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36화 (36/44)



〈 36화 〉36화

끼어든 남자가 8성 이상의 무인이 아니라면 나를 해칠 방법은 없다.

릴리아도 곁에 있고, 밖에선 기사들도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대로 두었다간 멀쩡한 사람 초상하나 치를 상황이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정하지.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여물어 시발 놈아. 남의 뒤나 캐내는 새끼가 말은 존나 많네.”
“자꾸 소란을 피우면 너한테만 좋지 않을 건데.”

내 말에 그가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잡아가, 시발. 네가 기사를 데리고 다녔던 거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는 릴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선을 느끼긴 했는데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예민하게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가.
강자라서 기척에 민감하다 해도 모든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막말로 상대방은 어쩌다 눈이 마주친 건데, 왜 쳐다봤냐고 멱살을 잡으면 미친놈이 아닌가.

“오. 옆에 여자가 한가락 하나봐?”
“자꾸 자극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팔이라도 부러지면 당신만 손해니까요.”

술집 내부의 시선이 슬슬 이쪽으로 몰리고 있다. 하은주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빠져나가려 하는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기사들이 내부로 들이닥치지 않았다는 거였다. 나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편지야 릴리아를 시켜 다시 회수하면 된다. 서로 언성이  높아져서 밖의 기사들이 들어오는 것보다 이편이 낫다.

남자가 편지를 꼼꼼히 읽어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의심이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하자는 짓거리지?”
“내용에 쓰인 그대로야.”

나는 릴리아의 불만을 잠재우며 말했다.

거창한 내용은 아니고, 어떤 단체든 리더가 있는 노릇이다. 무궁화를 이끌고 있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내 지위를 밝히고, 도울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다는 첨언과 함께.

남자의 경계심이 풀어지지 않는 건 이해한다.

편지에는  목적이 상세히 적혀있지 않았으니까. 무궁화라는 단체가 카엘로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데 전부 밝힐 수는 없는 일이다.

가면남과 남자의 태도는 카엘로스를 적대하는 근거가 되지만 확신하기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다.

“만나서  하려고. 혹시 밖의 기사들에게 팔아넘길 생각이냐?”
“내가 왜.”
“기사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딴 걸 건네주면,  같으면 잘도 좋다고 하겠어. 내가 시발, 사탕주면 좋다고 쫓아가는 애새끼로 보여?”
“그 애새끼가 오늘 팔이 부러지고 싶은가 보네요.”


가만히 지켜보던 릴리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남자가 협박에 아랑곳 않고 코웃음을 쳤다. 둘의 신경전을 지켜보니 한숨이 나왔다.


너무 경계심이 짙다.
남자는 무궁화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지 않았다면 굳이 끼어들었던 이유가 없다.
지위는 몰라도 단체의 소속인  확실하겠지.

‘운 좋게도 빨리 찾을 방법은 생겼는데... 이 새끼가 영 협조를  해주네. 밖에 기사들 때매 터놓고 얘기하기도 힘들고.’


고민이 된다.
끈을 만들어두고 후에 찾아오라고 해야 하나.
그러면 시간이 너무 길어질 경우에 알카드와 마찰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아예 안 찾아오면 기껏 생각해둔 방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계획을 짜야 하고.

고개를 저었다.
한발 물러서야겠다.
당장 목적을 밝히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후에 찾아오라는 일은, 알카드가 알게 되어도 변명할 거리가 있다.

불법노예거래 부분에서 단체를 이용하려던 생각이었다고 말하면 되니까.
하지만 사실을 밝히면, 만에 하나 무궁화가 백작과 한통속일 때, 내가 뒤통수 칠 생각을 했다는 걸 변명할 수가 없다.

의심은 되지만 확신은 어렵다. 그렇다고 지금 깊게 파보기에는 걸려있는 제약이 많다. 감시하는 기사들도 있고, 눈앞의 남자가 비협조적으로 나올수록 일이 귀찮아진다.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것도 중요한 거야.  생각해 보고, 아르카나에서 복지부를 찾아와.”

나는 릴리아를 시켜서 여유분의 종이를 건네받았다. 거기에 서명을 휘갈기고 인장을 찍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남자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백작? 생각보다 존나 대단한 양반이네?”
“당신이 이제 얼마나 큰 무례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요? 각하의 자비로움에 고개를 조아리세요.”

릴리아가 찌푸린 눈으로 말했다.
나는 눈치만 보고 있던 하은주를 바라보고 말했다.

“김세희도 여기서 일하고 있어. 당신도 생각이 있으면 찾아와. 여비는 600골드면 충분하겠지.”


마지막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눈동자에 확실히 동요가 보이는 게, 내가 고위귀족이란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표정이다.

하긴, 기껏해야 남작이나 준 귀족 정도로 여기고 있었겠지.


“잘 생각해 보라고. 넌 나한테 시종일관 띠꺼운 태도였지, 심지어 욕도 하고. 다른 고위귀족이라면 가만히 놔뒀겠어? 네가 싫어하는 귀족양반들이라면 말이야.”


우두커니 서있는 그를 놔두고 술집을 나왔다.
기사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내부에서 소란스러움은 느꼈으나 위험해 보이진 않아 굳이 나서진 않았습니다. 소득은 있으셨습니까?”
“아니, 없었다.”
“그렇군요.”
“이만 돌아가야겠군. 나머지는 알카드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생각한 만큼 소득이 없었다.
남자가 생각을 바꿔먹어서 나를 찾아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당장은 허무한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이러다가 진짜 불법노예에 어떻게든 손을  지도 모르겠는데.’

아니야.

이것만큼은 절대로 손을 대서는  된다.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하더라도, 배신을 해버리면 나가리다.

아직 남아있는 도덕성도 이건 아니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고. 불법노예를 공급해 알카드를 도우면 나만 좆 된다.

결국 알카드가 나한테  일을 떠밀었을 때, 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대체 알테온은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겠어. 그 새끼도 아마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


시발 놈이.
동생, 동생 거리더니 사지로 몰아넣어?
나랑 알카드를 서로 경쟁시키겠다는 거야 뭐야.


가면남을 데리고 알카드의 성으로 돌아왔다. 잠깐 기사들의 경계가 느슨해져 빠르게 말을 꺼냈다.


“무궁화와 교섭은 미뤄졌어. 생각보다 협조적이지 않던데. 네가 뭔가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숨기지 말고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널 믿을 수 없었다.”


가면남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태도를 보니 무궁화라는 단체는 카엘로스와 적대적인 게 맞을 거란 확신이 슬그머니 짙어졌다.


‘실수했네. 사실대로 얘기했으면 일이 더 빨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감옥에서는 시간이 촉박해서 정확히 묻지를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아쉽게 되었지만 괜찮다. 조심하는 태도에 발목을 잡힌 거니까. 그건 나쁘지 않은 습관이다.

다음번에는 과감해져야 할 때, 오늘 일을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번복하지 않으면 된다.

“아무튼, 네가 좀 더 버텨줘야겠어. 할 수 있겠지?”
“걱정하지 마라. 백작에게 칼을 꽂을  있다면 뭐든 감내할 테니까.”
“그래. 조만간 연락할 테니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라고.”


알카드가 보고를 받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가면남을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런. 아쉽게도 수확이 별로 없었나 보군.”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더군. 어쩔 수 없지.”

알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아쉬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차피 도망쳐봐야 손바닥 안이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이놈은 가서 처형시키도록 해.”


기사가 가면남을 끌고 가려 했다. 나는 여유로운 태도를 가장하며 끼어들었다.

“그건 너무 자비로운 처사가 아닌가, 명색이 도망자인데 말이지.”
“음? 원래 도망자는 처형하고 목을 걸어서 공포를 조장해야 하는 법이네. 그래야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지.”
“아니. 내 생각은 달라. 결국 도망자는 꾸준히 생기는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나?”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그땐 다시 똑같이 처벌하면 되는 일이네.”

알카드가 턱을 쓸며 말했다.
이내 그는 기사에게 끌고 가라는 재촉의 눈짓을 보냈다.

“오히려 고문이 낫지 않겠나.”
“그것도 해본 일인데.... 별 차이는 없더군.”

이대로 가면남이 끌려가서 처형되면 막심한 손해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꾀를 냈다.

“고문의 방식이 잘못된 모양이지. 내가 희망을 줘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알카드의 표정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윽고, 알카드가 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하하하! 무슨 말인지 알겠어. 희망이 커질수록 절망도 커진다는 말이지? 하긴, 한 번 탈출을 해본 놈이니 더 효과가 크겠어.”
“그런 거지. 다른 노예들도 네 지독한 방식에 공포를 더 크게 느낄 거고.”
“흠, 지독한 건 자네 같은데 말이야. 좋아. 시도할 가치가 충분히 있어 보이네.”

알카드가 기사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후.. 버텨라. 최대한 빨리 내부에서 일이 터질 수 있게 거들어  테니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가면남을 동정했다.

어떤 지독한 고문을 받을지는 몰라도 그가 버텨주길 기도하면서. 그도 장담하지 않았나, 알카드에게 칼을 꽂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



돌아오는 길 역시 게이트를 이용해서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궁으로 곧장 복귀해서 리엘라를 찾았다. 벌려놓은 일에 대해 상담하고 타개책을 강구해야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즉흥적이지만 괜찮은 발상이었어요. 알테온이 당신을 이용할 생각이 있다고 짐작할 수 있겠어요.”
“고민이야. 카엘로스를 밀어내고 더 신임을 받을지, 여기서 뒤통수를 세게 치고 대립각을 세울지. 어차피 충돌은 해야 할 수밖에 없어. 불법노예를 떠맡을 수는 없으니까.”

전자의 경우라면 가면남을 이용해 알카드가 하는 일을 가로채는 거다. 알테온의 신뢰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연구를 이어가야하니 불법노예 부분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점이고.

후자는 뭐, 말 그대로 뒤통수를 이번에 후리고 척을 지는 거다. 이 경우에는 황비의 신임을 엄청나게 받게 되겠지.

리엘라가 머리카락을 빗으면서 말했다.


“좀 더 신임을 받는  좋겠어요. 어머니는 어떻게든 제가 설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알테온은 아니에요. 제가 설득할  있는 사람이 아니죠.”
“그럼 불법노예가 걸리는데...”
“그건 알카드에게 떠밀어야죠. 그가 당신에게 밀려날 때, 불법노예에 대한 부분을 책임지게끔 만들어야죠.”
“왜 굳이 나였을까?”


나는 줄곧 궁금했던 부분을 리엘라에게 물었다. 그녀는 상념을 이어가더니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제가 알테온이라면 훗날 공개할 때 당신을 제물로 삼았을 거예요. 그럼 자연스럽게 지구인들도 휘하로 규합할  있겠죠. 부작용이 있다면서요? 그걸 해결하는 순간, 당신은 인체실험을 한 잔혹한 귀족이  테고, 알테온은 그걸 해결해주는 자비로운 군주가 되겠죠.”
“..... 역시 알카드를 쳐야겠네. 내가 제물이 될 수는 없으니까.”
“그렇죠. 어렵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제법 준비를 잘 해 놓은 것 같으니.”

리엘라는 눈을 빛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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