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화
동쪽으로 가는 도중에도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장 최선의 결과....’
받으면 안 돼.
카엘로스 백작의 일에 훼방을 놓았단 사실이 밝혀지면 알테온과 관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부에서 일이 터지도록 만들어야지.’
이편이 가장 자연스럽다.
가면남이 잘 해준다면 노예공급에 손을 대기 전에 지하투기장 내부에서 일이 터질지도 모른다.
무궁화라는 단체를 이용하려는 건 이걸 더 매끄럽게 해줄 윤활유 역할을 해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심은 받을 수도 있겠지만 카엘로스의 무능함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어쩌면 카엘로스가 받던 신임을 나한테 돌릴 수도 있는 노릇.
‘알테온과 깊게 연관되는 게 잘하는 일인가?’
어렵네.
신임이 커질수록 어떤 방식으로든 목줄이 더 강해질 텐데.
이 부분은 리엘라와 상의가 필요하다. 그녀라면 더 나은 결과를 유추해낼 수 있겠지.
영지의 동쪽에 도착했다.
‘이놈들도 떼어놓긴 해야 하는데...’
나는 뒤쪽의 기사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델의 보고누락 사건이 있었다. 알카드가 예민하다면 이번 일의 보고는 누락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김세희가 알려준 곳으로 가봐야겠다.
나는 기사를 한명 불렀다.
“자네도 이곳 토박이지?”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이 많이 모인 곳이 어딘지 알고 있나?”
“네. 안내하겠습니다.”
기사가 성큼성큼 발을 움직였다.
제국의 백성들 입장에서 지구인은 이방인이다.
무시 정도는 아니어도 허물없이 섞이기는 힘든 입장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떠올리면 쉽다.
얇은 벽이 하나 쳐져있는 느낌.
그래서 으레 지구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하나씩은 꼭 있었다.
“제가 알기론 이곳에 가장 많이 모여 있습니다.”
“고생했네. 그런데 자네들이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겠군.”
나는 기사들의 판금갑옷을 지적하며 말했다. 리더 격 기사가 턱을 잠시 매만졌다. 내 말을 이해한 기색이다.
“위장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괜히 불안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길.”
기사들이 자리를 비웠다.
나는 릴리아에게 말했다.
“대화하는데 엿듣지 못하게 할 방법이 있을까?”
“아까 저자의 수준은 6성을 바라보고 있어요. 마력을 펼치면 분명 눈치 챌 거예요.”
“음.... 혹시, 네 경지가 까발려지진 않았지?”
“네. 적어도 저와 동급의 강자가 아니라면 알 수가 없어요.”
의도적으로 대화를 차단하는 방법은 못한다 이거지.
괜히 시도했다가 보고를 하면 손해만 잔뜩 본다. 알카드가 나에 대한 경계심을 더 올리겠지.
나는 기사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돌아오려면 아직 여유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펜과 종이를 빨리 구해다줘.”
“아!”
릴리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이내 주변을 걱정스런 눈으로 둘러보았다.
“금방 돌아오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릴리아의 걱정에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일반적인 도시의 나는 기감을 펼쳐 위험분자를 속아내는 기행을 할 수 없지만 별일이 있을까 싶었다.
“괜찮아. 저기 벤치에라도 앉아있을게. 그렇게 걱정되면 빨리 갔다 오면 되잖아.”
“알겠어요.”
7성 수준의 무인이 걱정은 참으로 많다.
릴리아가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나는 봐두었던 벤치로 터벅터벅 걸어가 앉았다.
대화를 차단할 수 없으면 쪽지로라도 뜻을 전달하면 된다. 그것까지 기사가 감시할 수 있으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궁화라는 단체도 가면남처럼 카엘로스 백작에게 원한을 품고 있으면 좋을 텐데. 묘한 기대를 품고서 시나리오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노예거래에 손을 대기 전에 내부에서 일이 터진다.
그럼 알카드는 이걸 수습하려 하겠지. 그 사이에 알테온의 지지를 얻어 아카데미를 밀어붙인다.
이후에는 아카데미 일로 바쁠 테니 자연히 알카드와 약속을 어길 핑계가 생긴다. 이 과정에서 알카드가 타격을 예상보다 많이 입어서, 알테온의 신임이 멀어지면 더 좋다.
이러면 불법노예거래에 손을 대지 않아도 된다.
구두로라도 일을 돕기로 했으니, 나는 반쯤 알테온의 파벌에 발을 걸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당장은 급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자꾸 노예를 공급하지 않으면 알카드도 불만이 생길 거다.
그렇다고 일을 바꾸자고 한 제안은 거절당했다.
‘결국 먼저 통수를 쳐야 하네. 정황증거를 최대한 없애야겠어. 아예 의심을 안 받기는 힘들어도 적당히 빠져나갈 수 있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릴리아가 기사보다 빠르게 왔다.
그녀의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졌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길까봐 부리나케 다녀온 모양이다.
“다녀왔어요.”
릴리아가 펜과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기사들이 자리를 비운지 어림짐작 10여분이 지났다.
“기사들 기척을 감지할 수 있어?”
7성의 무인이라면 가능할 법한 방법이라 릴리아의 자문을 구했다. 그녀가 눈을 잠시 감았다.
“아직 주변에는 없어요. 아마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네요.”
“다행이네.”
펜을 들고 종이에 빠르게 내용을 적어갔다.
다행히 기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원하는 내용을 다 적을 수 있었다. 곱게 접어서 품에 넣어두고 시간을 때우자 기사들이 돌아왔다.
행색이 더 가벼워져서 자연스럽게 인파에 녹아들 복장으로.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가시죠.”
“조금 거리를 두고 따라오게. 자네들은 기사니까 거리를 조금 두어도 유사시 일을 대비할 수 있겠지.”
“걱정할 일은 없으실 겁니다.”
기사가 호언장담을 했다.
나는 김세희가 말해준 장소를 슬슬 찾기 시작했다.
마나를 각성하게 해준다는 소문은 근방에서 꽤 유명했다고 했으니까, 그녀와 친했던 자들을 찾아서 물어보면 일이 수월할 터였다.
그러면 무궁화라는 웃긴 이름의 단체도 찾기 쉽겠지.
‘아, 생각해보니 무궁화가 마나 각성을 빌미로 사람을 데려가는 앞잡이 노릇을 하는 단체면 일이 좀 곤란해지는데.’
이 경우에는... 명쾌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땐 노예 공급을 가장해서 직접 일을 벌여야 하는 위험이 생길지도. 가면남만 믿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걷다보니 술집이 가득한 거리가 나왔다.
방향이 정확히 가늠되지 않아 기사에게 길을 조금씩 물으면서 길을 찾았다.
‘저긴가.’
간판은 알려준 이름 대로였다.
문을 여닫고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기에, 잠시 멈춰서 관찰했다. 맞는 거 같다. 죄다 한국인만 서성거리고 있다.
나는 위장한 기사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저 술집이네. 자네들은 따라서 들어올 텐가?”
리더 격 기사는 술집과 주변을 살피듯 둘러보았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눈이 살짝 찌푸려져 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밖에서 기다려도 될 것 같습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자네들만 믿고 있겠네.”
“맡겨만 주십시오.”
나는 기사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렸다.
릴리아를 동행한 채로 봐두었던 술집에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젊은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해왔다. 특이하게도 명찰이 달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빠르게 명찰을 훑었다.
‘하은주.’
기억에 있는 이름.
김세희가 얘기해준 인물이 맞는 것 같다. 하은주라는 이름의 여자가 이맘때쯤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을 거라 말해줬으니.
“자리는 아무 대나 앉으셔도 되요.”
“네.”
가장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은주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주문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혹시 김세희란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은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녀가 테이블에 메뉴판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반쯤 걸터앉았다.
“세희요? 알긴 아는데... 무슨 관계세요?”
경계심이 가득한 기색이다.
나는 둘의 관계가 친분이 있다는 걸 떠올리고 말했다.
“그냥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사이네요.”
“더 수상한데요?”
“자세히 말하긴 좀 어려워서. 아무튼 나쁜 관계는 아니에요.”
“음...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볼 일이?”
“우선 메뉴부터 시킬게요. 그냥 묻고만 가기에는 염치가 없으니까.”
가장 비싼 메뉴를 5개 골랐다.
하은주가 주문을 하고 돌아오자, 그녀에게 맞은편에 앉아 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거절을 하진 않았다.
서두는 내가 먼저 떼었다.
“마나를 각성하게 해준다는 소문, 요즘도 많이 퍼지고 있죠?”
“네?”
하은주가 제대로 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옆에 있던 릴리아를 슬쩍 쳐다보았다.
“거짓이네요.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네요.”
경지에 이른 무인의 오감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내 눈은 속여도 릴리아의 눈을 속이긴 힘들었다.
나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뭐 취조를 한다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 거예요.”
“전 진짜 몰라요.”
“아니, 누가 잡아갑니까?”
그냥 궁금한 걸 물어볼 뿐인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 하은주는 말하기 싫어하는 티가 보였다.
‘난감하네.’
나와 아무 관계없는 일반인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위협을 가하면 다른 귀족들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이럴 땐 돈이 최고다. 서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
“릴리아, 지금 가진 돈이 얼마야?”
“당장 갖고 있는 금액은 1,200골드네요.”
“히익....”
하은주가 깜짝 놀랐다.
이건 투기장에서 딴 돈에 비하면 푼돈인데. 나는 릴리아에게 절반을 나누라고 시켰다.
600골드를 하은주에게 전부 건넸다.
“받아요. 600골드면 앞으로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아도 되겠죠.”
“하, 하지만 너무 큰데요...?”
“질문에 대답만 잘 해주면 되요.”
“네...”
이젠 입이 좀 열리겠지.
하은주가 방금 전 질문의 대답을 말했다.
“맞아요. 마나를 각성하게 해준다는 소문은 1년 전부터 돌았어요. 처음엔 지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젠 금기시 되고 있어요.”
“돌아온 사람이 없어서요?”
“네.. 저도 지원하려 생각해 봤었는데 정말 다행이었죠.”
“소문을 누가 퍼뜨린지 알고 있어요?”
“아뇨.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런 소문이 나돌아서.”
하은주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나는 여기에 온 목적을 질문했다.
“그럼, 혹시 무궁화라는 단체가 있다고 하던데. 거기에 대해선 알고 있어요?”
“무궁화요?”
그 순간이었다.
웬 남자 한명이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릴리아가 그의 걸음을 제지했다.
“누구죠? 더 가까이 다가오지 마세요.”
“어이, 귀족양반.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그가 릴리아를 한번 쏘아보고 말했다.
여기서 소란을 부리면 기껏 떼어놓은 기사들이 들이닥친다.
나는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제발 뜻이었다.
그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지?”
“하.... 야, 네 입으로 귀족양반이라며. 귀족한테 그런 행동을 하면 뒤진다는 거 안 배웠어?”
“나는 귀족이 아주 좆같아서 못 참겠는데. 특히 너처럼 한국인 등쳐먹으려 하는 귀족은 더 좆같아.”
시선을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따라 가보니, 그가 주먹 쥔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해를 사도 단단히 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