훈육하는 것은 당연한 아비의 몫이고, 제 권리입니다. 아무리 아가씨라도…….”

“닥쳐.”

줄줄이 늘어놓은 개소리에 끝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싸늘하게 웃은 윈터가 나직이 속삭였다.

“감히 내 메이를 건드리다니, 손목 하나 정도 내놓을 각오는 돼 있겠지?”

부스럭, 타이밍도 좋게 주인공이 등장했다.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두 손을 덜덜 떨면서도 메이딜리언은 착실하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 아가씨?”

“이리 와, 메이.”

윈터가 손을 뻗자 메이딜리언은 순한 양처럼 그녀에게 걸어갔다.

바로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제 아비는 전혀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더 자지 왜 나왔어?”

“거, 걱정돼서요…….”

그 말에 윈터가 기쁜 듯 웃었다.

“내가 걱정되었단 뜻이지?”

발그레한 얼굴로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윈터가 보란 듯이 타이그를 가리켰다.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내려야지. 그래, 저자를 죽여줄까?”

“네?”

당황한 메이딜리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다렸다는 듯 유스터스가 검을 뽑았다.

제 목에 서늘한 칼날이 닿고 나서야 타이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아가씨!”

그러나 윈터의 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민하게 감지한 타이그가 재빨리 애원하는 대상을 바꿨다.

“메, 메이! 네가 얼른 아가씨께 말씀드려라! 얼른! 네가 여태껏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고요한 연무장에 타이그의 발악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어디서 개가 짖나 싶은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래?”

그녀가 천사 같은 얼굴로 속삭였다.

“원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짓밟아줄 수 있어.”

메이딜리언은 말간 눈으로 애원하는 제 아비를 내려다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유순한 얼굴이 금세 양쪽으로 도리질을 쳤다.

“아, 안 돼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윈터가 흐뭇하게 웃었다.

“하여간, 착해 빠져서는.”

장차 뒷 세계를 장악할 어마어마한 흑막에게 하는 말 치고는 참 안 어울렸다.

그러나 윈터의 눈에 메이딜리언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등장인물이 아니던가.

사실 원작에서 메이딜리언의 첫 살인은 저 마구간지기를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패착이었다.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메이딜리언에게는 자신이 숨겨진 황자라는 증언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마구간지기의 죽음 때문에 섭정 황제를 비롯한 음해 세력들에게 얼마나 정당성을 의심받았던가.

결국 열받은 메이딜리언이 그들을 죄다 쓸어버리면서 악명을 더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윈터가 그의 곁에 있으니까.

저런 소중한 주둥이를 함부로 없앨 수는 없지.

밝은 얼굴 그대로 다시 몸을 돌린 윈터가 타이그에게 말했다.

“메이 덕분에 목숨은 건지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그럼 전 이만…….”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인 타이그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뒤로 내빼려는 듯한 움직임을 알아차린 윈터가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기사들이 다시 타이그의 어깨를 꽉 잡아 눌렀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타이그를 보며 윈터가 말했다.

“누가 가도 좋다고 했지?”

“하, 하지만 살려주신다고…….”

“그럼. 목숨은 붙어 있게 할 거야.”

불길한 말이었다.

왠지 목숨만 멀쩡하고 다른 건 온전치 못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곧 윈터가 천진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손이나 발이 멀쩡하면, 또 우리 메이를 건드리겠지?”

눈치 빠른 타이그가 얼른 납죽 엎드려 읍소했다.

“아, 아가씨. 아가씨, 제발…….”

이 상황에서도 타이그는 윈터에게는 빌었지만, 메이딜리언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뉘우치지도 않는 인간에게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손이랑 발, 사이좋게 하나씩 잘라서 내쫓아라.”

마침내 내려진 선고에 타이그의 얼굴이 피가 싹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창백해졌다.

스르릉, 다시 한번 유스터스의 검이 뽑혔다.

“아, 아가씨! 아가씨, 안 됩니다. 저, 저는 그럼 앞으로 어찌 살라고. 제발 자비를, 자비를, 아가씨!”

마구간지기가 발악하는 소리에도 윈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메이딜리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린 이만 가자.”

“……네.”

메이딜리언 또한 제 아비가 어찌 되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온통 시선이 윈터를 향해 있었다.

어쩐지 전보다 더 눈이 반짝거리는 것 같은데.

“으, 으아아악!”

두 사람이 몸을 돌리자마자 뒤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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