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
김세희에게 그들을 응접실로 데려오라 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전에 본 경계심이 짙은 남자와 오늘 처음 보는 남자.
“앞에 앉아. 차라도 대접해줘.”
“네.”
릴리아가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내 몫의 차를 한 모금 머금고, 둘에게 말했다.
“긴장할 필요는 없어. 너는 전에 봤었고, 너는 누구지? 혹시 리더야?”
“네.... 제가 무궁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남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나를 살피는 눈길에 경계심이 짙은 게 티가 난다.
‘귀족을 대하는 경험이 많이 부족한 것 같네.’
그래도 경계심이 많은 건 좋은 자세다. 나는 남자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여유로움을 가장하는 건 대화를 할 때 주도권을 쉽게 가져오는 방법이다.
이윽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제국의 백작이신지... 몰랐습니다. 제 동료의 결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아. 너희를 처벌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저... 그럼 어떤 도움을 주실 수 있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우선 신분을 밝히고 본인의 소개를 각하께 하시는 게 먼저입니다.”
릴리아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압박을 가하는 기색에, 남자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이한석입니다. 나이는 서른셋이고 무궁화를 이끌기 전에는 A급 용병으로, 카리스 숲에서 마수사냥꾼으로 일한바가 있습니다.”
“아니... 이름만 알면 돼. TMI를 할 필요는 없어.”
“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늘여놓을 기세라서 말을 끊었다.
일전에 가면남의 태도로 봤을 때, 눈앞의 단체는 카엘로스와 적대적일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내 목적을 조금은 드러내도 괜찮겠지.
“뜬금없이 금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 소리를 하진 않을 거고, 혹시 카엘로스와 연관이 있어?”
남자의 눈빛이 잠깐 번뜩였다.
갑자기 그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당신들을 제압하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잠깐 사이에 힘겨루기가 이뤄졌나보다. 승자는 당연히 릴리아였다. 이한석의 표정에서 두려움이 스쳐지나간 게 보였다.
전에 대담하게 대들던 남자의 표정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 보였다. 아마 이한석이 릴리아보다 약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주도권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나는 보다 편해진 기색으로 말했다.
“대충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겠어. 카엘로스와 내가 한편이라 생각했던 거겠지.”
“....”
“사실대로 얘기해 그냥.”
“맞습니다.”
이한석은 체념하듯 내뱉었다. 그러면서도 눈빛에는 모종의 기대가 엿보였다. 나는 그의 기대를 채워줄 말을 꺼냈다.
“한편이 아니라 적이지. 나는 알카드를 좋게 보지 않아.”
“적이라면...?”
“알카드를 무너뜨리긴 솔직히 쉽지 않아. 그래도 충분한 타격을 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하기에 따라서 달려있겠지. 너는 왜 그렇게 알카드를 싫어하지?”
잠깐의 침묵 후 이한성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 마나를 각성하게 해준다는 소문이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지원했습니다. 단 한명도 돌아오지 않았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지원을 멈추자 갑자기 실종되는 사람도 간간히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제국민이 아닌 지구인들이요.”
“너는 그게 알카드라 의심을 하고 있는 거고?”
“네. 영지의 주인은 카엘로스 백작입니다. 상식적으로 그가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그래서 단체를 만들고 실종되는 사람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이젠 지구인 노예들이 영지에 간간히 끌려오는 게 보이더군요.”
이한석의 얼굴에 분노가 새겨졌다. 그는 조금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백작의 뒤를 캐봤습니다. 그의 휘하 기사들이 노예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걸 확인도 했고요. 하지만 백작각하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힘이 없습니다. 그저 노예들이 더 끌려가지 못하게 훼방을 놓는 정도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카드는 네 존재를 알고 있어?”
“짐작은 하고 있을 겁니다. 그냥 두는 거겠죠. 어차피 그의 입장에서 저희는 벌레보다 못할 테니까요.”
“그니까, 알카드가 신경 쓸 정도의 방해는 전혀 하지 못했다는 거네.”
“네...”
이한석은 침울한 표정이었다.
‘알카드가 무궁화의 존재를 짐작은 하고 있단 말이지...’
가장 걸렸던 건 알카드의 의심이었다. 의심을 사면 한쪽이 굴복할 때까지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
아카데미가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다면 이길 수는 있다. 알테온 파벌의 입장으로 봤을 때, 나와 알카드는 그의 수혜를 받아야 한다.
둘 중 쓸모없는 사람은 버려지고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은 키워진다.
‘아카데미를 발의하고 성과를 보일 때까지만 의심을 돌려놓으면 되는 일이야.’
가면남도 있고, 애초에 의심을 받고 있는 무궁화가 있다. 방향을 돌려놓는 일은 수월해 보였다. 빠르게 몰아치자.
결단을 내리고 말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야. 죄 없는 불법노예들이지. 그들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정확하게 파악은 했어?”
“아니요. 결계가 쳐져있어서 거기까지 손을 대진 못했습니다.”
“결계를 부술 수 있는 힘은 되고?”
“네. 가능은 합니다. 단체에 저보다 강한 6성의 강자가 있습니다.”
오. 그건 놀라운 일인데.
어쩌면 무궁화와 한 번 관계를 맺을 게 아니라 쭉 이어나가도 될 정도다. 머릿속에서 무궁화의 평가가 상향됐다.
“여기까지 오면서 알카드의 감시를 받진 않았어?”
내 말에 이한석이 잠깐 여유를 두고 말했다.
“없습니다. 아직 그의 감시를 살 정도로 일을 벌이진 않았습니다.”
“확실해? 알카드가 6성의 기사도 보유하지 못할 정도로 권위 없는 귀족은 아닐 텐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알카드의 의심을 살만큼 일을 벌이진 않았습니다.”
“그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이한석이 굳은 목소리로 단언했다.
“각하께 위해가 가는 행동을 한다면 당신만큼은 꼭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릴리아의 스산한 목소리에 이한석이 흠칫거렸다. 나는 손을 들어 릴리아가 이한석을 압박하려는 것을 말렸다.
“네가 찾았다는 곳, 거긴 알카드가 운영하는 지하투기장이야. 일종의 실험장소라고 보면 될 거야. 거기에 사람을 한명 심어뒀어. 너희는 걔가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쉽도록 도우면 돼.”
“방법이 있습니까..?”
“알카드는 내게 불법노예를 공급해 달라고 부탁했지. 너희가 불법노예를 가장해서 침투해야겠어. 우선 알카드가 너희를 경계하게 만들어. 그 후에 너희가 나를 이용하는 그림으로 침투를 할 방법을 짜자고.”
이한석의 경계심이 다시 짙어졌다.
바보가 아니라면 내가 손을 떼버렸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이 되니까.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무궁화가 나를 이용하는 그림으로 출발해야 알카드의 의심을 잠깐이나마 돌리지 않는가. 이한석에게 버려지지 않을 거란 믿음을 줘야 한다.
“릴리아. 사람을 시켜서 폐하께 올릴 상소문을 가져오라고 해.”
“네.”
잠시 후, 내 손에 들린 상소문을 이한석에게 건넸다.
“그걸 읽어봐.”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묵묵히 상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상소문에 정신이 팔려 있는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황제폐하께 올린 안건이야.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세상을 바꿀 생각을 가지고 있어. 솔직히 너도 꽤 재능 있는 사람인 거 같은데, 여전히 살기 팍팍하잖아?”
이한석은 말이 없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이한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말했다.
“그 내용대로 된다면 분명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야. 너는 여기서 살면서 뭔가를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
“그건... 말도 안 되는 허상이 아닙니까..?”
“이룰 수 있는 힘만 있다면 허상이라고 할 수 없지. 내가 너랑 보여?”
“아....”
이한석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보다시피 나는 제국의 백작이지. 게다가 정통성 있는 2황녀의 남편이기도 하고. 시간은 걸릴지라도 충분히 뭔가를 바꿀 힘이 있다고 자신하는데.”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한석의 눈에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결계를 살짝 건드려. 그러면 알카드가 너희들을 경계하기 시작하겠지. 내부에 잠입 시켜둔 애한테도 버틸 희망을 줘야 하기도 하고.”
“그 다음은요?”
“너희들을 불법노예로 위장시켜서 내부에 침입시킬 거야. 그때쯤 안건을 발의해 의회가 소집될 테니, 알카드는 영지에서 자리를 비울 거고. 일은 그때 시작해. 일이 끝난 후 알카드의 의심을 당분간 너희한테 돌리게 정황을 조작하는 걸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아카데미가 알테온의 마음에 든다면, 그땐 내게 너희를 보호할 힘이 생길 거야.”
이 정도면 알카드는 무궁화를 파헤쳐보다가 뒤늦게 나를 의심할 거다. 그리고 그때는 알테온의 신임을 받은 상황이 올 테니, 그는 한발 늦을 테고.
‘괜찮아. 아카데미는 충분히 효율이 좋은 일이니까.’
*
상소문을 올리고 3일이 지났다.
나는 황제를 다시금 독대하기 위해 입궁했다. 황궁이 내가 머무는 집이라서 입궁이란 표현이 조금 이상한데, 엄연히 황제가 기거하는 곳이랑 리엘라가 있는 곳은 다르다.
드넓은 황궁에서도 확연히 분리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혈색이 보기 좋아 다행입니다.”
황실의 시종장이 다가와 말했다. 그의 태도에는 용병이었다고 무시하는 기색은 없었다. 처음부터 정중한 태도로 대하던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별 일이 있을 리가. 나는 잘 지내고 있네.”
“가시죠.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은 말이 유독 없는 인물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황제는 과연 내 안건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독대를 허락한 걸 보면 아주 관심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어쩌면 사위라고 한 번 밀어줄 의향이 지금일수도 있고.
소원을 빌러 갔었던 웅장한 대전이 아닌 집무실로 안내를 받았다. 시종장이 황제의 허락을 구하자, 이내 문이 열렸다.
이젠 익숙해진 귀족의 예를 선보이며 황제의 앞에 오른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이젠 제법 귀족의 티가 나.”
“과찬이십니다.”
“그래. 내 딸과는 잘 지내고 있나?”
루시우스는 짙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 아이는 기어코 너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더니, 제법 만족하는 모양이군. 저쪽에 앉아라. 얘기가 제법 길어질 것 같으니.”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리니, 루시우스가 상소문을 보면서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이윽고, 루시우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뭘 하고 싶은 거지. 이건 아무리 봐도 노골적으로 네 권력을 높이고 싶어 하는 게 보이는데.”
예상한 반응이었다.
리엘라와 상의한 내용을 기반으로 황제를 설득해야 할 시간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나는 차가운 눈빛을 담담히 견디면서 말을 시작했다.
“권력을 높이려는 건 사실입니다. 다만, 꼭 저의 이득만 가져오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이지. 제국의 군사력에 도움이 된 다는, 흔한 소리를 할 셈인가.”
“아닙니다. 대공을 견제할 수 있습니다.”
루시우스의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