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39화
어떤 집단이든 새로운 권력자를 반기는 곳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새롭게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그만큼 자신이 갖고 있는 파이가 작아진다.
권력은 경쟁자가 적을수록 커지는 법이다.
내가 복지부로 들어간 건 신의 한 수일 정도로 반발이 적었다. 경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아카데미는 다르다.
재능 있는 평민들이 기회를 얻어 강자로 성장하고, 은거하던 지구인들이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뭉칠 가능성이 있다.
그 모든 게 학장이 될 내가 주무른다고 가정하면, 확실하게 경쟁자로 낙인이 찍힌다.
황제의 입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경계하는 귀족인 대공에게 시선을 떼기도 힘든데, 내가 새롭게 권력의 중심으로 뻗어갈 가능성이 보인다고 하면 시선을 분산시켜야 한다.
내가 어느 순간 대공에게 홀라당 붙어먹을 수도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럼 자연히 대공을 감시하는 눈이 느슨해질 거고, 대공이 그걸 알아차리는 건 순식간이다.
“너는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느냐?”
나는 고개를 들어 루시우스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의 붉은 눈은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속내를 샅샅이 꿰뚫어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인다. 나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답을 꺼냈다.
“대공과 손을 잡을까봐 걱정을 하시는 게 아닙니까.”
“정확히 봤다.”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가 이마를 매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내게 먼저 온 것을 보면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루시우스를 또렷이 담으면서 단언했다. 그는 내 확신에도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음....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군.”
“제가 대공과 손을 잡아 황실을 약화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리엘라는 대공과 손을 잡는 건 하책이라고 했다.
황실의 대척점에 선 대공을 끌어들이면 자연히 황권이 약화가 된다. 훗날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
‘단물만 빼먹고 버리는 건 몰라도... 솔직히 대공이 그렇게 물러터진 양반으로는 전혀 안 보여.’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다.
두 황자와는 급이 다르다. 줄타기가 가능할리 없다.
황제와 대공의 사이에서는 아예 라인을 정할 필요가 있다. 어설프게 줄타기를 하려다간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 밖에 없다.
“너는 짐의 편을 들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어쨌건 제 인생은 폐하의 은혜가 가장 크지 않았습니까.”
“흠...”
루시우스는 검지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일전에 알테온과 만남을 가졌던데, 너는 그 아이를 지지하는 거냐.”
“제가 지지한다고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안건이 통과되고 네 생각대로 흘러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네게도 힘이 생길 텐데?”
말투가 묘하게 추궁하는 느낌이 든다.
황제는 알테온을 황태자로 마음에 두고 있을 거다. 리엘라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가뜩이나 둘 밖에 없는 황자인데, 여러모로 크리스는 알테온보다 부족하다.
그럼에도 선뜻 황태자를 내정하지 않는 건 황비의 존재 때문이겠지.
‘어쨌든 내가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아직은 걸리면 안 돼.’
나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아주 자연스럽게 지어냈다.
“하하. 제 힘이라니요. 폐하의 은혜 덕분 아니겠습니까. 제가 가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점점 능구렁이처럼 변해가는 것 같군.”
루시우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가 보이는 반응으로는 내 속내를 읽고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된다.
줄타기를 하려고 하는 걸 이미 짐작하고 있나?
아니면 황자 한명을 대놓고 지지할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려나.
‘리엘라가 황제가 될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건 짐작하지 못하겠지.’
이것만 끝까지 숨기면 된다.
줄타기는 언젠가 걸리게 될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때쯤이면 2황자의 아래로 몸을 숨기면 된다.
그러나 황제가 될 야망을 걸리는 건 다른 문제다. 기다리던 기회가 오기 전에 걸려버리면 정치인생이 끝장난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끝마쳤다.
“알테온 황자도 아카데미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보여주자.
내가 은연중에 알테온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짐작할 거다.
“알테온의 지지를 얻을 생각이냐.”
“맞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하는 게 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루시우스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내 지지와, 알테온의 지지라.... 이번에는 대공의 반발이 확실히 크겠어.”
“그렇습니다. 폐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당장은 네가 대공과 손을 잡을 거란 생각은 없다고 봐도 되겠어.”
나는 그저 고개를 숙여보였다.
대공과 손잡을 생각은 정말 없는데.
속마음을 꺼내서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의심을 계속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크리스는 어쩔 거지? 대공이 반대를 할 거라는 건 기정사실이겠지만 크리스의 입장이 어떤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 아이가 반대하면 일이 진행되는데 상당히 애를 먹을 텐데.”
“그 부분은 역시... 폐하께서 도움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리엘라의 예상대로 황제는 크리스를 들먹였다.
알테온을 지지하는 마음을 넌지시 내비추었을 때, 황제가 이렇게 물으면 떠보는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럼 나는 크리스와 연결된 끈이 알테온보다 얕다고 예측하게 만들면 된다.
“알겠다. 내가 따로 불러서 얘기는 해보지.”
“감사합니다, 폐하.”
루시우스의 얼굴이 무표정으로 변했다.
무표정한 가면 너머로 감춘 속내가 가장 무서운 법이지만 거기까지는 당장 파악할 도리가 없다.
확실한 건, 적어도 황제 앞에서는 알테온을 지지할 거라는 뜻을 넌지시 보이는 게 정답이었다는 거다.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끝내 상소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확실히 밀어주거나, 앞으로 철저한 감시가 생기거나 둘 중 하나겠네.’
*
황제와 독대를 마치고 리엘라의 궁으로 복귀했다.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알테온과 만날 약속도 잡아야 한다. 이번 주를 편하게 보내기는 힘들 것 같다.
“밥은 괜찮아. 오늘은 별로 생각이 없어.”
“그래도 되겠어요? 잘 챙겨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인데..”
릴리아는 기어코 몇 번 더 제안을 해왔지만 생각이 전혀 안 났다. 황제와 독대는 이번이 두 번째 인데도 짙은 피로감이 든다.
“바로 씻어야겠어. 리엘라에게 내가 기다린다고 전해줄래?”
“알겠어요.”
릴리아에게 그리 말해두고 곧장 씻으러 갔다. 몸을 씻으니 짙게 묻어있던 피로가 덜어졌다. 새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니 릴리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웬일이야?”
“그냥 걱정돼서 이거라도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별 걱정은..”
안 먹겠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결국 주방에 갔다 온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주는 샌드위치를 받았다.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먹고 말했다.
“음. 맛있네. 리엘라는?”
“황녀님도 궁에 오신지 얼마 안 되셨어요. 지금쯤이면 식사를 마치고 몸을 씻고 계시겠네요.”
조금 더 기다렸다가 같이 씻을 걸 그랬나.
이 넓은 궁은 목욕탕도 여러 개라서 가장 가까운 곳을 사용했을 뿐인데, 모처럼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쉽다.
“그나저나 요즘은 수련을 안 하네?”
“영 진척이 없어요. 저도 벽에 막힌 거겠죠.”
“7성이나 됐으면서 그런 투정을 부리면 사람들이 싫어할 걸.”
6성에서 막힌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릴리아를 원망하지 않을까. 반대로 생각해보니 릴리아도 8성의 경지에 든 무인을 원망하지 않을까 싶다.
“왜 갑자기 웃으시는 거예요.”
“아, 미안. 그냥 좀 웃긴 생각이 들어서.”
“전 진지한데....”
옆을 돌아보니 릴리아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무인은 경지의 목마름이 이토록 심한가.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괜히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제까지 독학... 하고 있었던 거지?”
“거의요. 제가 검술을 배우는 건 비밀리에 이뤄졌으니까요.”
“천재네.”
“네?”
거의 독학으로 7성까지 이뤄냈으면 8성은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닌가. 잘은 몰라도 10년 안에는 벽을 깰 느낌인데.
내가 느낀 그대로를 얘기했다.
“그냥, 여유를 가지면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을까? 지금도 충분히 강한데 조급해 할 이유가 있어?”
“네... 아무래도, 점점 지훈님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딱히 위험한 일이 있을까?”
“생각보다 귀족들의 세계는 암투가 더 심해요. 무척 잔인하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릴리아의 표정은 불안해 보였다.
왠지 고마웠다.
그녀에게 나는 얼떨결에 황녀와 결혼하게 돼서 모시게 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태도가 나를 꼭 지키겠다는 사명을 가진 기사와 다름없어졌다.
“어쩌면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어. 내가 로아나와 인연이 조금 있거든. 그녀에게 부탁해보면 되겠지.”
“아...”
이번 아카데미 안건이 잘 해결되고, 내가 생각한 대로 로아나가 움직여 준다면 릴리아의 고민이 해결될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더라도 릴리아의 검술을 잠깐 봐달라는 부탁 정도는 가능한 사이라고 믿는다.
무려 9성의 끝을 본 기사인데, 적어도 릴리아를 가로막는 벽에 균열을 새겨주지 않을까. 충분히 기대할만하다.
“그 사람은 엄청 강하겠네요.”
“아마도? 오우거를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 버리던데.”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릴리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왜 저러지.
“다행이네. 내가 오우거 만났을 때 아주 죽을 뻔 했거든. 다음에는 그런 일이 안 생기겠어.”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오우거 정도야 한 번에 죽일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궁상떨 게 아니라 수련을 하러 가야겠어요.”
“그래....”
“죄송하지만.. 황녀님께 안내는 다른 시녀에게 맡겨야겠어요.”
갑자기 의욕이 팍 상승한 거 같다.
릴리아가 뛸 듯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매번 자리를 비울 때면 깍듯이 고개를 숙여보였는데, 이를 잊어버릴 만큼 수련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저러다가 빨리 벽을 넘으면...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무리하다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시녀에게 리엘라의 위치를 물으니 방에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접어두었던 생각을 이어갔다.
알테온은 아카데미를 지지하면서 어떤 걸 원할까. 선을 정해 두어야 한다. 학장의 자리는 절대로 넘길 수 없다.
부학장 까지는 내어줘도 가능한 선일까.
리엘라의 의견이 무척 궁금하다.
내가 정해둔 선과 그녀가 정해둔 선이 일치했으면 좋겠다.
익숙한 방문을 여니, 리엘라가 얇은 슬립을 입은 채로 화장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왔네요. 아버지와 독대는 어땠나요?”
“생각한 대로였어. 크리스와 끈을 이을 생각이 있는지도 떠보던데.”
“그럼 제 생각대로 했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엘라를 품에 안았다. 코에 가득 들어오는 그녀의 살 냄새에 머리가 아찔하다.
리엘라를 안은 채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봉긋한 가슴에 머리를 묻고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오늘은 유독 아이 같네요.”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좀 지쳐서. 황제와 만나는 건 여러모로 기가 빨리는 느낌이야.”
“음.. 어머니께서도 당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던데요? 슬슬 확실히 노선을 정하라는 뜻 같네요.”
알테온도 만나야 하는데, 황비도 갑자기 나를 보고 싶다니. 이번 주는 피곤한 일의 연속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