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50)

1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이제 당신이 원하던 대로 세계는 내 손안에 있어.”

오랜 침묵 끝에 남자가 말했다. 그러고는 씁쓸한 듯 옅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여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당신이 바라던 착한 아이로 자라지 못해 미안하군.”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커튼이 펄럭이는 소리가 공백을 메웠다.

현실을 부정하듯 여자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어차피 당신은 날 못 놓아. 그렇지?”

그런 그녀를 보는 남자의 눈빛은 서글프지만 잔인한 빛을 띠었다.

불길한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자 여자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놓치지 않을 거라는 듯 성큼 다가선 그가 낮게 속삭였다.

“난 영원히 당신 것이니까.”

남자에게서는 코를 찌르는 혈향이 풍겼다.

그에게 붙들린 채 애처롭게 떨던 여자의 입술이 간신히 열렸다.

“이…….”

곧 그녀가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와락 잡고는 외쳤다.

“이 미친놈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 * *

윈터는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금지옥엽 외동딸이었다.

빛도 제대로 투과하지 못할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천사 같은 열 살짜리 꼬마는 어딜 가든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실은 그 꼬마가 악귀나 다름없는 흉악한 성정을 가졌다는 것 또한 알음알음 안팎으로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으악! 저, 저리 가! 악!”

“흐음, 네가 아직 덜 맞았구나?”

나붓한 손놀림이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사촌 동생 중 하나를 깔고 앉아 주먹으로 후려 패는 윈터의 표정은 영 심드렁했다.

그러고 보니 얘 이름이 뭐였더라. 하도 사촌들이 많아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윈터가 상대를 패는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만에 조용히 혼자 후원을 산책하고 있던 그녀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더랬다.

“이 거지 같은 게, 어디 그 더러운 손을 대! 당장 핥아서라도 닦아! 닦으란 말이야!”

제국 절반의 황금은 블라디미르에게.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격언답게 부유한 공작가에서 자란 사촌 동생 놈은 훌륭한 쓰레기로 자라고 있었다.

그 싹수 노란 놈이 비쩍 마른 마구간지기의 아들에게 윽박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안 그래도 맘에 안 들던 놈이 저렇게 빌미를 주면 기꺼이 동참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그래서 윈터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사촌을 잡아다가 쥐 잡듯이 패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름을 모르는 건 사촌 동생이나 마구간지기의 아들이나 똑같았다.

기왕 팰 거 좀 더 살이 포동포동 올라서 때리는 맛이 있는 사촌이 나으니까.

“아악, 윈터! 이 미친개가 진짜!”

얼굴을 가린 채 소리만 꽥꽥 질러대던 사촌 동생이 마침내 윈터를 밀치고는 벌떡 일어섰다.

“야, 잠깐, 아직 덜 때렸……!”

“으아아악!”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다시 손을 뻗는 윈터를 보고는 기겁한 사촌이 그대로 달음질쳤다.

주먹이 얼얼하긴 했으나 아직 만족할 만큼 때리지 못한 윈터가 입맛을 다셨다.

도망치는 애를 쫓아가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겠지만 이미 흥이 깨져 버린 뒤였다.

“쳇, 시시하기는.”

그런 윈터의 시선이 곧 옆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마구간지기의 아들에게로 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눈이 마주친 마구간지기 아들이 히끅, 딸꾹질하며 벌벌 떨었다.

“때, 때리…… 시게요?”

마구간지기의 아들은 말도 잘 못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어눌하게 나오는 말을 듣고 있자니 윈터는 그만 김이 팍 새고 말았다.

원래 공부하려고 맘먹고 앉았는데 엄마가 공부 언제 하느냐고 물으면 하기 싫어지는 법이었다.

“아니.”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 윈터를 보며 놀란 마구간지기의 아들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멍이 퍼렇게 올라오고, 코피까지 주륵 흘리고 있었다.

그 흐리멍덩한 시선의 어디가 윈터를 이끌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야, 대신 너 얼굴 좀 제대로 보자.”

곧 윈터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흠칫 놀란 마구간지기의 아들은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얌전히 얼굴을 내줘야 했다.

그 순간이었다. 윈터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온 것은.

“너, 설마…….”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낯이었으나 분명 익숙한 이목구비였다.

어떤 존귀하신 신의 계시가 윈터에게 내리꽂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단숨에 모든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메이?”

“내, 내 이름…… 을 어, 어떻게…….”

더듬더듬 긍정하는 마구간지기의 아들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린 윈터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기절하고 말았다.

윈터 블라디미르, 열 살이 되던 해, 전생을 기억해냈다.

그녀가 그날 만난 마구간지기의 아들은 이 세계의 주인공인 메이딜리언.

즉, 그녀가 평생을 바쳐 사랑한 최애였다.

* * *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그는 모종의 이유로 버려진 황자로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

메이딜리언이 지나다니는 길마다 모두 황폐해지고, 그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은 무너지고, 사라졌다.

그가 잠시 머물던 가문조차 멸문했고, 그가 사랑한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게다가 평생 쌓아온 악행 덕분에 자신을 섬기던 사람들에게도 배신당하고 끝내 반역도로 처형당한다.

그러나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사랑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소설 속에서 최강의 미모를 자랑했기 때문에.

투명하고 결 좋은 은발은 눈이 시릴 정도로 찬란했고, 세상의 모든 불행을 가져다 모은 듯한 붉은 눈동자는 깊었다.

목소리는 음률처럼, 미소는 장미처럼.

눈썹 한 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껍데기를 가졌다고 묘사된 그를 어느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인성은 박살 났다. 그걸 윈터는 부정하지 않았다.

애가 잘생기긴 잘생겼는데, 쓰레기가 맞긴 했다.

근데 또 그렇게 완벽한 얼굴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설득력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이걸 모르고 살았는지. 윈터는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뭐 하긴, 모를 수밖에 없었지. 하인들은 그녀만 보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기 바빴으니까.

윈터는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금지옥엽이자 미친 망나니로 불렸다.

어릴 때부터 사악하기 짝이 없던 그녀는 여기저기서 악명 높았다.

안타깝게도 마력 폭주 때문에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죽고 말지만.

‘어라……?’

그제야 윈터는 자신이 얼마 못 살고 죽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곧 담담해졌다. 이미 한 번 죽어봤는데 두 번이라고 어려울까.

앞으로 고작 8년밖에 남지 않은 삶이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윈터는 화끈하게 메이딜리언의 덕질이나 하다가 생을 마감하기로 했다.

미래도 아는 김에 메이딜리언을 황제까지 만들어주는 꽃길을 깔아주고 사라지면, 더없이 훌륭한 삶이 되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확, 시야가 트였다. 동시에 먹먹한 귓가에서 누군가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

“위, 윈터! 정신이 드느냐?”

“아가씨!”

“아가씨,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잔뜩 열이 올라 뿌연 눈앞에 코가 새빨개져 퉁퉁 부은 얼굴이 보였다.

“……엄, 마?”

“그래, 그래! 엄마다. 내가 네 엄마야!”

힘겹게 부르는 목소리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작이 울음을 터뜨렸다.

주위에 있던 하녀들도 시선을 먼 산으로 던지거나 얼굴을 감쌌다.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이제 막 정신이 든 윈터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제 몸이 잔뜩 짓눌린 것처럼 무겁고 치아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춥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추운데,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숨은 무척 뜨거웠다.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던 그녀는 곧 착잡한 얼굴로 침대맡에 앉아 있는 중년 여성을 보았다.

공작 성의 주치의였다.

주치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윈터는 분위기 파악을 마쳤다.

‘아, 다들 알게 됐구나.’

아무래도 기절한 사이 마력 폭주라도 일으킨 모양이었다. 전에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몸 상태를 확인한 주치의가 시한부 선고도 내렸겠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엄마인 블라디미르 공작을 밀어냈다.

우는 소리 때문에 안 그래도 아픈 머리까지 징징 울렸다. 어차피 이런다고 갑자기 시한부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정신만 사나웠다.

“가……. 저리, 가…….”

손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서 툭툭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펑펑 눈물을 쏟아내던 공작은 그 미약한 몸짓도 간절한 듯 오히려 윈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 딸! 흑, 엄마에겐 숨길 게 없어. 제발 밀어내지 말렴. 내가 어떻게든 너를, 너를! 흐흑!”

아니, 그거 아니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고작 8년밖에 안 남은 삶, 윈터는 조금이라도 빨리 메이딜리언을 만나고 싶었다.

“……세상에, 윈터!”

메이딜리언을 만나겠다는 일념만으로 윈터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무리해서라도 움직이는 필사적인 모습에 끝내 주치의도 눈시울을 붉혔다.

“윈터, 내 아기! 어흐흑!”

“……와. 데려와…….”

“흑흑, 아가씨……!”

애써 일어났음에도 다시 풀썩 침대로 쓰러지는 윈터의 모습에 공작가는 또 한 번 울음바다가 되었다.

덕분에 메이딜리언을 데려와 달라는 윈터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윈터는 한 번 더 기절하고 말았다.

* * *

윈터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침대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그동안 기절만 다섯 번, 각혈도 세 번이나 했다.

“이, 거지 같은 몸뚱이 같으니라고…….”

원래도 먹고 싶은 것만 먹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았던 윈터였다.

마력 폭주를 일으키고 침대에서 골골대기만 하니 체력은 금세 훅 떨어졌다.

게다가 소문은 또 어찌나 빠른지. 공작가 망나니 아가씨가 얼마 못 산다는 소문에 사용인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평소처럼 날카롭게 말하며 패악을 떨어도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 주는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게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윈터는 일단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사람이 곧 죽는다고 해서 갑자기 개과천선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도 차차 알게 될 테니까.

원작에서 윈터는 열병을 앓다 깨어난 즉시 자신이 쓰러지는 원인이 된 사촌과 메이딜리언을 데려와 자근자근 밟아버린다.

사실 그 둘이 원인이 아님에도 그랬다. 괜히 공작가의 미친 망나니로 불린 게 아니었다.

심지어 원작의 윈터는 그 뒤로도 틈틈이 메이딜리언을 불러서 쥐어 패고 심심할 때마다 화풀이하다가 마력 폭주로 죽었다.

덕분에 메이딜리언은 나중에 이 일을 빌미로 블라디미르 가문을 멸문시킨다.

그래, 원작에서 그가 잠시 몸을 의탁했다가 후에 쫄딱 망한 그 가문이 바로 윈터의 가문이었다.

원작에서는 메이딜리언을 괴롭히며 그의 복수심을 키우는 변두리 악당에 불과했던 윈터지만, 이번에는 좀 더 스케일 크게 놀아보기로 했다.

우선,

“신디.”

“네, 아가씨. 부르셨어요?”

“메이딜리언 좀 불러줘.”

“……예?”

최애 얼굴부터 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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