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37화
아침 일찍 복지부로 복귀했다.
며칠간 자리를 비워서 걱정을 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김세희는 일을 잘 해주었다.
“생각보다 고아원의 수가 꽤 되던데요? 예산이 부족할 뻔 했어요.”
“내가 말한 곳은 포함 시켰지?”
“당연하죠.”
그녀가 정리한 서류를 훑어보았다.
‘2000골드. 꽤 많이 후원해줬네.’
일개 고아원이 받기에는 큰 금액이다. 김세희가 신경을 제대로 써준 셈. 이 정도면 로아나를 볼 면목이 생기겠지.
“내가 얘기한 건?”
“알아보고 있어요.”
김세희에게 아카데미의 교사를 할 인재를 수소문하라 시킨 바도 있었다. 기존의 교사들은 평민을 가르치려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 입장에서는 다루기 쉬운 쪽이 훨씬 이득이다.
그녀의 반응을 보니 일의 진척이 더딘가보다.
내가 내세운 기준이 깐깐했으니 이해는 해야 했다. 권력 욕심이 크지 않고, 무언가 바꿔보고 싶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
엄격히 심사해서 뽑아야 물을 흐리지 않고 열심히 권력을 가져다줄 테니까.
‘마도공학 말고도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끌어당길만한 메리트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뭔가가 아쉽단 말이야.’
일의 진척이 더뎌지니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뻗어갔다.
1%가 아쉬운 느낌이다.
원래 내 계획은 힘을 키울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 그리고 자연스럽게 키운 힘을 날 위해 사용하게 유도하는 거였다.
마도공학은 굉장한 학문이지만 본질적인 힘과는 거리가 멀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 싶은 사람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이래서야 휘하의 마도공학자만 늘리게 생겼다.
목적을 빠르게 이루려면 더 근사한 방법이 필요하다.
좀 더 본질적으로 힘을 키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용해야 한다.
아카데미에서 생긴 기회를, 초월적인 강자가 지도해준다면 엄청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
‘초월자라... 이왕 가르쳐 줄 거, 엄청난 강자가 가르쳐 준다면 경지에 목말라 있는 자들도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어.’
사실 6성 수준 이상의 강자들이 아카데미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굳이 그런 자들이 기웃거린다고 가정하면, 힘보다는 인맥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목적이 변질된다.
내가 세울 아카데미의 목적이 권력투쟁의 장으로 더 고일 수도 있다. 그럼 개편하는 이유가 없으니 의미가 없다.
그걸 막아줄 초월적인 강자임과 동시에, 다른 강자들도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인물.
‘로아나!’
그래!
로아나 크로이츠가 있었다.
10성을 두드리고 있는 초월적인 힘. 그녀가 아카데미의 일원이 된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요새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초월자의 영역을 엿보는 힘은 권력이 가진 힘을 뭉개버린다.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과, 수많은 사람을 한순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힘.
후자가 당연히 더 우월한 힘이다.
이세계는 누가 뭐래도, 본인의 무력이 가장 빛나는 힘이니까.
거기에 더해 로아나를 내 기사로 만들고 아카데미의 학장으로 세운다면, 어지간한 귀족은 넘보지 못할 금자탑이 될 거다.
‘이거야. 이거라면 모자란 1%를 채워줄 거다!’
처음 로아나를 봤을 때 가졌던 욕망이 슬그머니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 자리를 권유해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사단장 직위야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으니까.
“교수를 알아보는 거 말인데, 잠깐 멈춰도 될 것 같아.”
“네? 그래두... 거기에 들인 인력도 있는데, 정말 이대로 빼요?”
“응.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으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성과가 생길 것 같았는데... 어쩔 수 없죠. 까라면 까야지 뭐.”
김세희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것보다 고아원에 돈을 지원하는데 집중해. 단순히 돈만 지원해주지 말고, 애들이 좀.. 성장할 기회를 마련해줘.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지?”
“네. 그거야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아니야. 부족해. 더, 더 많은 지원을 해줘. 애들이 훨씬 밝게 성장할 수 있도록.”
“왜 그렇게 고아원에 집착하세요?”
김세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나름 유능한 부하직원이니 두루뭉술하게라도 의문을 해결해 줄 필요가 있다.
“큰 뜻이 있어. 잘 해결 된다면, 적어도 검술에 있어선 교수를 모집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거야.”
“대체 그게 고아원이랑 무슨 상관이신지....”
김세희는 여전히 뚱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녀의 불만이 더 뻗어가지 못하게 억제했다.
“아줌마. 릴리아 불러줘? 며칠 잔소리를 안 들어서 살맛나지?”
“아줌마라뇨!”
“아줌마 소리 듣기 싫으면 얼른 가서 일이나 해.”
“네~ 힘없는 게 죄죠. 죄.”
“참나. 거지꼴 면하게 해줬더니 아주 기어오르려고 하네.”
내 핀잔에, 김세희는 얄밉게 혀를 날름거리고 빠르게 방을 나갔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일만 잘하면 됐지.’
카엘로스 백작의 영지에서 연락이 오길 기다리면서 로아나를 떠올렸다.
*
제국에는 5개의 기사단이 있다.
황실의 근위기사단인 제1기사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4개의 기사단은 제국을 위해 움직인다.
제국의 주인은 황제이니 언뜻 그의 말만 듣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1기사단을 제외하면 황제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기사단은 아니다.
황제의 뜻이 제국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로아나는 그중 2기사단의 단장이었으니, 그녀를 찾으려면 2기사단의 최근 행적을 알아보면 될 일이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제2기사단의 행보는 비밀스럽지 않다. 오히려 다른 기사단보다 노출이 많은 곳이다.
‘조만간 만나긴 글렀어.’
군부에서 로아나의 행보를 알게 되자 입에서 쓴 맛이 맴돌았다. 로아나는 제2기사단을 이끌고 국경에 출발한지 한 달째 되었다.
대륙의 중앙은 극심한 혼돈으로 물들어 있다. 최근 그곳에서 혼돈에 잠식된 몬스터들이 국경을 넘보려 하기에, 그녀가 기사단을 이끌고 지원을 간 셈이다.
‘내가 거기까지 갈 방법이 없네. 명분도 없고.’
내가 초인도 아니고 가봐야 짐만 될 뿐이다. 아쉽지만 로아나의 복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흔쾌히 수락할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 설득할 시간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은 아카데미의 물밑작업을 슬슬 시작해야겠다.
첫 단추를 꿰는 일은 황제와 독대를 하는 거다.
다방면으로 생각을 해보았는데, 역시 황제의 지지를 받는 게 우선이다. 아직까지는 황제의 권력이 강력하다.
알테온의 지지를 이용하는 것도 무척 중요하지만, 황제에게 나를 어필할 필요성 역시 중요하다.
황제는 나를 아무런 쓸모없는 용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유능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아직 건재한 그의 힘을 골수까지 빨아먹지 않겠는가.
“이만하면 됐겠어.”
나는 완성된 상소문을 릴리아에게 보여주었다. 각 부서의 장은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릴 권한이 있다.
이틀간 여러 번 고치고 다듬은 글이다. 심사는 리엘라와 릴리아가 해주었다. 릴리아가 꼼꼼하게 살피더니 말했다.
“훌륭해요. 이정도면 바로 올려도 문제가 없겠어요. 전하고자 하는 내용도 명확하고요.”
“다행이네. 네가 봤을 때도 황제도 흥미가 생기겠지?”
“네.”
릴리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됐고. 아직도 복지부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어?”
“네...”
“음...”
탄식이 흘러나왔다.
관심을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깜깜무소식이다. 카엘로스의 영지에 갔다 온지 무려 20일이 지났다.
내가 떠난 날 곧장 출발했으면 도착하고도 벌써 남았을 시간이다.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길 리는.... 없어.’
여기가 무협지 속 강호도 아니고, 영지를 벗어나 이동한다고 도적떼를 만나는 재수 없는 일이 일어날리 없다.
그렇다고 알카드의 습격 가능성도 없다.
내가 뭘 했다고 의심을 한단 말인가.
“분명 올 때가 됐는데, 이상하다. 그지?”
“네. 꼬리를 밟힌 일은 절대 없었어요.”
릴리아는 단언했다.
설마 알카드가 그녀보다 강한 기사를 보유하진 않았을 테니 충분히 믿어도 되겠지.
“황제와 독대를 하기 전에 알카드를 뒤흔들 작업을 미리 해놔야 하는데.”
아쉬운 목소리가 방에 울렸다.
릴리아도 이에 전염되어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릴리아는 요즘 들어, 나랑 둘이 있을 땐 감정이 풍부해진 느낌이다.
전에는 다정한 면모보다는 사무적인 경향이 더 강했는데.
릴리아의 시무룩한 얼굴을 보니 측은한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덤덤한 기색을 자아내고 말했다.
“됐어. 이현성을 버리는 패로 쓰자. 용병을 불법노예로 위장시켜서 알카드에게 공급해야겠어.”
알카드의 분노는 이현성이 뒤집어 쓸 수 있게 최대한 위장해서. 어차피 한 번의 공급 후, 지하투기장을 뒤집을 생각이니까.
가면남이 얼마나 버텨줄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나로서도 빠른 결단을 내려야하고.
“카엘로스 백작이 의심할 수 없도록 일을 진행시켜 볼게요.”
“완전히 의심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고, 최대한 늦추기만 해도 될 거야.”
아카데미가 급부상 하게 된다면 알테온이 방패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현성은 이 일이 끝나면 처리하실 건가요?”
“처리라면.. 죽이는 거지?”
“네.”
릴리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에게 이현성은 불법노예거래를 지원한 쓰레기.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다.
“괜찮아요. 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할 테니, 지훈님의 손에 피가 묻으실 일은 없을 거예요.”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던 건지, 릴리아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 걱정을 한 건 아니었는데.
가끔 과한 보호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지금처럼.
“그래. 죽여야지. 억울하겠지만 걔도 그런 식으로 많이 해먹었던 거 같으니까.”
지하투기장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이현성이 알고 있기엔 너무 큰일이다. 혹여나 다른 마음을 품고 알카드에게 붙어먹을 수도 있으니까.
일이 끝나면 없애야 되는 게 맞는 일이다. 무궁화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지. 그들은 알카드를 적대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릴리아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이현성이 날고기는 간부라고 해봐야, 릴리아와 몇 번 공방을 나누지도 못하고 목이 떨어질 거다.
급이 다르니까.
‘정말이지... 리엘라는 언제 얘를 비밀리에 이렇게까지 키운 거지.’
나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릴리아를 통해 어떻게든 자유를 쟁취하지 않았을까. 릴리아가 지금보다도 더 무럭무럭 성장을 했으면 말이다.
“백작님. 바쁘세요?”
김세희가 불쑥 들어왔다.
복지부에서 이정도로 격식 없게 대하는 사람은 그녀뿐이니까. 그 때매 시립해있던 릴리아의 얼굴이 한차례 찌푸려졌다.
“각하는 용무로 바쁘십니다. 애초에 노크를 하는 예의를 배우지 않았던 겁니까?”
릴리아는 굉장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그녀가 익숙해져서, 말투가 변하면 기분변화가 얼추 예상이 될 정도다.
“에이. 뭐 어때요. 잠깐 깜빡할 수도 있죠.”
김세희는 넉살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격식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으니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김세희의 기분이 평소보다 더 들떠 보이는 게 궁금했다.
“왜 이렇게 하이텐션이야?”
“은주가 왔어요.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더라고요.”
“은주? 아~ 그런 이름이었지. 혹시 다른 사람은 안 왔어?”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웬 남자 두 명이 백작님을 뵙고 싶다던데요?”
드디어 온 건가.
무궁화의 리더나, 못해도 간부정도 되는 사람이 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