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33화
마나 역류.
일시적으로 마력의 흐름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준다. 최후의 순간에 동귀어진을 감수하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행위나 다름없다.
‘릴리아가 분명...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다고 했었지.’
마치 누가 마나 역류를 의도적으로 조장하는 것처럼. 이 비인륜적인 행위는, 조용히 옆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알테온의 연관이 커 보였다.
덥석 받아들이기엔 위험하다.
알테온이 정말 호의로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판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꿍꿍이가 있다고 의심을 해봐야 한다.
나는 시간을 끌 적절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 일은... 저보단 이모르트 백작이 더 적임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모르트 백작은 지구인 사이에서도 꽤 유명인입니다.”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알테온이 턱을 한차례 매만졌다.
“그는 대공과 모종의 관계가 있어 보이네. 달리 말하자면 내게 힘이 되어줄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그렇군요..”
“나는 동생이 적임자라고 자신하네.”
알테온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내가 정말로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얼굴이다.
그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동생은 내게 힘이 되어주지 않을 셈인가? 서운하군, 나는 동생에게 힘이 되어주려 폐하께 간청까지 했었는데 말이야.”
“저는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하하. 흥미가 생겼나?”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데 말이라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사람, 형님이라고 하라니까. 어쨌든 단체를 새롭게 만들 생각이네.”
알테온이 역류하는 투기장의 무인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직은 양지로 나오기는 힘들겠지만 나름의 성과는 있네. 더 발전한다면 충분히 양지로 나올 수 있겠지. 자네는 내가 만들 단체를 음지에서 알카드와 함께 키워나가면 되네. 자세한 건 알카드가 알려줄 걸세.”
“맡겨만 주십시오! 전하.”
알카드가 힘 있게 대답했다.
“혹시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해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나는 알카드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했다. 알테온이 대답하기도 전에 알카드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거야 자네와 내가 고심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마도공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 알아두게.”
알카드의 넉살에도 불구하고 알테온을 계속 바라보니까, 그가 짧게 내뱉었다.
‘하겠다고 하면 무를 수가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뒤늦게 동쪽으로 미리 갔다 올걸, 후회가 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알테온과 내가 지향하는 바가 같다는 점이다. 지구인을 하나로 모으고 싶어 한다는 것.
‘그러면 주도권을 내 쪽으로 가져와야해.’
나는 침을 한번 삼킨 뒤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저를 중요히 생각해주신다는 게 무척 고맙습니다.”
“오. 하겠다는 말인가?”
알테온이 반색했다.
나는 가능한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형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까지는 마련하지 못했지만 괜찮은 방법을 하나 가지곤 있습니다.”
“그런가? 몹시 궁금하군.”
“아직 입 밖에 내기엔 좀 부끄러운 얘기라....”
“괜찮네. 편하게 얘기해보게.”
“제국의 아카데미를 이용하는 겁니다.”
내 말이 떨어지고, 알테온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잠시 생긴 여유를 이용해 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일이 이렇게 된 거, 알테온이 아카데미를 개편하는데 도움을 주게 만들어야겠어. 손을 잡는 척 하면서 알카드와 한발 걸쳐 놓으면 알테온도 도움을 주겠지.’
귀족자제로 이뤄진 아카데미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려면 어지간한 반발을 이겨내야 한다. 크리스는 리엘라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나머지가 문제다.
알테온이 이를 도운다면 훨씬 일사천리로 개편이 이뤄질 거다.
다만, 알테온이 아카데미에 한발을 걸치는 게 문제다. 아카데미를 만듦으로써 틀어쥘 권력을 나눠야한다.
‘괜찮아. 학장만 내 이름으로 달아놓으면 돼.’
그럼 힘들지언정 어떻게든 서서히 영향력을 틀어쥘 수 있다. 어쩌면 다른 귀족들의 파이를 알테온이 자처해 막아낼 수도 있다.
내 입장에선 알테온 하나만 신경 쓰게 되는 거다.
‘즉흥적이지만 좋은 생각이야. 목줄만 조심하면 돼.’
치명적인 약점만 잡히지 않으면 된다.
다행히 그런 약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알테온이 묘한 눈길로 나를 돌아봤다. 재빨리 첨언을 했다.
“형님이 도와주시면 일의 진행이 더 빠를 수도 있습니다.”
“동생의 생각인가?”
알테온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날카로운 눈빛이 드문드문 비췄다. 나는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제 생각입니다!”
“그렇군. 구체적인 생각은 내가 해봐도 되겠나?”
“형님, 아무래도 제 생각이니 마무리도 제가 짓고 싶습니다. 한번 믿어주시죠.”
알테온이 알카드를 내 옆으로 떠밀며 말했다.
“좋네, 구체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내게 말하게나. 그리고 바쁘겠지만 알카드의 일도 도와주었으면 좋겠군.”
“시간이 허락하는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다.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면서 어물쩍하게 발을 들이밀 생각밖에 없었다.
*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릴리아가 내 몸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말했다. 나는 짙은 피로감을 내뱉으며 그녀에게 외투를 건넸다.
“1황자와 만나고 왔어.”
“중간에 기척이 끊겨서 무척 당황했어요.”
“그래?”
“네. 중간에 뚝 끊긴 듯, 사라져버려서 결계를 부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죠.”
“안 그래서 참 다행이야.”
릴리아가 모종의 결계를 부숴버렸다면 적잖이 당황했을 거다.
“네 감지를 숨길 정도면 보통 결계는 아니겠네.”
“네. 제가 들어가려 했다면 결계를 부숴야 했을 거예요. 저는 결계의 조건을 모르니까요.”
“나는 전혀 못 느꼈는데....”
“어쩔 수 없죠. 지훈님은 마나에 민감하지 않잖아요.”
그런 이유도 통틀어서 알테온이 나를 데려온 것인가. 릴리아가 없었다면 결계가 있는지도 몰랐을 테고, 다시 찾아가려 해봐야 애를 먹었을 테니까.
그와 별개로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릴리아는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란 확신이 맞았으니까.
“지하투기장이 있었어. 거기서 알테온이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더라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처럼 보였어. 나보고 자기가 세울 단체를 카엘로스 백작과 함께 다듬어가지 않겠냐고 제안하더라고.”
“지하투기장이라면..?”
“어제 그 가면남 있잖아. 그놈이랑 비슷한 놈들이 거기서 결투를 하고 있더라. 마치, 뭔가를 테스트 하는 것 같았어.”
“설마, 하겠다고 답하셨나요?”
릴리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일단은 잘 빠져나왔어. 어쩔 수 없이 한발은 걸쳐야겠지만.”
나는 김세희가 말해준 장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어제 가볼 걸 그랬나봐. 시간이 나면 돌아가기 전에 들려야겠어.”
“어쩌면 카엘로스 백작의 감시가 심해질 수도 있겠네요.”
“그럴지도.”
알테온이 서로 상부상조하라고 했다만 알카드 입장에서는 나를 믿기 어렵겠지. 당연한 거다. 당장 나도 그를 전혀 믿지 않으니까.
티가 안 나면서도 동쪽을 감시할 방법이 필요한데. 좋은 생각이 빠르게 떠오르진 않았다.
“알카드와 몇 가지 협의할게 있어서 하루정도는 더 머무를 거 같아.”
“제가 다녀와 볼까요?”
“네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을까.”
너무 마음이 앞서나가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법이다.
“아무튼, 나도 수족처럼 움직여줄 단체가 필요하긴 한 것 같아. 영 불편한 게 아니야.”
아카데미가 개편되고 나면 이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은 될 거다.
“이현성을 이용해서 구성하는 건 어때요?”
“아니야. 걔는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배신할 생각이 가득한 놈이야. 그럴 기회가 없을 뿐이지.”
나는 이현성을 전혀 좋게 보지 않는다.
그는 적당히 이용하다가 구워삶든가 해야 한다. 이현성에게 좋은 기회만 생긴다면 배신은 필연적일 것이다.
‘기왕이면 좋게 써먹을 구석이 있으면 좋을 텐데...’
버릴 패라도 마지막까지 도움이 되면 좋지 않겠나.
다음날.
알카드 카엘로스와 협의를 위해 점심을 함께 들었다. 중년의 나이인 알카드는 인자한 얼굴로 나를 대했다.
그 역시 어제 얘기한 아카데미 건에 호기심이 짙은 기색이었다.
“내 아들놈도 제국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지. 언젠가 이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터인데, 고민이 많네. 백작처럼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자네도 아카데미 타령인가?”
“어디까지나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있네. 그게 어떤 방식이 될지는 자네가 알고 있겠지.”
알카드가 잔을 부딪혀왔다.
나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알카드의 말을 기다렸다.
“바일런 상단이 사라져서 일에 차질이 조금 생겼네. 그래서 새로운 상단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 부분을 자네가 해줬으면 좋겠군.”
“나보고 상단을 후원하란 말인가? 복지부의 자금을 가지고.”
“부담된다면 내가 지원을 하겠네. 그 정도의 돈은 있으니 말일세.”
“내가 상단을 후원한다면, 자네는 그동안 뭘 하고 있을 거지?”
“마도공학자에게 지원을 더 해야겠지. 자네는 휘하의 마도공학자가 없지 않은가.”
알카드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한발 걸칠 거라면 저쪽이 더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핵심은 알카드가 하는 일이 될 테니까. 은근히 뭔가를 알아낼 가능성도 있었고.
나는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차라리 그 일을 내가 도우는 게 낫지 않겠나?”
“아쉽게도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그건 안 되겠군.”
“그럼, 상단은 내가 생각을 해보지. 꼭 상단일 필요는 없겠지?”
“이왕이면 상단이 낫네. 불법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상단이면 더 좋겠고.”
“불법적인 일이라면?”
“노예 말일세.”
알카드가 무심하게 말했다.
제국의 노예는 처우가 상당히 좋지 않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죄를 지어 노예가 된 자들이고, 강제로 노예가 된 자들은 철저한 조사아래 해방을 시켜준다.
합법노예 거래는 얼마든지 가능해서, 일처리가 깔끔하다. 그냥 사버리면 되니까. 지구처럼 나쁜 인식으로 보지도 않고.
그럼에도 불법적인 노예를 찾는 거라면...
‘기록! 그래, 기록이 남지 않아.’
노예거래는 공식 문서를 작성한다.
불법노예를 이용한다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노예를 어디에 사용했는지 내용을 알리도 없고.
‘그래서 바일런 상단이 연관이 있었나. 지구인이 대표인 상단. 호의적인 가면 너머엔 같은 지구인들을 무자비하게 갖다 바쳤겠지. 지하투기장으로.’
이건 좋지 않다.
불법노예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나는 좆 되는 거다. 카엘로스 백작도 그걸 알기에 어물쩍 바일런과 거래했던 것이고.
그와 상단 사이에 관련되었다는 증거도 없었지 않은가.
“우린 한식구가 될 사이 아닌가. 설마 자네에게 그런 가혹한 일을 시키겠나? 어디까지나 연관이 없게만 하면 되는 걸세.”
알카드가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알카드의 얼굴을 쳐다보며 빠르게 생각했다.
‘이 새끼 말은 이렇게 해도 나한테 떠미는 거 보면 세게 맞을 각이 나오는데. 오히려 내가 뒤통수를 먼저 때려야 할지도 모르겠어.’
물론 절대 쉽지 않을 거다.
역으로 내가 발목이 잡힐 수도 있는 노릇이고.
“급한 건 아니겠지? 아카데미의 방안도 마련해야 해서 당장은 시간이 바쁘겠는데.”
“지금은 괜찮네. 바일런 상단이 일을 꽤 잘해준 편이라 말이지.”
“그럼, 생각해 보도록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불법노예, 그것도 지구인을 대상으로 하는 건 무척 꺼려진다. 차라리 알카드가 떠맡으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