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32화 (32/44)



〈 32화 〉32화

리엘라는 내게 늘 표정이 다 드러난다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틈틈이 그녀와 훈련을 했었다. 덕분에 알카드의 말에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나를 뜯어보는 서늘한 안광을 덤덤히 맞받아치며 생각했다. 아델은 숙소에서 곯아떨어졌었다. 윗줄의 강자인 릴리아가 장담했으니 아델은 아니다.

‘미행.....도 아니야. 그랬다면 릴리아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어.’

무려 7성이다.
몰랐다면 당황했을  있겠으나, 릴리아를 믿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알카드, 자네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 하는 건가?”
“하하. 그럴 리가. 그냥 물어본 걸세. 그리 날카롭게 반응하면 내가 다 서운하군.”

서늘했던 안광은 어느새 사라졌다.
의심을 지운 건가? 어쨌든 방심은 하지 말자.
저놈은 빌라스와 다르게 진짜 귀족이니까.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군. 아직까진  어색해서.”
“신경 쓰지 말게. 앞으로 차차 친해지면 될 노릇 아닌가!”

알카드는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까 악수를 했을 때처럼 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카드와 함께 걸으면서 릴리아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남들 몰래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마 미행은 없었다는 말이겠지?’

조금 편해진 기색으로 말했다.

“황자전하는 어디 계시는가?”
“이 사람 급하기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네.”
“그렇군.”
“아, 자네 어제 투기장을 갔다 왔었지? 어떤가. 내 영지의 자랑을 본 소감은.”
“재밌더군.”
“오. 그게 끝인가? 섭섭하군. 나름 고심해서 만든 걸작이었는데!”

알카드가 웃었다.
말 하나 하나가 나를 파악하려는 느낌이 든다. 돌이켜보면 멍청했던 빌라스와는 많이 다르다.
무시하지도 않고, 너무 가깝게 대하지도 않는다.

‘이런 놈들이 뒤에서 칼 제대로 꽂던데.’

나는 속으로 경계심을 올리고 말했다.

“생각 외로 강한 자가 있어서 제대로 즐기지 못했네. 아무래도  수준이 투기장의 경기를 구경하기엔 너무 낮은 모양이야.”
“그런  치곤 내 기사를 너무 힘들게 한 것 같던데. 하하.”
“그건 미안하군. 그보다 황자전하께서 나를 초대한 이유를 알고 있나?”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알카드는 일부러 인지 모르겠지만, 돌린 화제에 대해 말했다.

“아 그거. 알테온 전하께서 자네에게 일을 맡겨볼까 고민하시는  같더군.”
“일?”
“그건 전하께 듣는 게 좋겠군. 내가 말해버리면 전하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알카드는 내가 머물 곳을 안내해주었다.

“전하께선 좀 있다 오실 거네. 시종을 시켜 알리도록 하지.”
“고맙군.”

알카드가 떠나고서 릴리아에게 재차 확인을 구했다.

“어제.. 확실히 미행은 없었지?”
“네. 확실해요.”

릴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7성 수준의 릴리아를 속이기는 힘들겠지. 그럼 알카드가 떠본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가면남은 카엘로스 백작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어 보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게 어떤 접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후가 되자 카엘로스의 시종이 방문을 두드렸다. 알테온이 도착한 셈이었다. 시종을 따라 저택에 마련된  홀에 도착했다.

꽤 많은 수의 귀족이 보인다.

‘저들이 전부 알테온을 따르는 자들인가.’

내가 입장하자 즐거워 보이던 분위기가 잠시 다운됐다. 불만어린 소리도 들렸다.

“쯧. 저놈이 여긴 웬일이지. 격이 떨어지는군.”
“그러게 말이오. 용병이나 하던 잡놈이, 쯧.”

남자의 말에 동조하듯 다른 귀족들도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본다. 알카드가 그들에게 말했다.

“하하. 그래도 같은 귀족이 되었는데 너무 배척하진 말게나.”
“하지만.. 좀 기분이 좋진 않군요.”
“참게. 그대는 알테온 전하를 욕보일 생각인가?”
“끄응...”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들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 우뚝 서있었다.
귀족들을 둘러보며 일전의 결혼식 후 피로연에서 본 얼굴이 있는지 살폈다.

‘대미어 공작은... 여전히 없네. 이런 자리까지 참석하는 인물은 아닌가.’

어쩌면 이 자리는 알테온에게 엄청 중요한 귀족들로 구성된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됐다.
알카드가 내 쪽을 보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테온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오. 다들 반갑네. 늘 바쁜 시간을 내 주느라 고생들 하는군.”

알테온이 중앙으로 걸어오며 살갑게 귀족들을 맞이했다. 그가 두리번거리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 동생! 왔는가. 하하.”

알테온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얼굴에 떠오른 반가운 표정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황자가 다가오는데 실례를 더 범할 수는 없다.

“하하.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님이라 하라니까. 내 도움도 받아놓고 이리 딱딱하게 대할 건가?”

알테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움이라니.
대체 어떤 일을 말하는 거지. 전혀 그런 기억은 없지만 장단을 맞춰야 하는 건 확실했다.

“아... 감사합니다.”
“왜, 일전에 복지부의 일이 있잖은가. 내가 힘을  썼지.  덕에 일사천리로 복지부장이 되지 않았는가.”

알테온이 한쪽 눈을 감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전혀 작지 않아서, 주변의 귀족들도 듣고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놈이 황자전하와 사이가 꽤 좋았나? 이런 시선이었다.

다른 귀족도 듣고 있는 상황에서 알테온의 체면을 구겨버릴 순 없기에, 영문은 모르지만 말을 꾸며냈다.

“그 일은 무척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기회가 생겨 전하에게 인사를 드릴 자리가 마련되어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초대를 받지 않았으면 섭섭할 뻔 했어.”
“거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알테온은 나를 중심으로 데려가더니 귀족들에게 소개를 시켰다.

“그대들도 알겠지. 내 배다른 누이와 결혼한 이지훈 백작을.  체면을 봐서라도 그대들이 잘 대해주길 바라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까 격이 떨어진다는 말을 내뱉은 귀족이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다른 귀족들도 허물없이 다가왔다.

‘역시... 앞뒤가 다른 새끼들이야.’

귀족은 정말로 정이 안 가는 족속이다. 나 역시 가면을 쓰고 그들과 살갑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카엘로스의 휘하 기사를 따라 걸었다.
기사는 알테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릴리아를 동행시키고 싶었으나 거절당했다.

‘무슨 일이지.’

알테온이 나를 따로 부를 낌새가 보이긴 했는데. 릴리아가 곁에 없으니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이곳입니다.”

기사는 허름한 건물에서 멈춰 섰다.
안으로 들어가자 외관과는 다르게 널찍한 공간이었다. 알카드 카엘로스가 다가왔다.

“왔군.”
“전하께선?”
“안쪽에 계시네.”

그를 따라 내부 깊숙이 들어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부가 넓어지는 구조다. 계속 나아가다 보니, 지하로 통하는 공간이 있었다. 알카드는 그곳의 문을 열고 내려갔다.

‘시발, 존나 수상해 보이는 데잖아.’

지하는 굉장히 넓었다.

“놀란 모양이군.”
“아무래도. 이런 공간이 있을 거라곤 예상하기 힘들지 않나.”
“이곳이 진짜네.”

알카드가 조금 격양된 기색으로 말했다.
뭐가 진짜라는 거지?
제대로 된 설명도 없는 뜬구름을 잡는 말이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알카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걸어갈수록 짐작 할  있었다.

콰앙.
멀리서부터 폭음이 들려온다.

“하하. 겁먹지 말게. 그대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으니. 아무튼 환영하네, 여기가 지하투기장이네. 자네가 오늘 구경한 건 세발에 피도 되지 않아.”
“음...”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제  투기장과 다르게, 이곳은 진짜 강자들이 싸우는 곳이었으니까.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전부 마나를 다루는 수준의 싸움이란 걸.

넓은 콜로세움은 통짜 유리로 덮여있다.
검기가 닿아도 깨지지 않는 게 어지간히 단단한 금속이 섞여있는 모양이다.

서로를 죽이려는 전투에 열광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관중석은 전부 비밀스러운 작은 공간으로 각각 분리되어 있었다.

알카드는 가장 높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 알테온이 술을 홀짝이며 전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는가?”
“네.”
“동생도 술을 들겠나?”
“주시면 마시겠습니다.”

알테온이 술이 따라진 잔을 건넸다.
그가 다시 시선을 밑으로 옮기며 말했다.

“동생은 지구인을 어떻게 생각하나?”
“도움이 많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그들은 참 쓸모가 많지.”

말하는 사이에 전투의 판가름이 났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걸 쳐다보았다.

‘뭐야... 죽었잖아! 이런 잔인한 경기가 있다고....?’

패배자는 목이 잘려버렸다. 적어도 어제 투기장에선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는데.
알테온이 무심한 눈으로 내뱉었다.

“음. 아직 저 친구를 이길만한 자는 나오지 않는 건가.”
“저자는 5성의 수준입니다.”

알카드가 옆에서 말했다.
알테온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돌아봤다.

“저 패배한 자는 자네와 같은 동향의 사람이네.”
“그렇군요.”
“음? 놀라지 않는 겐가.”

놀랐다.
하지만 티를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연습한 표정관리가 무척 도움이 됐다. 나는 차분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보다, 저를 이곳에 부르신 이유가..?”
“아. 그렇지. 아까 말했듯이 지구인은 참 쓸모가 많은 자들이네.”

알테온은 술을 다시 들이켜고 이어서 말했다.

“마도공학도 무척 도움이 되지만, 나는 그들을 더 다양한 방면으로 이용하고 싶네. 하지만 하나로 뭉치기가 쉽지 않아. 정확히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가 어렵다는 뜻일세.”
“혹시.. 제게 그 일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그렇다네. 같은 동향의 귀족이 이끈다면 지구인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알테온이 잔잔하게 웃었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알테온의 얘기와 지금 이 지하투기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단지 분위기를 잡으려고 이런 곳으로 데려오진 않을 노릇이다.

“제안은 감사드립니다만, 이곳까지 저를 데려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밑을 보게나.”

나는 알테온의 시선을 따라서 연이어 진행되는 결투를 바라보았다. 알테온이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말했다.

“저들은 전부 일반인이거나, 재능이 변변찮은 자들이었네.”
“네?”
“백번의 말보다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 주는 게 낫겠지. 저들은 마력을 다루지 못했네. 동생도 알겠지만 재능이 없는 자들이 마력을 각성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해냈지. 희망이 보이지 않나? 저들의 수가 지금보다 더 많아지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알테온이 눈을 빛내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독, 지구인들이 힘을 원하는 경향이 짙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어. 나는 그들에게 힘을 줄  있지만 믿음까지 주기란 쉽지 않았네. 마나를 각성하게 도와주거나 경지를 상승시켜 준다 했더니 의심부터 하더군. 그렇지 않았나?”
“네, 전하.”

알카드가 대답했다.
알테온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어. 어쨌든 나는 동생이 알카드와 함께 지구인들을 결집시켜주었으면 하는데, 동생의 생각은 어떻지?”

나는 알테온의 시선을 받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제안을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장  걸림돌은 거절했을 때 알테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였다.

‘어쩌면 크리스와 아예 붙어먹었다고 간주할 수도 있어.’

교모하게 대답을 유예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술잔을 입에 대었다. 대답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자연스럽게 경기장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곳엔 5성의 수준이라 말한 자의 마나가 역류하고 있었다. 가면남의 사례가 있어서 알아보기 수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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