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40화
“황비께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리엘라의 말을 들은 순간 올 게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가장 눈치를 보고, 기회가 왔을 때 뒤통수를 쳐야할 대상.
황비가 나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긴장을 타야 했다. 줄타기의 시발점이 될 테니까.
“아직까지는 당신을 크게 신뢰하지 않아요. 정확히는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러니까 대충, 배운 게 없는 용병이라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인 거지?”
“정확해요. 흐읏..”
가슴을 만지는 내 손길에 리엘라가 비음을 흘렸다.
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손바닥 가득히 전해진다. 꼭지가 딱딱해졌다.
리엘라는 허벅지를 비비고 있었다.
“정말... 자꾸 괴롭히기만 할 건가요? 흐윽.”
피식,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몇 달 전만 해도 성을 모르던 여자였는데, 이젠 즐길 줄 아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더 괴롭힌다면 안 그래도 피곤한데 잔뜩 쥐어 짜일 거다.
리엘라가 본격적으로 들이대기 전에 손을 멈췄다.
“만나봐야지. 그런데 황제한테 걸리지 않을까?”
“아니요. 그 정도는 괜찮아요. 아버지도 어머니의 생각쯤이야 눈치 채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어머니의 움직임이 없으면 더 수상하죠.”
리엘라가 촉촉해진 눈동자로 말했다. 애써 그녀의 요구에 눈을 돌렸다. 오늘은 진짜 피곤하다.
“크리스가 뭘 요구할지 모르겠어. 학장 자리만큼은 양보하기 어려운데. 솔직히 가능하면 너한테 맡기고 싶을 정도야.”
“제가 전면에서 나서기엔 아직 일러요.”
아쉽네.
리엘라가 야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철저히 자신을 숨겨왔는데 전면에 나서기엔 아직 이르다는 걸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맡아야 해요. 하지만 아카데미보다 복지부를 더 신경 써야 해요. 제가 보기엔 거기가 더 중요하니까.”
“민심?”
“네. 훗날 그들은 가장 큰 도움이 되어 줄 거예요.”
리엘라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을까. 알테온을 쳐내고, 크리스를 힘으로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리엘라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학장 자리를 뺏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요. 알테온은 아카데미의 행정을 간섭할 가능성이 높겠네요. 주로 교수의 내정, 입학이나 퇴학의 관련 일을요.”
“대공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 같은데?”
“그는 군대를 움직이겠죠. 아카데미의 보안을 목적으로요.”
클레이튼 대공은 총사령관으로써, 제국의 군부를 휘어잡고 있는 귀족이다. 제국의 수백만 군대를 황제와 양분할 정도로, 지휘관 귀족들의 지지율이 탄탄하다.
“우선 마도공학자를 이용해 아카데미의 이목을 끌어야 하니 알테온의 요구는 수용해야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학장의 지위를 이용하면 되요. 당신은 복지부와 연관 지어 특별 전형을 만들어 두면 견제가 가능하겠죠.”
“아, 그거 말인데. 나도 괜찮은 방법을 하나 생각해뒀어.”
“뭐예요?”
릴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너무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지 확실한 건 아닌데.
“로아나 크로이츠를 이용해 볼 생각이야. 어쩌다보니 인연이 좀 있어서, 부탁해볼 사이는 되거든.”
“로아나라... 그녀는 참 고지식한 기사였죠.”
“얘기해 본 적 있어?”
“네.”
리엘라는 그러고서 눈을 감았다. 생각을 하는 듯, 입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입을 맞췄다.
리엘라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이내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냈다.
“로아나는 제가 알기론 몰락귀족의 자제예요.”
“몰락? 그럼 다른 귀족이 개입한 거야?”
“아마도요. 제가 정보부를 통해 제국의 상황을 모두 아는 건 아니니 자세한 사정은 몰라요. 추측할 뿐이죠.”
로아나가 원하는 건 복수였나?
잠시 생각해봤으나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겪어본 바로는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했을 수도 있고.’
9성의 기사라면 웬만한 군대 이상이다. 황제도 어지간한 귀족가문보다 로아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겠지.
복수 이후의 일은 고민할 없는 것이다.
“로아나를 이용한다면 마도공학자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겠네요.”
“어디까지나 로아나가 받아들여야 하는 거잖아.”
“그렇죠. 그녀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니, 쉽지는 않겠네요. 아카데미는 잘 생각해 본다면 권력을 위한 목적으로 개편하는 게 뻔히 보이니까요.”
리엘라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로아나를 내 기사로 만들고 싶다. 리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원하던 힘을 가져보니, 세상은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했었지.’
초월자의 경지에 발을 들이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힘만으로 안 된다면 대체 뭘 원하고 있는 거지.
혹시 로아나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한국을 얘기해줬을 때 관심을 보이던 그녀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데.
“당장은 일어날 일에 고민을 해요. 조만간 어머니가 부를 때, 저도 동행할 거니 걱정하지 말고요.”
“응.”
리엘라가 같이 간다면 부담이 덜 되는 건 확실하다. 옆에서 대화를 잘 유도해줄 테니까.
“그럼 알테온은 인사권한 까지는 수용해주는 걸로 담판을 지을게.”
“네. 그렇게 해요.”
품에 안겨드는 리엘라를 꽉 안았다. 리엘라의 고운 숨소리를 들으면서 로아나의 생각을 계속 이어갔다.
*
알테온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시녀에게 1황자 궁에 가서 만나자는 의사를 전하라고 하면 되는 일이니까. 요번의 일이 있어서 허락은 금방 떨어졌다.
아쉽지만 릴리아는 떼어놓고 왔다.
1황자의 블레앙 후작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8성의 경지인 그는, 릴리아의 힘을 숨겨주는 팔찌를 꿰뚫어볼 가능성이 컸다.
아직 7성의 무인을 시녀로 가장해서 데리고 다닌다는 정보를 알려줄 필요는 없다.
‘재수 없게 마주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정당한 절차를 밟고 알테온의 궁에 들어섰다. 곧장 나를 안내해줄 시종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뒤를 따르자 알테온을 볼 수 있었다.
“할 얘기가 있으니 이만 물러가라.”
“네. 전하.”
알테온의 옆에 앉은 중년인을 보자 두통이 생기는 느낌이다. 마주치기 싫었는데, 저 남자가 블레앙 후작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나 다를까, 알테온이 친절히 그를 소개해주었다.
“이쪽은 초면이지? 나를 도와주는 블레앙 후작일세. 동생도 이름을 들어보지 않았나.”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블레앙 후작이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민 손을 굳건히 맞잡았다. 블레앙 후작은 유치하게 악력으로 기선제압을 하진 않았다.
“마르시안 블레앙이네. 인사를 나눌 기회가 생겨 영광이군.”
“아닙니다. 블레앙 후작의 위명은 예전에도 많이 들었습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죠.”
“부끄럽군. 자네는 황실의 부마가 아닌가. 너무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네.”
마르시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나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생각했다.
‘놈을 대동한 걸 보면, 나를 이제 괜찮게 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어.’
마르시안 블레앙 후작을 마주치기는 싫었지만 알테온의 평가가 올라갔다고 짐작할 근거는 생겼다.
제국의 사령관 중 한명인 블레앙 후작은,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임과 동시에 알테온을 후원하는 거목 중 한명이다.
알테온은 만족스럽게 나와 마르시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알테온의 맞은편에 앉자, 그가 서두를 꺼냈다.
“폐하께 상소문을 올렸다는 얘기를 들었네. 자네가 말했던 일을 시작할 셈이지?”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말했던 대로, 나는 동생을 지지할 생각이네. 의회에서 안건이 올라온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감사합니다.”
알테온의 미소 띤 얼굴에 고개를 숙여보였다. 블레앙 후작은 끼어들지 않고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크리스의 설득을 폐하께 부탁했다지? 참 현명한 선택이었네.”
“하하. 아닙니다.”
느낌이 왔다.
리엘라의 확신대로 황제는 알테온을 은근히 밀어주고 황제와 내가 나눈 대화를 알테온이 알아낼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뭘 요구하긴 할 거 같은데. 그게 뭐지?’
블레앙 후작을 한번 쳐다보고, 알테온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알테온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보낸 계획서를 읽어 보았네. 상당히 만족스러워. 동생도 내가 지지하는 대신 뭔가를 요구할 거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럼요. 맨입으로 형님의 지지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나?”
주도권을 내 쪽에 쥐어주겠다는 뜻인가?
나는 알테온의 얼굴을 조심히 살폈다. 여전히 여유로움이 묻은 미소가 보인다. 오래 끌면 안 된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해야 했다.
‘나를 파벌에 넣으려 생각하고 있어.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선을 먼저 얘기하라는 의미가 대체 뭐지. 블레앙 후작까지 대동하고서 말이야.’
리엘라는 인사권한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최소한의 선을 인사처에 두고, 높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해야한다.
“어려운 질문이었나? 하하. 고민이 길어지는군.”
“아닙니다..”
“괜찮네. 편하게 얘기하게.”
알테온은 재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을 빨리해야 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높이자. 대범하게 나가는 게 낫겠어.’
내 입으로 단언해버리면 무르기 어려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겠지만 감각적으로 선을 높여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저는 형님이 인사권한을 요구할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부학장 정도까지는 괜찮을 거 같습니다.”
“아하하하하!”
알테온이 크게 웃었다.
블레앙 후작도 어느새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음이 멎어들고, 알테온이 말했다.
“우리 일을 크게 키워보지 않겠나?”
“어떻게 말입니까.”
“아카데미는 사실 교육부의 산하인 걸 동생도 알지 않은가. 이왕 개편할 거, 독립기관으로 개편하는 게 어떻겠나. 학장이 아니라, 이사장이 되어볼 생각은 없는가?”
“그것 참... 매력적인 말이네요.”
“그렇지?”
“하지만 대공의 반발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우려에 알테온이 턱을 매만졌다. 알테온이 옆에 있던 블레앙 후작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래서, 마르시안을 동생에게 소개를 시킨 거네. 동생도 알다시피 대공의 가장 큰 힘은 군권이지. 대공이 아카데미에 한발 걸친다면, 내 생각엔 기사단을 주둔시켜 무력시위를 할 것 같은데. 동생도 같은 생각인가?”
“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수한 학생들을 기사단으로 편입시키는 방향도 고려할 수 있겠지. 누가 뭐래도 대공의 기사단은 제국의 최고를 다투고 있으니까.”
“아....!”
“동생의 생각이 맞네. 나는 마르시안이 그걸 견제해줄 적임자라고 생각하네.”
알테온의 말은 합리적이다. 대공이 기사단을 주둔시켜도, 그를 따르는 10성의 초월자를 아카데미에 썩힐 수는 없다.
군권을 통솔하는 대공은 카리스 숲을, 국경을 수호해야 할 의무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8성, 무리하면 9성의 기사를 주둔시킬 것이다.
‘충분히 블레앙 후작이 감당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블레앙 후작이 우수한 학생을 기사단으로 편입시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생각보다 요구하는 바가 크다.
상념을 이어가던 찰나에, 알테온의 입이 열렸다.
“이사장은 동생에게 맡길 테니, 인사권한과 함께 마르시안을 아카데미의 선임교수로 내정하는 게 어떻겠나.”
알테온은 그 어느 때보다 시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