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화
백작의 성에서 지내길 이틀째, 방에서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알카드가 부탁한 일은 목줄이다.
어디까지나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런 미사여구로 은근히 부추기고 있지만 뒤로는 약점을 잡을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럼 큰일이야.’
알카드의 목적은 정확히 모른다.
권력의 시선으로 보면, 파벌의 중심으로 나아가려 하겠지 라고 짐작할 뿐이다. 알테온의 밑에서 일들을 맡아가고 있는 걸 보면 유력하다.
그 과정에서 약점이 될 부분들을 언젠가 잘라낼 싹에게 맡긴다. 이번에는 바일런 상단이 예시였다.
‘권력은 챙기고 약점이 될 부분들은 남에게 떠맡긴다는 건가.’
지극히 귀족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대로 불법노예 공급에 손을 거든다면, 알카드는 어떤 방식으로든 약점을 잡아 올 거다.
휘둘리지 않으려면 역으로 약점을 잡아야한다.
‘동쪽에 갈 방법을 찾아야겠어.’
거기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불법노예 건은 며칠 후에 생각하더라도 동쪽은 기회가 있을 때 처리해둬야 한다.
명분이 필요하다.
특히 이런 때라면 더더욱, 알카드의 의심을 받지 않고 동쪽에 갈 명분이.
그러고 보면, 알카드는 가면남이 투기장에서 결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까. 그로서도 비밀을 요하는 일이니 아델은 사정을 모르려나.
“몰래... 가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
“네. 은근히 감시하는 눈초리가 많아졌어요.”
“깐깐해. 그때 아델의 감시망을 잠깐 벗어난 걸 경계하는 건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간간히 시간마다 방문을 두드리는 시종도 문제였다. 다과, 차, 안마 등. 별 시답잖은 이유를 대가면서 얼굴을 비추었다.
내가 방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속셈이겠지.
“방법이 있어야 해. 동쪽으로 갈 방법이.”
“그곳에 가면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예요?”
“응. 운이 좋으면 약점을 잡을 방법이 생길지도.”
자연스러운 방법이 없을까.
무턱대고 영지를 둘러보고 싶다고 하기에는 이미 그런 전적이 있지 않나.
‘아! 그러면 되겠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면남에게는 가혹한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이 방법을 실행하기 전에 릴리아에게 의견을 구했다.
“혹시, 밖에 기사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겠어?”
“잠시만요.”
릴리아가 눈을 감았다.
흔히 강자들이 하는, 기감을 넓게 퍼뜨려 기척을 감지하는 듯했다. 그녀는 한참을 집중하더니 눈을 뜨고 말했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어요. 제 감지가 닿는 범위 내에 기사들의 숫자가 변동되진 않았네요.”
“그래? 알겠어.”
“무슨 생각이에요?”
“백작에게 가면남 얘기를 꺼내봐야겠어.”
릴리아는 이해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나는 시종을 불러 알카드를 만나고 싶으니 의사를 전하라했다.
“각하께서 모셔오라 하십니다.”
“바로 가지.”
알카드는 집무실에 있었다.
그는 책상에 있는 많은 서류들을 구석으로 치운 후 말했다.
“무슨 일인가? 돌아갈 마음이 생긴 건가. 모쪼록 내 성이 그대에게 좋은 휴식을 선사했기를 바라네.”
“돌아가려는 건 아니고, 지하투기장을 보니 생각난 게 있어서.”
“그런가?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
알카드가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고,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알카드의 맞은편에 앉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저번에 투기장에 갔다 왔다고 하지 않았나. 비슷한 걸 본 기억이 있어서.”
“음?”
“왜 지하투기장에 있던 노예들 있지 않은가.”
알카드가 침음을 흘렸다.
그가 얼굴을 한차례 찌푸린 후 말했다.
“도망자가 그곳에 있었나.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군.... 헌데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아차린 건가?”
알카드의 말투에 의심스러움이 느껴졌다.
내가 본 가면남이 지하투기장의 노예와 비슷한 성질의 마나를 가졌다는 걸 의심하는 듯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델을 팔았다.
“내 호기심에 아델이 그자와 결투를 했었지. 돌이켜보면 지하투기장에서 봤던 자들과 비슷했어. 아델도 느낌이 이상하다 했었고.”
아델이 그렇게까지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본인도 느낀 게 있을 테니 알카드가 물으면 알아서 잘 답하겠지.
알카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흠.. 내겐 그런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는데.”
“어쨌든 도망자라면 다시 잡아와야 하지 않겠나?”
“그리해야지, 당장 명령을 내리겠네.”
“내가 갔다 오겠네.”
“자네가?”
알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재빨리 그럴듯한 변명을 내뱉었다.
“그래. 놈을 심문하면 또 다른 도망자를 잡아낼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하하. 의욕은 좋지만 굳이 자네가 그런 일까지 떠맡을 필요는 없네.”
알카드는 넉살좋게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알카드에게 좋은 일만 해주게 된 셈이다. 마음은 조급해졌지만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다.
“보니까 지하투기장의 노예들은 전부 지구인으로 이뤄져 있을 텐데, 내가 나서는 게 낫지 않겠는가? 굳이 야만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쉽게 심문이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게?”
“희망을 조금 쥐어주면 되는 일이지.”
“아하하하하!”
알카드가 크게 웃었다.
“자네가 그런 잔인한 취미를 가지고 있을 줄 전혀 몰랐군. 이것 참, 상단의 일도 어떻게 진행될지 아주 흥미로워.”
“그건 좀 오래 걸릴 듯싶어. 나로서도 불법노예에 무턱대고 손을 대기엔 꺼려지니까 말이야.”
“그래. 조심하는 태도는 아주 좋지. 기대하겠네.”
알카드가 그렇게 말하고 기사를 내어줬다.
‘다행이다. 덕분에 가면남을 만나고 여유가 되면 동쪽에 갈 명분이 생겼어.’
옆에는 릴리아를, 뒤로는 10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투기장으로 향했다. 투기장의 직원은 나를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며칠 전, 나를 비실하다 얕보던 직원이었다.
“어.... 무슨 일이십니까?”
“저번에 경기하던 가면남 있지 않은가. 그 자를 보고 싶은데, 방법은 당연히 있겠지?”
“예! 당연히 방법이 있습니다. 헌데...”
“잔말 말고 자네는 할 일을 하면 되네.”
아는 척을 하려는 느낌이 들어서, 일부러 말을 끊었다. 직원이 기사를 슬쩍 쳐다보고서 급하게 조아렸다.
그는 쓸데없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기억에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이곳입니다.”
“자네는 이만 가보게.”
“예!”
직원이 다급한 걸음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가면남이 비스듬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뒤에 도열한 기사들에게 한차례 시선을 주고 나서 삐딱해진 음색으로 말했다.
“무슨 개짓거리지?”
“각하, 곧장 연행하겠습니다.”
기사가 차갑게 말했다.
곧바로 끌고 간다면 동쪽으로 갈 명분이 부족하다. 여기서 심문을 진행하고 동쪽으로 갈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기사에게 말했다.
“이 자의 힘을 좀 빼놓게. 어차피 알카드가 결정권을 내게 위임했으니 내 뜻대로 하게.”
“알겠습니다.”
기사가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기사가 다가왔다.
“이제 심문을 하셔도 될 것입니다. 각하께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약도 먹여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생했네.”
가면남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몸 곳곳에 타박상이 보이는 게 어지간히 매질을 당한 듯싶었다.
그가 간헐적인 발작과 함께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자리를 비켜주게.”
“혹시 모르니 기사를 한명 대동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 비록 자네들만큼은 아니어도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일세. 저런 꼴을 한 자에게 당할 거란 생각이 들진 않는군.”
“그럼,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래도 간간히 기사를 보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감시는 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나는 릴리아만 곁에 둔 채 가면남에게 다가갔다. 가면남이란 이름에 안 맞게, 가면은 벗겨져 있었다.
처음 본 맨얼굴은 흉터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그가 한국인이란 사실은 단번에 파악했다.
‘한국인이 맞네. 확실해. 얼굴을 보면 못 알아볼 리가 없지.’
기사가 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나는 신음을 토해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조용하게 말했다.
“야. 시간이 없다. 너 카엘로스 백작이랑 연관이 있지?”
“개소리를... 연관이 있는 건 너겠지. 그 새끼의 앞잡이냐? 시발 놈. 같은 한국인을 등쳐먹는 더러운 새끼.”
“뭔가 오해를 하고 있네. 나는 앞잡이가 아니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제국의 백작이다.”
“뭐? 네가 이모르트 백작이란 소리냐. 그 사람은 한국인이 아닐 텐데.”
“그딴 걸 설명할 시간은 없어. 너, 지하투기장에서 탈출한 게 맞지? 그러면 카엘로스 백작에게 원한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그가 흠칫했다.
이내 가면남이 머리를 굴리는 게 보였다. 딱 보면 느낌이 온다. 나와 알카드가 무슨 관계인지 유추하는데 노력을 쏟고 있겠지.
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네가 복수를 할 가능성은 없어. 제국백작이 어떤 지위인지 너도 잘 알잖아? 하지만 나는 달라. 카엘로스와 동등한 귀족이야. 나 역시 제국의 백작이니까. 명분만 있으면 카엘로스를 공격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거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가면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할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네가 카엘로스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나와 거래를 하는 게 좋을 거야.”
“복수...?”
가면남의 눈에 열망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었다. 곧 가면남은 생기가 빠져나간 눈으로 말했다.
“개소리를.... 카엘로스는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 있는 귀족이다.”
“나도 네 생각보다 훨씬 힘 있는 귀족이니까 그건 네가 걱정할게 아니야.”
황비를 이용해 2황자를 움직이는 힘이지만 그것만 해도 어디냐. 내 뜻대로 다룰 수 있는 힘은 아니어도 알테온이 연관돼 있다면 다르다.
황비는 충분히 힘을 빌려준다. 물론, 나를 점점 크리스의 파벌로 교묘히 엮어가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가면남이 반신반의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카엘로스를 완전히 몰락시킬 수도 있나?”
몰락이라.
거기까지는 모르겠다.
알테온이라는 변수가 있다. 만약 그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는 있다.
“카엘로스는 영지귀족이야. 몰락까진 힘들지도 모르지. 그래도 네가 만족할만한 타격을 입힐 수는 있을걸. 한동안 중앙정계에 발을 들이밀기 힘들 정도는 될 거야.”
“너의 뭘 믿고?”
가면남이 차갑게 말했다.
그의 심정은 당연했기에 믿음을 줘야했다. 나는 구미가 당길만한 제안을 말했다.
“나는 크리스를 움직일 힘이 있다. 자세한 방법은 네가 알 필요는 없고, 크리스 아르카옌이 누군지는 알겠지? 제국의 2황자 이름을 모르진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1황자와 2황자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카엘로스는 1황자에게 붙어먹고 있지. 이정도면 대충 알아들었으면 좋겠어.”
“네가 복수를 도와줄 거란 보장이 없어.”
가면남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너는 힘이 없잖아. 어차피 기사들이 온 이상 다시 지하투기장으로 끌려가겠지.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지 않겠어?”
정확히는 내가 데려온 거지만 진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가면남이 내 눈을 뚜렷이
이윽고, 그가 거친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살아남아. 그리고 정보를 모아. 거기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주입해. 가능하면 너와 뜻이 같은 자들을 모으면 더 좋고. 네가 당장 죽지 않도록 카엘로스 백작을 설득할 테니까.”
“거기선 인체실험이 이뤄진다. 주기적으로 약을 주입받는데 기억이 오락가락해. 나도 약 덕분에 마나를 각성했지, 보다시피 부작용이 심하지만. 확실한건 경지의 상승을 강제로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거다. 마나 각성은 덤에 지나지 않아.”
그건 굉장히 발전적인 연구인데.
얼마나 적용될지 몰라도, 5성의 기사를 6성으로 만들 정도만 되도 엄청나지 않은가. 기사의 양산화가 이뤄질 정도다.
연구 결과를 날름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기사가 다가오고 있어요.”
릴리아가 기척을 느꼈는지 알려주었다. 나는 가면남에게 암구호를 지어내 알려주었다.
“동쪽에 무궁화? 걔들을 이용해서 너와 연락할 생각이야.”
“설마, 그들을 인체실험에 밀어 넣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방법은 생각해 볼게. 정 안되면 카엘로스를 밀어내고 연구의 방향을 트는 쪽도 고려하고 있어.”
기사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각하. 별일 없으십니까?”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다. 동쪽으로 가봐야겠군.”
“알겠습니다.”
“기사 두어 명이 남아 이자를 지키고 있는 게 좋겠군. 정보가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기사가 목례로 긍정을 표했다.
내가 동쪽으로 갔다 오는 사이에 연행되면 곧바로 죽을 수도 있으니, 일단 여기에 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