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28화 (28/44)



〈 28화 〉28화

눈이  트이는 기분이다.

‘그래!  이 생각을 못했지?’

교육도 엄연한 복지의  종류다. 어쩌면 단기적인 효과도 볼 수 있다.
굳이 새로 지을 필요도 없다.

‘제국의 아카데미 시스템을 뜯어 고치면 해결 될 일이야.’

제국 아카데미는 귀족만 등록이 가능하다. 특별한 걸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귀족가문의 자제들 간 사교를 위한 장소나 다름없는 곳.

얼마나 비효율적인가!

반발이 아주 심하겠지만 평민들도 등록이 가능하게 만든다. 제국은 정말 수많은 인구들이 이룩한 나라다.
모르긴 해도 5억 명은 될 거다.
귀족이라고 핏줄이 용의 자손이던가?

‘오히려 마나에 재능 있는 사람은 평민들이 훨씬 더 많을 거야.’

인구수가 다르다.
실제로 마탑만 해도 다수의 평민이 마법사가 되어 신분의 경계를 한발 걸쳐놓지 않았나.

‘마탑도 필요 없어. 아카데미에서 마법도 배우면  테니까. 굳이 비싼 마탑에 갈 필요가 없지.’

안건을 어떻게든 통과시켜서 아카데미내의 영향력을 최대한 가져온다.

감이란 게 있다.
이건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럼 커진 영향력으로 복지부의 권한도 강해지겠지, 이후에는 서서히 평민들에게 내 영향력을 키우기 쉬워진다.

나는 영문 모를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는 둘에게 말했다.

“제국의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운다고 생각하면 어떨 거 같아?”
“마탑이 있는데 굳이 배울까요? 저라면 귀족들과 생활할 바에야 마법사와 어울리겠습니다.”
“그럼 검술은?”
“가르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고명한 검술은 대개 귀족가문 대대로 내려오니까요. 기껏해야 실전용 검술을 가르칠 텐데, 그 정도는 군에 지원하면 익힐 수 있습니다.”

릴리아는 턱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나는 김세희를 바라보았다.

“저도, 귀족 분들이랑은 좀...”

반응이 생각보다  좋네.
리엘라라면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연신 칭찬을 해  텐데. 괜스레 그녀가 그립다.

“아!”

김세희가 갑작스러운 탄성을 터뜨렸다.
나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배우려 하는 사람이 많을 거 같아요! 주로 지구의 사람들이요. 귀족과 인연을 트려 하지 않을까요?”
“당신과 인연을 만들려는 귀족은 없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제가 뭐 어때서요?!”

김세희는 울컥했는지 릴리아에게 큰소리로 항의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릴리아는 그녀의 옷차림을 지적하며 말했다.

“품위가 너무 없습니다. 각하를 보세요. 얼마나 번듯한 귀족의 표본입니까.”
“아니, 더워서 그랬다고!”
“각하가 있는 공간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건가요?”
“윽... 애초에 릴리아씨가 시작했잖아요....”
“당신이 너무 허황된 소리를 하기에 현실을 깨우쳐 준 겁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둘이 참 많이 친해졌네.
김세희가 말한 건,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둘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마탑은 너무 비싸. 그렇다고 검술을 배우려 군에 지원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거고. 거긴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릴 수 있는 데가 아니잖아?”

군대는 한번 지원하면 최소 7년의 복무를 해야 한다. 내가 용병 노릇을 한 이유가 다 있는 거다.

“내 생각엔 충분히 가능성 있어. 마법과 검술을 가르쳐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것도 학비를 아주 저렴하게 해준다면 미친 듯이 지원하겠지. 뭣하면 아카데미 소속 평민들을 보호할 법안도 만들면 돼. 지켜질지는 몰라도 그런 안전장치라도 있으면 견딜 평민들이 충분히 많을 거 같은데? 아니면 아예 따로 나눠도 되고.”
“각하보다 귀족을 오래 봐온 제 입장에선, 여전히 허황된 말로 들립니다. 귀족과 평민이 섞인 곳이라니. 끔찍하네요.”

릴리아는 여전히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어떻게든 밀어 넣으면  되나. 진짜 괜찮은 생각인데. 뭔가 확실히 평민들을 보호할 수단만 있다면...’

릴리아가 워낙 반대의 의견이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의 방향이 바뀌었다.
보호할 수단이라.
확실히 법이 지켜질 거란 기대는 회의적이다.

“리엘라와 제대로 상의를 해 봐야겠어.”
“확실히, 지금 보다는 훨씬 그럴듯한 방법이 있을 겁니다.”

릴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도 모시는 이의 똑똑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기, 저는요? 왠지 대화의 흐름에 제가 빠져 있는 거 같은데. 리엘라는  누구예요? 복지부에 그런 사람은 없던데... 저도 끼워줘요!”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황녀전하의 이름입니다.”

릴리아가 차갑게 일갈했다. 싸늘한 눈초리가 김세희에게 박혔다.

“네....? 네에에에에?”

김세희의 목소리가  안을 가득 울렸다. 고성을 잔뜩 내뱉은 입이 뻐금뻐금 거리고 있었다.
김세희가 덜덜 떨리는 몸으로 말했다.

“아, 아니... 그럼 각하께서는 왜....?”
“각하는 황녀전하의 부군이십니다.”

김세희는 이빨을 부딪치며 작은 소음을 냈다. 그러다가,  안을 가득 메울 비명을 내질렀다.

“조용히  하세요... 언성을 높이지 말라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요?”
“히끅...”

김세희의 딸꾹질 소리만 가득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기절할  보이는 김세희를 보며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말해준 적이 없구나...’

괜히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


“흐음.... 귀족들의 반대가 크겠어요.”

리엘라는 검지로 툭툭 볼을 두들기며 평가를 내렸다. 그녀가 흥미가 짙은 음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입지를 다지기에는 괜찮은 방법이네요. 무엇보다 당신을 중심으로 지구인을 뭉치기엔 꽤 좋아 보여요. 마도공학자들을 이용하면 되겠죠.”

리엘라는 살며시 웃으며 입가를 핥았다. 처음 볼 때도 아름다웠는데 행동에 묻어나오는 요염함이 완전 물이 올랐다.

‘심장에 안 좋아....’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마도공학자를 이용한다니? 그들을 초청해서 하나의 수업으로 만들라는 거야?”
“제국에서 가장 떠오르는 건 마도공학이에요. 당신의 발상은 좋으나, 시작부터 사람들을 모으기는 어렵겠죠. 하지만 마도공학을 가르친다면 그건 해결될 거예요. 검과 마법은 이후에 일이죠.”

마도공학자를 늘리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지만 아직은 시도를 안 하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다.
첫 스타트를 내가 끊는 거니까.

“게다가 다른 파벌을 따르는 마도공학자들을 빼앗을  있겠죠.”

리엘라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핵심을 날카롭게 찌르는 말이 그녀의 목적을 드러냈다.

“아무튼, 아카데미 건은 찬성한다고 봐도 되겠네?”
“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얘기였어요.”

리엘라의 얼굴이 만족스러워 보인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듯 머리를 매만지다가 말했다.

“우리는 알테온의 파벌을 갉아먹어야 해요. 마침 좋은 기회가 있잖아요? 이참에 알테온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짐작할 수 있겠죠.”
“그렇긴 한데....”

리엘라가 말하는 기회란 초대장의 내용일 터. 허나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 틈새에서 혀가 매끄럽게 굴러갈지 의문이다.
기왕이면 조금 더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날짜가 정해져있어 그럴 시간은 부족했지만.

“표정을 지금보다 더 감출 줄 알아야 해요. 무슨 생각인지 보이니까.”
“아.... 자꾸 깜빡하게 되네. 신경 써볼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네요.”

당근과 채찍의 병행인가.
어쨌든 리엘라의 말은 들어서 손해  적이 없다. 표정관리에 더 힘써야지.

“당신의 뒤에는 항상 내가 있으니 자신감을 가져요.”
“알았어. 내가 이래 보여도 실전파야. 나만 믿어.”

조금 과장스런 몸짓으로 팔 근육을 자랑하는 시늉을 했다.
리엘라가 피식 웃어버렸다.

“당장 알테온의 파벌을 갉아먹지 않아도 되요. 알테온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이왕이면 당신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더 좋겠지만.”
“이용할 가치?”
“네. 그래서 그의 신임을 받는다면, 배신할 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겠죠.”
“음... 당연히 가능하지! 나만 믿어.”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요?”

리엘라의 장난기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뭔가 울컥해서,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지적받은 표정관리에 힘을 줘 속내를 감추려 노력했다.

“좋아요. 그렇게 더, 표정을 숨기면 되요.”
“무슨 소리야.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아하하하!”

리엘라는 한동안 크게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테 다가왔다. 내  속에 슬며시 손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젖꼭지를 스치는 서늘한 손길이 느껴졌다.
움직임이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이래도요?”
“정말이라니까.”
“얼굴엔 다 드러나는데?”

나는 속으로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금 침대로 직행하면 패배감을 느낄  같다.
윽, 손길이 하반신으로 내려가려 하기에 주의를 줬다.

“자꾸 그러면 나도  참아.”
“왜 참아요?”

정말로 이해가  된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이 보였다. 손길은 이렇게 음란하면서.

“그.. 체통을 좀 지키자.”
“푸흡. 알겠어요.”

나는 아직 리엘라를 상대로 침대에서의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만간 제대로 눌러줘야지, 깊게 다짐했다.
리엘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크리스보다 알테온이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요.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기만 하는 머저리를 이용해서 알테온의 팔을 잘라내기라도 해야죠.”

쉽게 말해서 알테온을 먼저 쳐내자는 얘기였다.

‘인생 시발, 갈수록 힘들어지는구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노력할 때 속은 타들어갔다.
걸을 수밖에 없는 외길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알테온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파악하세요.”
“동생, 동생 하면서 친근하게 대하긴 하던데.”
“설마 그걸 믿는  아니죠? 그러면 좀... 슬플 거 같네요.”
“당연하지.”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할  있을 거야. 솔직히 알테온은 이미 나를 얕잡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
“그건 크리스겠죠.”
“2황자는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가 멍청하다는 거예요. 황제는 되고 싶은데, 동생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려 들지도 않는, 자기만의 옹졸한 기준이 전부인 머저리니까. 제가 그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리엘라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키득거렸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크리스는 알테온에 비해 좆밥이나 마찬가지란 거네.’

 안에서 알테온의 경계심이 올라가고, 크리스는 낮아졌다.

‘단순히 아부로 잘 보이려 하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수도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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