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 *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최근 윈터가 메이딜리언에게 동화책부터 시작해서 대법전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읽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메이딜리언은 배우는 족족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서 가르치는 맛이 있는 학생이었다.
“브렌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윈터는 사서부터 찾았다.
공작가의 도서관을 관리하는 브렌다는 이제 일흔이 다 되어가는 호호 할머니였다. 선대 공작 때부터 이곳을 관리해온 그녀는 올해 들어 부쩍 허리를 두드리며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흐응, 오늘도 없나 보네.”
조용한 도서관을 둘러보던 윈터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 얼굴을 보던 메이딜리언이 번쩍 손을 들고는 외쳤다.
“제,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무슨 책이 필요하세요?”
“으응, 아니야. 너만 시킬 순 없지. 같이 가자.”
오늘 윈터가 메이딜리언에게 읽게 할 책은 바로 황실 가계도였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윈터가 원하는 책은 너무 높이 있었다.
책장 맨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윈터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호다닥 달려가 도서관 한편에 있던 사다리를 가져왔다.
“제, 제가 올라가서…….”
“아냐. 이런 건 내가 할게.”
“아가씨가요?”
“그럼. 내가 누나잖아.”
실제로는 고작 1살 차이지만 정신연령은 그보다 한참 차이가 났다. 비쩍 마른 아홉 살짜리 꼬마에게 이런 일을 시킬 정도로 윈터는 양심이 없지 않았다.
“무슨 책인데 그렇게 찾으시는 거예요?”
보통 때였으면 진작에 포기하고 다른 책을 읽거나 도서관을 뛰쳐나갔을 윈터인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책 선정에 심혈을 기울이는 듯했다.
“보면 알아.”
씩 웃은 윈터의 손에 마침내 황실 가계도가 잡혔다. 이 책은 메이딜리언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아야 했다.
왜냐하면 이곳에 적힌 이름들이 모두 그의 가족이자 선조들이니까.
어차피 나중에 밝혀질 테지만, 메이딜리언은 숨겨진 황자였다.
9년 전, 당시 황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는 황위를 호시탐탐 노리던 동복형제가 있었다. 혹시나 그가 자신의 아이를 해치지 않을까 염려하던 황제는 고심 끝에 동생의 눈을 피해 갓 태어난 메이딜리언을 황궁 밖으로 빼돌렸다.
물론 그 결말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을 거니까.
메이딜리언이 본인의 가족들을 미리 알아두었으면 하는 윈터의 눈물 나는 배려였다.
“자, 이거 받아.”
책장에서 꺼낸 책을 메이딜리언에게 넘겨주던 윈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마력이 불안정해지며 머리가 핑 돌았기 때문이다.
“아가씨도 얼른 내려……. 아가씨!”
윈터의 손에서 책을 받아들던 메이딜리언의 눈이 커졌다. 사다리에서 휘청거리던 윈터가 그대로 중심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윈터는 두 눈을 질끈 감았고, 메이딜리언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쿠당탕, 큰 소리가 나며 사다리도 책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으윽…….”
떨어지면서 팔꿈치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제 팔을 감싼 채 윈터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이상하게 바닥이 별로 딱딱하지 않았다.
“헉, 메이!”
몸을 일으키자 자기를 끌어안고 쓰러진 메이딜리언이 보였다.
“으…….”
“너 괜찮아?”
윈터가 제 팔이 아픈 것도 잊고 당장 메이딜리언을 일으켰다. 어딜 크게 다친 건지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고통으로 잘게 떨렸다.
이 와중에도 메이딜리언은 윈터부터 챙겼다.
“아, 아가씨는 다친 데 없으세요?”
“난 멀쩡해.”
팔꿈치가 좀 얼얼하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메이딜리언이 멀쩡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메이딜리언은 제 옆구리를 부여잡고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했다. 어찌나 아파하는지 어느새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윈터가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메이딜리언이 또 윽, 하고 몸을 움츠렸다.
“왜 그래? 어디 부러진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아니기는! 한번 보…….”
줄곧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치우고 셔츠를 슬쩍 걷은 윈터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등과 옆구리에 누군가 심하게 발길질이라도 한 것처럼, 뒷굽 자국으로 온통 새파란 피멍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
“바, 방금 넘어져서, 그, 그래서 그런 가보, 봐요. 이제 괜…… 괜찮아요. 하, 하나도, 하나도 아, 안…… 아파요.”
당황한 메이딜리언이 연신 셔츠를 아래로 잡아 내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윈터의 눈치를 보며 애처롭게 떨렸다.
방금 넘어져서 생긴 거라기엔 너무 심한 상처였다. 메이딜리언이 필사적으로 그것을 숨기는 것을 보며 윈터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누가 봐도 무자비한 구타의 흔적이었다.
참담한 심정에 윈터가 푹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직 메이딜리언의 곁에 인간 말종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슬슬 열받기 시작한 윈터가 이를 악물었다.
“메이.”
“네, 네. 아가씨.”
속내야 어떻든 그 어느 때보다 상냥한 목소리를 가장한 채 윈터가 말했다.
“우리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자.”
“이, 일단이면…….”
그런데 평소라면 네, 하고는 말았을 메이딜리언이 말문을 열었다.
상처를 노려보며 이글이글 살기를 피워내던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메이딜리언의 붉은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나 윈터는 재촉하지 않고 메이딜리언의 말을 기다렸다. 곧 메이딜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 그다음은요?”
미약한 기대가 담긴 말에 윈터가 씨익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네 몸 이렇게 만든 새끼, 똑같이 밟아주러 갈 거야.”
* * *
“다 마쳤어? 메이는 어때? 괜찮은 거지?”
주치의가 자리에서 일어서기 무섭게 윈터가 마구 질문을 던졌다.
“네, 상처는 전부 치료해두었습니다. 우선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아가씨가 부른다는 소리에 허겁지겁 달려왔던 주치의는 멀쩡하게 서 있는 아가씨 대신에 마구간지기의 아들을 치료하게 되었다.
팔꿈치 조금 까진 거 말고는 말짱한 아가씨 대신 이 가여운 꼬마가 다쳤기 때문이었다.
“하아, 다행이다.”
메이딜리언이 괜찮다는 말에 윈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치료를 받던 도중 그대로 정신을 잃은 메이딜리언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 천사 같은 어린애의 이마를 쓸어주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어휴……. 이 작은 게 언제 다 크지.”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한탄하는 열 살짜리 꼬맹이를 보며 다른 사용인들이 끼룩 굳었다.
그러는 윈터 본인도 비실비실 야위어서 영 안쓰러웠다. 요즘 들어 소화도 잘되지 않는 데다 툭하면 피를 토한 덕분이었다.
“아가씨, 행어 경이 왔습니다.”
조심스레 윈터 곁에 다가온 나일라가 속삭였다.
그 말에 줄곧 메이딜리언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윈터가 벌떡 일어섰다.
유스터스 행어.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봉신 가문인 행어 가문 출신의 차남이지만 공작가에 충성심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남자였다.
미래에 메이딜리언의 검술 스승이 될 자이기도 했다.
아가씨가 저를 콕 집어 부른다는 말에 또 무슨 일인가 싶었던 유스터스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메이딜리언의 몰골이 적나라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공작가 기사들은 잔인한 걸 보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작은 애를 무자비하게 팬 걸 보니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순간 유스터스는 윈터를 의심했다. 그러나 윈터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행어 경, 가서 3번 마사의 마구간지기를 끌고 와.”
조용한 목소리는 고저 없이 낮았다. 그런데 유스터스는 순간 어깨를 움찔했다.
윈터의 기세가 평소와 다르게 살벌했기 때문이다.
패악 떠는 걸 볼 때마다 참 악마 같은 꼬맹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오늘처럼 기묘한 느낌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역시 아무리 어려도 블라디미르 공작의 후계자라 이건가.
덕분에 유스터스와 함께 온 기사들도 잔뜩 군기가 들어갔다.
그들 또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탓이었다.
“예, 옙!”
“……알겠습니다.”
자리를 뜨는 기사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꿈나라에 있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잠시 풀어졌던 표정이 금세 얼어붙는다.
“나일라.”
“예, 아가씨.”
“메이 좀 봐줘. 잠시 나갔다 올게.”
“네, 그럴게요.”
곧 윈터가 바깥으로 나갔다.
기사들이 미리 준비해놓았는지, 평소라면 고요했을 연무장에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던 윈터를 향해 곧 기사들이 걸어왔다.
그들 사이에 질질 끌려오는 마구간지기가 보였다.
오는 길에 몇 대 얻어맞았는지 입술도 터진 데다 광대뼈에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편 마구간지기는 윈터를 발견하고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갑자기 기사들이 저를 끌고 가기에 혹시 메이딜리언 때문인가 싶어 머리 굴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윈터가 나왔다니. 공작도 아니고 저런 고약한 어린애 정도는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마구간지기의 생각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아 윈터가 비죽 웃었다.
요즘 제 아들한테 잘해준다는 소문 때문에 아주 만만히 보는가 본데, 그게 메이딜리언 한정이라는 걸 곧 알게 될 것이다.
“안녕, 타이그.”
“아, 아이고. 미천한 제 이름을 귀한 아가씨께서 어찌…….”
“넌 나중에 꽤 중요한 증언을 할 인간이니까. 기억해둬야지.”
“예? 제가 무슨…….”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윈터의 말에 타이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손사래를 친 윈터가 말을 이었다.
“그건 됐고. 우리 메이, 건드렸더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애 몸에 멍이 가득하던데?”
멍이라는 말에 눈을 굴리던 타이그가 어물어물 대답했다.
“그, 그건 훈육 차원에서……. 아무튼 결코 제가 시킨 짓은 아닙니다.”
윈터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왠지 묘하게 말에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데?
애를 왜 때렸냐고 물어봤는데 자기가 시킨 짓이 아니라는 건 어디서 어떻게 생각하면 나올 수 있는 대답인 걸까.
“시킨 짓이 아니라니?”
“그, 그 아이가 어릴 적부터 워낙 손버릇이 나쁜 터라 남의 물건에도 손을 잘…….”
아하. 대충 감을 잡은 윈터가 차게 웃었다.
“메이는 아무것도 안 훔쳤는데?”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