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42화
나는 아멜리아 프리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꿈틀거렸던 눈썹은 어느새 가지런히 제자리를 되찾았다. 그녀는 다시금 리엘라와 대화에 집중했다.
언제까지 무시가 이어질까.
‘오래 가진 않을 거다. 어차피 급한 건 저쪽이야.’
나는 묵묵히 고기를 썰었다. 어느덧 익숙해진 예법 덕분에 접시에 칼이 닿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윽고, 아멜리아는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지훈 백작.”
“네.”
“오늘 그대를 부른 이유를 알고 있나요?”
리엘라를 대할 때와 다른 감정 없는 목소리.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가 바라는 일은 단 하나 뿐이다.
크리스의 황위승계.
내가 그 일에 도움이 될 지, 오늘 확실히 판단하려 하는 것이다.
“그대가 유리한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아멜리아는 차갑게 말했다.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났구나.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가 얼굴 곳곳을 찔렀다.
나는 맞은편의 리엘라를 슬쩍 쳐다보았다. 리엘라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보라는 거구나.’
원래라면 리엘라가 옆에서 도움을 주겠지만 방금 전 그녀의 생각이 바뀐 것 같다. 그럼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줘야지.
아멜리아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오해를 하신 겁니다. 유리한 입장이라니요.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습니다.”
“누가 당신의 어머니라는 거죠? 백작은 말을 가려서 하는 예의를 배우지 않은 건가요?”
아멜리아의 눈이 찡그려졌다.
“죄송합니다. 주의 하겠습니다.”
“넘어가겠어요. 그래서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요?”
“네, 있습니다.”
“해보세요.”
아멜리아는 팔짱을 끼며 턱짓을 했다.
‘이래서야 내가 만나 달라 애원한 것처럼 보이겠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은 원치 않았다.
무엇보다 리엘라가 기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아멜리아를 눌러놓지는 못하더라도 밀리진 않아야 한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예상하건대 아멜리아는 충실한 개를 원하는 모양이다.
‘유리한 입장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황비의 가장 큰 배경인 프리시아 공작. 그는 충분히 대미어 공작과 비견될 권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두 공작 간의 우열일 뿐이다. 1황자는 확실히 2황자보다 앞서고 있다.
‘리엘라를 잃었어도 3황녀가 남아있다는 건가?’
엘리아 아르카옌.
리엘라의 친자매가 남아 있었다. 비록 리엘라는 잃어버렸지만 결혼으로 관계를 돈독히 할 패가 남아있는 거다.
크리스의 결혼과 엘리아의 결혼.
두 황족이 유력한 가문을 승계구도에 끌어들인다면 확실히 승률이 조금은 올라간다.
‘그건 황비만 가지고 있는 무기가 아니야.’
알테온과 1황녀도 가지고 있는 패였다. 결국 둘이 독신으로 산다는 가정 하에 올라가는 승률이다.
안 그래도 알테온의 입지가 더 높은데, 결혼까지 해버린다면 아멜리아의 입장은 더 절망적이다.
‘대체 가지고 있는 패가 뭐가 있지.’
아멜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재촉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무표정하지만 그렇기에 여유가 있어 보이는 태도였다. 자세히 살펴도 허세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건가요?”
아멜리아는 리엘라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그 행동이 리엘라를 질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 남편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고.
리엘라가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아직까지는 나를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제도 알테온을 밀어줄 생각이다. 실제로 이미 행동에 옮겼을지도 몰라. 이대로 가면 다툼이 일어나도 무난히 알테온의 승리로 끝나버릴 건 확실해. 이걸 황비가 모를 리가 없어.’
황위를 넘겨줄 생각이 아니라면 발악이라도 해야 한다. 나를 이용하지 않고도 발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처음부터 간단한 문제였다.
“황비전하께서는 수틀리면 자멸하실 생각인거군요. 대공과 손을 잡아서 말이지요.”
“그래요.”
아멜리아가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백작보다 알테온 그 아이를 오래 봐왔어요. 놈이 황제가 된다면 크리스는 숙청을 피해갈 수 없죠.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알테온은 크리스를 처형대에 올릴 인물이에요. 아니, 크리스 뿐만이 아니겠죠.”
황비는 아마 같이 숙청이 될 거고, 엘리아는 다른 나라로 팔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프리시아 공작도 같은 말로를 걸어갈 거고. 나도 숙청당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아멜리아는 그 부분을 콕 집어서 말했다.
“백작은 무사할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넓은 식당에는 아멜리아의 웃음소리만 낮게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손을 내밀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백작이에요. 이제 자신의 처지를 좀 알겠어요?”
아멜리아의 차가운 시선을 담담히 넘겼다.
대공이 알테온과 손을 잡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알테온의 편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면 황제가 그렇게 경계하지 않겠지.’
같은 말로를 겪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충견노릇을 하라는 건가. 아멜리아는 나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나도 수틀리면 막나가는 깡다구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글쎄요. 그건 해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척 시린 목소리였다. 아멜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확실히 황비전하께서 대공과 손을 잡는다면 알테온이 힘들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날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나는 대공과 손을 잡아도 상관없으니까.”
“저도 알테온과 손을 잡는 걸 꺼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아멜리아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전 제가 앞으로 제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충분히 자신합니다. 알테온은 제국의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 저를 쉽게 숙청할까요? 오히려 중요하게 쓸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정말 그렇게 하시길 바라는 겁니까?”
나는 아멜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양보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뜻을 접지 않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이내 코웃음 쳤다.
나는 그 비웃음을 보고 알테온과 붙어먹기로 반쯤 마음먹었다. 일방적으로 통보하듯 차갑게 내뱉었다.
“정말 자멸을 원하시는 거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후로 황비전하와 만날 일은 없을 거 같군요. 리엘라를 통해 저를 설득할 생각이라면 소용없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랑 해보자는 건가요.”
“네. 황비전하도 자신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누구의 생각이 맞을지는 나중에 알겠죠. 저는 황비전하와 좋은 관계를 기대하고 왔는데, 알테온에게만 좋은 일을 하게 생겼네요.”
“오만하네요. 운이 좋아서 제국의 귀족이 된 주제에.”
아멜리아가 차갑게 읊조렸다.
그녀는 식탁에 턱을 괴고 비스듬히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당이 되겠어요? 당장 내가 백작을 공격하면, 알테온이 보호를 해 줄 거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요?”
“당연히 보호해주지 않을 수도 있겠죠.”
나는 아멜리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알테온은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 수도 있고, 쓰다가 버릴 수도 있다. 황비의 충견이 되어서 훗날을 도모하는 게 당장은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주도권은 나한테 있어. 알테온과 관계에선 주도권이 없었지만 황비는 아니야. 내가 유리한데 끌려 다닐 이유가 없다.’
관계의 유리함을 이용하지 못하는 멍청이라면 줄타기 자체를 못한다. 그리고 그런 병신은 알테온과 붙어먹어봐야 황비의 말대로 버려질 뿐이다.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띤 아멜리아를 보았다.
나는 저 웃음이 허세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대공과 붙어먹으면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하세요. 제 살길은 어떻게든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뭐라고요?”
아멜리아는 찡그린 얼굴로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리엘라를 흘깃 쳐다보았다. 리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리엘라에게 미안하지만 황비를 더 자극해야겠다.
“사실 전 황비전하께서 제 가치를 알아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크리스 황자나 엘리아 황녀가 결혼을 해서 유력가문을 품에 안아도, 그게 대수입니까? 알테온은 결혼을 안 한 대요? 결국 원점 아닙니까.”
“나를 설교하는 건가요?”
“오히려 알테온과 동맹을 맺으려 줄을 설 가문이 더 많죠. 누가 봐도 그가 우세하지 않습니까.”
아멜리아의 눈길이 더 싸늘해졌다.
“그리고 저는 미래에 엘리아 황녀의 남편이 될 사람과는 입장이 많이 다릅니다. 전 가진 게 없어요. 쓰고 버리기 쉽죠. 그러니까 알테온이 저를 끌어들이려 하는 거고요. 그건 황비전하도 아는 사실 아닙니까?”
“출신이 미천하다는 걸 스스로 자랑하는 건가요?”
“그렇게 보셨다면 더 알테온과 붙어먹어야겠네요.”
“계속 얘기해보세요.”
나는 표정을 싸늘하게 바꾸었다.
말 뿐만이 아니라 진짜 행동에 옮기는 미친놈이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저는 이중첩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요. 하지만 황비전하의 태도를 보니, 크리스는 황위를 이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 됩니다.”
“뚫린 입이라고 너무 지껄이네요.”
“이제 적이니까 상관없겠죠. 대공과 손을 잡으세요. 저는 제 나름대로 알테온과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크리스를 몰아내고 알테온을 황제로 만들 테니까.”
“백작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전 잃을 게 없는 사람입니다. 별로 겁나지 않네요.”
더는 아멜리아를 쳐다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리엘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맥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아멜리아가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 식당에는 아멜리아의 웃음소리만 울렸다. 아멜리아가 눈가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더니 말했다.
“백작은 정말로 알테온의 손을 잡을 생각이네요?”
“그렇습니다.”
“내가 대공과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네. 저보단 황비전하가 잃을 게 더 많지 않겠습니까. 저야 뭐 죽을 경험도 해 봤고, 밑바닥으로 돌아간다 해도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필사적이죠? 그냥 내 손을 잡으면 되는 일인데.”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짙은 호기심이 엿보였다. 그리고 내가 한 가지 사실을 걸 깨달았다.
아멜리아도 미친 여자였다.
이 여자도 수틀리면 진짜 대공과 붙어먹을 사람이구나. 하지만 이미 한참을 과속했다. 유턴은 불가능하다.
“했던 말을 번복해서 죄송합니다. 사실 제가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도권을 제가 가지고 있는데, 그걸 뺏기면 멍청한 일 아닙니까?”
“그래요. 그건 참 병신 같은 짓이죠.”
아멜리아가 처음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조금 다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황비전하는 너무 딱딱한 것 같고, 어머니라 부르세요. 백작은 알테온이 아닌 나와 손을 잡을 생각이 아직도 있겠죠?”
“남자인 알테온보다 미인인 어머님이 더 좋습니다.”
아멜리아가 피식 웃고선 말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서로 도움이 되는 얘기를 하죠.”
“알겠습니다, 어머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멜리아도 한다면 하는 미친 여자라고 느껴졌기에 더 자극해서 파국을 맞을 필요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